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89화
순환 (1)
나는 요새 성채에 입성해 적 지휘관으로부터 깃발을 넘겨받았다.
요새 지휘관은 70~80대가량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는 내게 항복의 예를 표하는 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성채에 모인 적 장교들도 서럽게 눈물을 훔치며 자기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감정공명 현상 때문에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네요.”
소미가 한국어로 말했다.
“나쁜 사람이 맞지. 조상 대대로 모셔온 에사인을 눈앞에서 죽여버렸으니. 혼돈의 군대를 나라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했고.”
아직 나브니의 군대는 당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첩자들을 통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세가 조직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 중에서 이분들의 상실감을 덮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걸요.”
“반란이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일 거야.”
나는 다시 노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노인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슬픔도, 증오도, 굳이 마음을 읽지 않아도 될 만큼 적나라하다.
“가니페르.”
“말씀하시오.”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서 너희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의 생명권과 재산권을 존중하고자 한다. 다만 한 가지 조건에만 따라 준다면 말이지.”
“...무엇이오?”
“길레악이 내려준 힘을 포기해라.”
노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장교들은 분노에 찬 노성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는 길레악 님의 종복이오. 그분의 힘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살아갈 가치가 없소!”
“차라리 내 목을 쳐라! 우리의 육신은 죽여도, 영혼만은 죽이지 못할 것이다!”
크록 근위전사들이 경고의 의미로 무기를 뽑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진정해라, 내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길레악의 마력을 내려놓는 것뿐이니까. 10만 명이나 되는, 정신감응이 가능한 주술사 집단을 후방에 남겨둔 채 군대를 움직일 수는 없지 않겠나? 게다가 힘을 포기한다는 게 신앙을 포기하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야. 길레악을 믿고 안 믿고는 여전히 너희의 자유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노인이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서로의 영혼과 연결되어 사고와 감정을 긴밀하게 나누오. 그분의 힘을 포기하라는 건 우리더러 벌거벗은 채 광야로 나가라는 말과 다름이 없소.”
“징징대는 건 그쯤 해두시지.”
우르가 끼어들었다.
칼같이 서늘한 어조로.
“너희는 싸우고 싶지 않아서, 죽고 싶지 않아서 항복했다. 비겁자면 비겁자답게 너희를 정복한 에사인에게 예를 갖춰라.”
“우린 비겁해서 항복한 게 아니라, 피를 보지 않고도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항복한 거요! 기어이 우리 요새를 넘보려 했다면 당신들의 피해도 만만찮았을 거라는 걸 명심하시오!”
“원만한 합의를 바란다면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집부터 내려놔야지. 점령군 사령관이 방금 뭐라고 하던가. 피정복민의 생명권과 재산권을 존중해준다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라는 걸 모르겠나?”
“우르 게네발!”
노인이 눈을 부릅뜨며 불호령을 내질렀다.
“배신자 주제에 잘난 척 떠들지 마라!”
“...나더러 배신자라고?”
우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쯤 해둬. 밥 먹고 와서 다시 얘기하자고.”
슬슬 그를 말려야 할 것 같다. 안 그러면 사고 칠 것 같아서.
우르는 노인과 그의 무리가 물러나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갔네요.”
소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죠? 이래서는 도저히 타협점이 나올 것 같지 않아요.”
“마치 조선 말기의 양반들을 보는 것 같군.”
정기호가 한마디 거들었다.
“양반보다 더하지. 이쪽은 신앙심까지 얽혀있으니까. 평생 한 가지 삶의 방식밖에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단기간에 설득한다는 건 불가능해.”
“한가하게 죽치고 앉아 설득할 시간도 없다. 우린 동부전선이 무너지기 전에 황도에 도착해야만 한다. 황제와 길레악, 로켄, 오림을 동시에 상대하지 않으려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소미가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답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래, 나는 답을 알고 있다.
- 기억해라, 인간이란 얼마나 간교하고 비열한 존재인지. 공포를 기반으로 삼지 않은 통치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니르가 이미 내게 길을 보여줬잖아. 때로는 원초적인 방식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그놈이 왜 전투에 앞서 내 신도들을 형틀에 매달아 불태웠겠어?
왜 도시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말뚝에 못 박았겠어?
그게 다 통치행위라는 거거든.
그래야만 유지되는 질서라는 게 있거든.
내게 불복한 자들을 포박해 광장에 매달고, 능숙한 고문관을 시켜 살점을 하나하나 발라낸다. 가능한 한 오래 살려두어 놈들의 비명 소리가 오랜 시간 울려 퍼지게 만든다.
이 단순한 과정을 전통이나 신앙 따위의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될 때까지 반복한다.
지구와 에신을 불문하고 수많은 지도자들이 숱하게 저질러왔던 일이었다.
그 유구한 역사에 나 하나쯤 더 보탠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나.
.......문제가 있긴 하다.
사람으로서의 도리와 지도자로서의 도리.
둘이 상충한다는 게 코미디였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그니르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당찬 포부에 젖어있던 청년이었다.
그 또한 어느 순간 이런 딜레마에 직면했겠지.
배 째라는 놈들과 배를 쨀 수밖에 없는 상황.
분명 그에겐 충분한 명분이 있었을 거다.
고심도 오래 했겠지.
그러나 통치행위란 이름의 폭력이 반복될수록 인간성은 무뎌져만 간다.
“오빠?”
소미의 목소리가 나를 미몽에서 끄집어냈다.
“.......이렇게 하자.”
나는 신중히 첫 마디를 열었다.
