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91화
순환 (3)
“그래, 와서 싸워라. 내가 어떻게 널 말리겠냐.”
나는 두 손 들었다.
가능했다면 발도 들었을 거다.
잘 됐지, 뭐. 유일무이한 주술형 크록이 실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니.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이여.”
“소미한테 가서 보직을 달라고 해라. 지금쯤 사령부에 있을 거다.”
소미는 술법의 강력함으로는 이네스보다도 한 수 위라고 평가받았지만, 군무에는 몸을 담은 바 없었다.
그래서 부대 관리도 맡겨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곧잘 해냈다.
나는 화이트모카와 헤어진 뒤 수술실을 들렀다. 수술실 문턱을 넘자마자 하얀 가운을 걸친 자그만 여성이 알은척을 해왔다.
“간만이네요, 대통령님.”
“박사님이 여긴 웬일이십니까.”
여성은 지금쯤 수도 기술청에서 과학기술부를 이끌고 있어야 할 차수진 박사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가운 안에 편한 추리닝을 받쳐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부스스했고, 얼굴엔 화장기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아무래도 내 각료들 전원이 수도를 탈출하기로 합의한 모양이다. 하다하다 비전투 인력까지 나타나는 걸 보면.
“세상에, 듣던 것보다 훨씬 심하게 다치셨잖아요. 괜찮으세요? 지혈이 제대로 된 거 맞나요?”
그녀는 내 질문을 깔끔히 무시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별거 아닙니다.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다쳤다는 사실도 몰랐을 텐데요.”
“혹시 머리도 다치신 건 아니죠.”
“아쉽게도 머리는 멀쩡합니다.”
“왜 왔냐고 물으셨죠? 그냥 와봤어요. 도저히 일이 손에 안 잡혀서요.”
“박사님이 일을 놓으시다니, 정말로 세상이 망하려나 보군요.”
“왜 이러세요, 저도 듣는 귀가 있다고요. 뉴스에서는 종일 핵미사일 얘기만 하지, 대통령이 다쳤다고 특진이 가능한 의료팀을 보내달라고 하지, 까딱하다 지금 아니면 얼굴을 영영 못 보겠다 싶었죠.”
“제 얼굴을 본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습니까?”
“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죠. 하지만 대통령님이 죽거나 다치면 많은 게 달라지죠. 그대는 제 제일가는 후원자이시니까요.”
“박사님은 유능하시니 공화국이 망한다고 해도 모셔갈 곳이 많을 겁니다.”
“제가 안 가요.”
“왜 안 갑니까?”
“실은 저는 제가 꽤 성가신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거든요. 이런 절 받아줄 사람은 그쪽뿐이잖아요.”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갑니다.”
“그렇게 빨리 납득하진 마시구요.”
차수진이 키득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얼른 들어오세요, 만능 재생세포라고 해서 진짜 만능은 아니에요. 골든타임이 많이 지났으니까 의료팀이 고생깨나 할 거예요.”
“골든타임이 지났다면 글러먹은 거 아닙니까?”
“혹시 MP 기억하세요?”
“기억합니다.”
에신 수도병원 원장 조명래가 개발한 개념이었지.
세포 재생력을 기반으로 마력 보유량을 추산하는.
“대통령님 MP는 측정불가였어요. 기계가 설정해둔 범주를 까마득하게 넘어서는 바람에.”
“제겐 유리한 요소라고 이해했습니다.”
“맞아요. 그러니 여기 얌전히 누우시고요.”
나는 의료용 침대 위에 가로누웠다. 그 즉시 녹색 수술복을 입은 의료진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간호사들이 침대를 밀고 수술실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안, 차수진이 담당의를 멈춰 세웠다.
“박사님, 손에 드신 그거 넣어두세요. 마취가 가능한 분이 아니세요.”
“마취가 불가능하다고요?”
담당의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
“마취약뿐만이 아니에요, 다른 약물도 어지간하면 안 들으니까 이것저것 재지 마시고 곧장 시술에 들어가시면 돼요. 너무 부담 가지지 마시고요. 살아있는 신을 수술할 기회가 흔치는 않잖아요?”
차수진이 윙크를 보내자, 담당의의 낯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부담을 덜어주려는 건지, 얹어주려는 건지.
그녀의 말대로 나는 마취제가 듣지 않는다.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은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대부분의 약물을 무효화하니까.
머리맡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수술용 장비들을 세팅하는 듯했다.
간단히 끝날 수술이 아닐 것 같아, 나는 눈을 감고 아까 하다만 명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나는 머지않아 육신과 정신을 간단하게 분리해냈다.
나는 광대한 정신세계의 밑바닥에서 다시금 그니르의 영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기억 일부가 다시 파노라마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기억의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영혼의 붕괴는 가속화되었다.
그니르는 투스라를 도와 대륙을 정벌했다.
최초의 진정한 통일국가를 수립해냈다.
참모장 길레악, 총사령관 울토르, 제사장 아바르, 수석 주술사 오림.
훗날 에사인의 위계에 오르는 쟁쟁한 인물들이 그와 함께 대업을 완수했다.
나는 그니르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젊었을 적 모습을 생생하게 엿보았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어떤 포부를 품고 싸웠는지도.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먼저 성문법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영주마다 다른 잣대로 백성들을 쥐어짜니 민심이 따를 리가 만무합니다.”
