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90화
순환 (2)
변화란 다론 본인을 가리키는 것이겠고.
혼돈이란 다르마알이겠지.
그렇다면 질서는 황제인가 아니면 나인가.
무지 궁금하긴 한데, 캐묻지는 않았다.
아바르의 예언에서 내가 알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였다.
“만약 예언이 진짜라면 장대에 꽂힌 에사인의 목도 곧 볼 수 있겠군.”
“그니르의 목을 성벽 위에 걸어두긴 했어.”
“그니르는 절대 아니야. 예언에 장대에 꽂힌 에사인의 목을 슬픔에 젖어 바라본다는 구절이 있었으니까. 그놈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기실 예언에 언급된 에사인은 너일 가능성이 높다.”
다론이 끼어들었다.
“뭘 알고 하는 말이냐, 되는대로 지껄이는 중인 거냐.”
“나는 변화다, 박봉팔.”
“그래서?”
“변화란 그저 사물의 성질이 달라짐을 나타내는 관념에 불과하다. 변화 스스로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하기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상응하는 크기의 외적 요인이 작용해야만 한다. 그 변화가 시대를 바꿀 정도로 거대한 광풍이라면, 필시 요구되는 외적 요인의 크기도 어마어마할 터.”
“말씀하시는 요인이란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에사인의 죽음이겠군요.”
“나는 그렇다고 본다. 여러 후보군 중에서 박봉팔이 가장 앞서나가고 있다는 건 부정하지 못할 테지.”
“그럼 저희는 무얼 해야 할까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는...”
퍽.
나는 발을 뻗어 다론의 입을 짓밟아버렸다.
이어서는 흉측하기 그지없는 눈알도.
그니르의 복부는 완전히 훼손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지고 말았다.
“분명 그 이름을 말하면 입을 뭉개버린다고 말했을 텐데.”
“라힐, 다론은 우리에게 유용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 충동적인 대응은 좋지 않아.”
나는 바닥을 굴러 부츠에 묻은 피를 털어내었다. 이네스는 그러는 내내 비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네스, 주술에 관한 한은 네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하겠지만, 에사인을 어떻게 응대할지는 내 영역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이런 기회주의자야.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며 혓바닥만 나불대는 놈들. 그니르에게 빌붙어서 힘을 빌려줄 때는 언제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친근한 척하는 꼬라지를 보라고.”
“하지만 우리에겐 진실을 가려들을 안목이 있잖아.”
“신뢰할 수 없는 자와 시간낭비하지 말라는 게 내 안목이다.”
다론은 내게 방법을 제시하려고 했다. 오십만 병력과, 오백만 국민 전체의 운명을 짊어진 판단에 개입하려 든 셈이다.
내가 원해서 가진 자리도 아니고, 만나려고 한 자도 아닌데 그가 내 사고를 오염시키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
“알았어, 이건 네 영역이 맞지.”
이네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저런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지으니 귀엽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혹시 내가 미친 건 아니겠지?
“정리는 대충 여기 사람들한테 맡기고, 애들 데리고 올라와. 간만의 파티인데 가서 뭐라도 먹어야지 않겠냐.”
“나는 서고에 가있을게. 네 주술을 좀 더 개량해볼까 해서.”
“거기서 개량이 더 가능하다고?”
“효과를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발동시간을 당기는 게 네게 좋을 것 같더라.”
“그건........ 부탁하마.”
이네스는 근위전사들을 대동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바람이나 쐴까 해서 요새 밖으로 나왔다. 당장의 급선무는 그니르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겠으나, 명상을 계속할 기분은 아니었다.
수비병들이 보내오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가니페르 수비대장과 내가 나눈 대화를 공유한 듯했다.
어쩌면 마음을 읽는 능력이 군체의식보다 더 골치 아플지도 모르겠다.
군체의식은 말단세포 하나가 겪은 것을 다른 세포들도 똑같이 보고 들을 수 있었잖아. 윤리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그들이 공유한 정보는 팩트 그 자체였다고.