“일일이 설득할 시간이 없으니, 주민 전부에게 개별로 의사를 물어본다. 힘을 포기한다고 하면 집과 땅을 가진 채 여기서 계속 살도록 하고,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재산을 몰수해서 맨몸으로 추방한다. 중요한 건 주민들이 서로 담합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격리한 뒤 질문을 해야 한다는 거다.”
“누가 진짜 배신자인지 알게 되겠군.”
우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게스트라 요새의 주민들은 군체의식처럼 의식이 하나로 합쳐진 게 아니라, 그저 서로의 마음을 염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단결력은 군체의식 못지않았다.
누가 딴마음을 먹고 있는지 훤히 아니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버틸 수 없는 환경이었던 거지.
그래서 궁금했다. 과연 주민 중 몇 할이나 그들의 신념을 배신하게 될지.
우리는 승전 기념으로 간단하게 축하연을 가졌다. 축하연이래봤자 거창한 건 없고, 녹스 영지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온 먹거리들을 푸는 게 전부였다.
나는 부하들을 먹고 마시도록 두고는 성채 깊이 틀어박혔다.
아직 그니르의 영혼이 온전히 흡수되지 않았다. 분명 술법이 완벽하게 적중했건만, 단기간에 소화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힘이었다.
나는 차가운 돌바닥에 정좌한 채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그의 영혼이 내 정신세계 깊이 침잠해있는 게 느껴졌다.
마치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거대한 힘의 가장자리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도 느껴졌다.
나는 그의 기억 속을 첨벙첨벙 헤엄치며, 영혼의 코어를 거침없이 두들겼다.
존재의 본질을 근간부터 파괴하는 행위.
이것도 인간으로서 선을 넘은 일이긴 한데,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질 않네.
그러게 동정을 받고 싶었다면 죄업을 작작 쌓으셨어야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앉은 채로 눈만 슬쩍 떠보았다.
구름같이 풍성한 머리카락을 허리 어림까지 늘어뜨린 소녀가 멀찍이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네스.”
나는 반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전후처리를 할 때도, 축하연을 할 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네가 확인해봐야 할 일이 있어, 라힐.”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일들을 제쳐두고 싶다.”
“이건 진짜로 중요한 거야.”
“뭔데?”
이네스는 대답 대신 내게 자박자박 다가왔다.
“...설마 술법이 서툴렀다고 나무라는 건 아니겠고.”
“아니. 하지만 생각난 김에 그것도 말해줘야겠네. 실전에서 처음 써보는 것 치곤 무척 잘하더라. 다치지만 않았으면 완벽했을 텐데.”
나는 무의식중에 오른쪽 어깨를 쓰다듬었다. 응급처치만으로는 복구가 어려울 만큼 상처가 깊었다.
어쩔 수 없이 전문의를 급파하라고 수도에 명령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하는 건 역사의 이면에 남겨질 이야기야.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저 영웅 라힐이 사악한 에사인 그니르를 맞이해 용감히 싸워 이겼다고만 전해지겠지.”
“역사의 이면이라고?”
이네스가 내게 손짓했다.
나는 수많은 질문을 접어둔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날 데려간 곳은 성채 지하에 위치한 감옥이었다.
맑은 물이끼 냄새가 비강 끝까지 스며들었다.
장담컨대 이 감옥은 최소 수백 년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임에 분명하다.
레게스트라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는 도시다. 감옥이 필요가 있을 리가 없었다.
감옥 심층부엔 크록 근위전사들이 경비를 서는 중이었다. 그들은 내가 내려올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깜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편히 있어라. 연회에 참석 못 하는 것도 억울한데 여기서라도 쉬어야지.”
“감사합니다!”
근위전사들이 우렁차게 구령을 질렀다.
이네스는 나를 감옥 가장 끝방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내가 본 건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아니, 인물이 아니라 시체였다.
“이걸 왜 여기다 갖다놨냐?”
목이 달아난 그니르의 시신이 사슬에 칭칭 매여 있었다. 분명 주민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장대에 걸어두라고 지시했었는데.
“알고 있겠지만 그니르는 자기 힘만 가지고 싸운 게 아니야. 다론의 힘을 받아들여 너하고 동수를 이뤘던 거야.”
이네스가 그니르의 시신을 향해 다가섰다. 나는 그녀가 뭘 하려나 싶어서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다론이 네게 할 말이 있다고 해.”
그녀는 손을 뻗어 그니르의 셔츠를 잡더니, 위로 두 뼘쯤 걷어 올렸다.
“........환장하겠네.”
시체의 복부에 눈과 입이 달려있었다. 변화의 에사인, 다론에게 침식되었다는 징후였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갔다. 두꺼운 입술이 열리며, 손톱으로 머릿속을 긁는 듯한 불쾌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크군.”
다론은 침식한 육신을 통해 내게 직접 말을 걸어왔다. 나는 탐탁잖은 투로 그에게 대꾸했다.
“뭐가 말이냐.”
“역시 탁월한 결정이었다. 여섯째는 좋은 양분이 되어준 것 같다.”
“...알아듣게 말해.”
손바닥만큼이나 큼직한 눈이 몇 차례 꿈쩍이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박봉팔.”
아주 정확한 한국식 발음.
그래서 기분이 더 나빠졌다.
“라힐이라고 불러라. 입을 뭉개버리기 전에.”
“역시 그니르는 너를 당해내지 못했구나. 아바르가 예언한 시대의 종말이 지금임에 분명하다.”
“아바르의 예언을 네가 어떻게 알지?”
“나와 아바르의 인연을 고려한다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지금이 종말의 때라고?”
“그것만은 명확하다.”
그가 다시금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변화, 혼돈, 질서가 한곳으로 모이고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