그니르는 법치주의자였다. 그는 투스라를 도와 율법을 만들고 사법체계의 기틀을 다졌다. 그가 세운 시스템이 잘 돌아갈 때의 황국은 분명 살만한 나라였다.
“나는 다시는 누구도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나는 이 검으로 영세토록 국경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울토르는 편한 자리들을 마다한 채, 부하들을 이끌고 변방으로 떠났다. 그는 공언한 대로 수천 년간 황국의 울타리를 꿋꿋하게 지켜왔다.
“네 야망이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릴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까? 우리가 역사에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아바르는 기나긴 전쟁에 환멸을 느꼈다. 그녀는 신성 파르마 제국의 잔당을 이끌고 남쪽 숲에 틀어박힌다.
“당신은 옳습니다, 언제나.”
길레악.
참모장이었던 그녀는 황제가 기로에 설 때마다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녀는 황제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심지어 그의 부인보다도 더 잘 헤아리는 듯이 보였다.
황제가 그녀에게 할애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황제의 얼굴을 볼 일이 줄어든다고 느꼈다.
기억의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어느덧 그니르의 삶도 종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예전의 총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그는 어떻게 하면 백성들에게 효과적으로 공포를 심어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과거의 동지였던 여섯 에사인을 견제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는 나를 만만한 상대라고 여겼다. 그의 머릿속은 하루라도 빨리 남부전선을 정리하고 동부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그는 전쟁에 불성실하게 임했으나, 단 한 가지 가능성만은 진심으로 경계했다.
이황자 우르가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는 것.
아르세니오도 며칠 전에 똑같은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다.
내겐 그 두 사람 사이를 갈아놓을 권리도 없다.
내가 그래야만 한다면 반드시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나는 그니르의 영혼을 더욱 가열차게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니르에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 순간, 퍼석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영혼의 코어가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나는 내팽개쳐지듯 거칠게 정신세계 밖으로 쫓겨났다.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냇물처럼 반짝이는 듯한 빨간 우단이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뒤늦게야 그것이 우르술라의 머릿결이라는 걸 깨달았다.
“성공한 것일까.”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내게 머리를 기울였다.
“누님, 저 눈 떴습니다.”
“보고 있다.”
“이러시면 제가 못 일어납니다.”
“이대로도 좋지 않으냐?”
이름 모를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누님 성격상 전쟁통에도 향수를 뿌리고 다닐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여인에겐 원래부터 향기가 나는 법이라고 멋대로 결론을 지어버렸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밀어내며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순진한 총각 놀리시는 거 아닙니다.”
그녀가 킬킬 웃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먼저 상처를 입었던 부위부터 확인해보았다.
어깨는 붕대로 두껍게 감겨있었는데, 수술 전보다 상태가 훨씬 호전되었음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의사가 그러더구나. 당분간 경과를 지켜보긴 해야겠지만 검을 잡는 데엔 무리가 없을 거라고.”
“지켜볼 것도 없습니다. 완전히 나았으니까요.”
시범 삼아 어깨를 돌려보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다치기 전보다도 상태가 더 좋아진 것 같다.
“네가 누워있는 동안 나브니가 합류했다. 오합지졸들을 팔십만이나 데려왔더구나. 이 타이밍에 계집을 부른 건 탁월한 안목이다. 마침 적당한 화살받이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으니.”
“제가 얼마 동안 누워있던 겁니까?”
“오늘이 딱 일주일째다.”
“.......망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침대를 구르듯 내려와 옷을 서둘러 걸쳐 입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별일 없었으니.”
“정말입니까?”
“보자, 오림과 길레악이 설친 덕에 동부전선이 대부분 정리되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구나. 그들의 연합군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지만, 네가 그니르의 힘을 흡수하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은 아니었지.”
“설마 아직도 레게스트라인 겁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회복된 건 애저녁의 일이었다. 그니르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느라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고야 말았다.
물론 그로 인해 얻은 건 적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내가 모든 면에서 달라졌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황제가 다시 질서의 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도 말해야겠지. 그쪽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모양이다만.”
“이러다간 동군과 중군 사이에 끼어서 일망타진당할 수도 있겠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둘을 한자리로 모아 역으로 우리가 일망타진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두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건 사절입니다.”
“그것도 좋겠구나. 이번에는 나만 남겨지진 않을 테니.”
나는 우뚝 멈춰 서서 그녀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흘려듣기에는 굉장히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누님?”
그러나 그녀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나는 홀린 듯 그녀가 남긴 자취를 바라보다가, 개다 만 이부자리를 발견했다. 억센 물풀을 돌돌 말아 만든, 남부식 깔개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간편식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운 흔적도 보였다. 그녀는 내 곁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듯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아 병실을 나섰다. 목생족 군대가 가까이 와있다는 게 실감되었다. 그들은 이번에도 우리 군대와 목청껏 군가 대결을 펼치는 중이었다.
“네가 눈을 뜨기만을 고대했다.”
우르가 병실 입구에 등을 기댄 채 초췌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잠을 안 잤냐? 꼴이 말이 아닌데.”
“황도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잠이 오질 않더군.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우르.”
“너는 곧 아버지를 만날 거다.”
그가 충혈된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너와 아버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황국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목전까지 칼을 가져온 건 네가 유일하다. 나는 네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날도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리라 확신한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아버지와 대면할 잠깐의 기회다. 단 한 마디라도 좋다, 그에게 말을 걸 기회를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