하지만 마음을 읽는 능력이란 누군가의 주관으로 가공된, 지극히 편향적인 정보를 공유하는 술법이다.
비유를 하자면 실명으로 글을 쓰는 온라인 커뮤니티 같은 거지.
막말로 저들이 지금 속으로 라힐 개새끼란 소리를 열심히 떠들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
부하들에게 지시한 분류작업은 다음 날 본격적으로 점화되었다.
우리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십만에 달하는 레게스트라 주민들을 구 단위로 쪼개 격리조치했다.
요새 지휘관 가니페르는 휘하 장교들을 인솔해 항의방문을 왔다.
“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오? 재산과 생명을 보장한다는 말은 전부 거짓이었소? 당신들이 모시는 에사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가니페르.”
그가 부하들을 밀치며 사납게 걸어왔다. 그는 내 멱살을 틀어쥐며, 침을 튀기며 격하게 외쳤다.
“말해보시오, 이게 다 뭔 개수작인지! 만약 우리를 기망했다면 길레악 님이 결코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요!”
“상관없어, 어차피 그자와는 담판을 지어야 하니.”
“이 간악한...!”
“내가 해줄 말은 간단하다. 우리의 규칙을 따른다면 존중받겠지만, 그러지 못하겠다면 깔끔하게 서로 갈 길 가자는 거다.”
나는 멱살을 쥔 그의 손을 힘으로 떼어놓았다.
“길레악이 부여한 힘을 포기하는 자는 공화국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것이다. 도시의 재산은 모두 수거해 남은 자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해주도록 하마. 하지만 정 힘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이곳을 떠나 너희를 받아주는 땅으로 가면 된다.”
“그, 그건...”
“시작해.”
나는 장교들에게 명령했다. 장교들은 주술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고, 주술사들은 곧 도시 각 구획을 분리하는 차폐막을 쳤다.
가니페르는 우두커니 선 채 수염을 벌벌 떨다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쳤다.
“우, 우린 전혀 언질을 받지 못했소. 이렇게 중요할 일 같으면 최소한 논의를 할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니오?”
“이 도시에 논의라는 단어가 존재하는지는 몰랐군.”
“대체 우리를 뭣으로 보는 거요? 이런 식의 날치기는 언어도단이오!”
“왜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음을 읽지 못하면 네 사람을 믿지도 못하겠다는 건가?”
“내가 못 믿는 건 내 사람이 아니라 당신들이오. 당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그거면 걱정할 거 없다. 우린 그저 떠날지 남을지를 질문할 뿐이야.”
“하지만...”
“닥치고 얌전히 있어. 곧 결과가 나올 테니.”
가니페르는 입을 다물었으나, 잠시도 얌전히 있지 못했다. 그는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요새 앞마당을 쉼 없이 돌아다녔다.
“못 믿나 본데.”
정기호가 나직하게 말했다.
“못 믿지. 재산을 나눠준다는데.”
중국은 군체의식을 만들며 사회주의적 이상국가를 꿈꿨다. 영혼을 모조리 합쳐버리면 이상적인 평등국가가 된다는 거다.
레게스트라는 완전히 반대다. 레게스트라에는 여느 황국 도시들과 같은 신분의 격차가 존재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길길이 날뛰는 가니페르만 해도 요새 수비대장이자 상급귀족이란 번듯한 지위가 있으시다.
그래서 그들은 통합하지 못한다.
곧 배신자가 줄줄이 사탕처럼 나올 거라고.
그동안 머릿속으로는 별의별 소리를 떠들고 다녔겠지.
날 욕할 때는 신이 났을 거다.
하지만 과연 길레악의 권능이 인간의 본성보다 우선할까?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재물을 탐내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냐.
약 두 시간 후, 흑철전사단 장교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방금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설문을 마쳤습니다.”
“말해라.”
“약 7만 8천 명의 주민이 잔류에 동의했습니다. 남은 2만 2천 명에 대한 추방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가니페르가 치를 떨며, 핏발 선 눈을 부릅떴다.
“네 예상대로군.”
정기호가 담배연기를 뿜어 올리며 촌평을 남겼다.
아니, 내 예상은 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잔류파가 더 나올 줄 알았다.
인구의 약 2퍼센트가 귀족이고 나머지 98퍼센트가 평민, 천민이다.
2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귀족이 전체 부의 98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고.
더군다나 레게스트라의 귀족들은 부만 점유한 게 아니라 감정공감 권능으로 사고의 독재까지 자행했다.
그래서 나는 못해도 9만 명은 나가리가 될 거라고 내다보았다.
너무 현대화되어버린 사고가 저지른 착오인 거지.
“무슨 협잡질을 한 거냐? 정신계 술법이냐? 네 간교한 권능이냐? 뭐가 됐건 길레악 님이 좌시하지 않으실 거다!”
“끌고 가라, 성문 밖까지.”
나는 근위전사에게 턱을 까딱여 지시했다. 가니페르는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함을 지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제야 앞으로 나갈 수 있겠군.”
“아이르 자치령의 군대를 기다리지 않을 셈이냐?”
“기다리면 늦어.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황도로 간다.”
“우리가 황제를 상대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보나?”
“글쎄.”
나는 정기호의 마지막 질문에는 대답을 보류했다.
내가 예언이 일컫는 메시아일지, 다론 말마따나 새 시대를 열어줄 불쏘시개일지, 아니면 그저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느낌상으로는 불나방일 것 같긴 한데.
에사인이 되어서도 운명이란 불투명하기만 하다.
“지구에서 들어온 소식은 없나? 동부전선이라던가.”
나는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정기호는 내 의도를 알면서도 맞장구쳐주었다.
“영국은 완전히 괴물천지가 되고 말았다. 유럽은 굳이 바다를 건너가며 영국을 도울 정도의 의리가 없는 것 같고.”
“유럽연합의 끈끈함도 이젠 옛말이군.”
“일본과 중국은 소식 자체를 접하기 힘들어졌다. 에사인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과도기라고 본다.”
“안타깝네.”
“그리고 네 팔을 고쳐줄 의료팀이 도착했다.”
“어디에?”
“별채로 가 봐.”
어디가 아니라 누가 왔냐고 물었어야 하는데.
별채에서 화이트모카를 맞닥뜨리고 든 심정이었다.
이 유일무이한 하얀 크록은 전쟁통 같은 부상병동 속에서 홀로 우아한 기품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위대하신 이여.”
그가 나를 알아보고 가슴에 손을 올리며 예를 표했다.
나는 우선 그의 주변부터 살펴보았다. 얼굴을 알만한 다른 사람이 또 왔을까 해서.
“설마 네가 날 담당할 의료진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분들은 임시로 마련한 수술실에 계십니다.”
화이트모카의 입가에 꽤나 인간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왜 여기 왔나? 내가 분명 총리대행을 보좌해 국정을 이끌라고 말했을 텐데.”
“제가 있어야 할 곳은 국회가 아니라 위대하신 이의 곁입니다. 총리대행께는 미리 양해를 구해두었습니다.”
한 고집 많은 비익족 소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유가 있어서 빼둔 건데, 다들 왜 죽고 싶어서 안달이라지.
“너는 공당의 대표다. 국민은 너더러 싸우다 죽으라고 투표권을 행사한 게 아니야.”
“그 말씀을 엘리시아 님께도 하신 걸로 압니다. 처음에는 저도 수도에 남아서 내치를 돕는 게 옳다고 여겼습니다만, 곧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전부가 아니라니?”
“저는 과분하게도 저를 어여삐 봐주신 국민께 막중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런데?”
“위대하신 이의 영광을 위해 신명을 다하라는 게 저를 뽑아주신 국민의 총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