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88화
약진 (15)
놈은 대답 대신 전신에서 마력을 거세게 끌어올렸다. 갑옷의 마디마디에서 푸른 증기가 마치 내연기관처럼 뿜어져 나왔다.
엄지손가락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진다.
호적수를 만났다는 증거였다.
불과 얼마 전 놈을 대면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그때는 해볼만하다는 느낌이 훨씬 더 컸다.
“내가 뭘 희생했냐고?”
그가 비웃듯이 물었다.
“나는 폐하의 창, 율법의 대행자다. 나는 아무것도 희생할 필요가 없다. 너희 하찮은 것들이 내게 희생한다면 모를까...!”
랜스가 섬전 같은 속도로 뻗어왔다. 응할 준비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한 템포 늦었다.
쩌어엉.
칼날과 창촉이 부딪히는 순간, 칼자루를 쥔 장갑이 갈가리 찢어져 휘날렸다. 충격파가 귓전을 매섭게 때리며, 머릿속을 후벼 파듯 헤집어놓았다.
나는 그의 힘을 상쇄하기 위해 몇 걸음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마그나크록의 참격을 정면에서 받아냈을 때도 꿈쩍도 않았던 칼날이 진도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나?”
그의 랜스가 다시금 나를 겨누었다.
이어서 아까와 같은 찌르기.
랜스가 눈부신 궤적을 그리며 쾌속하게 뻗어왔다.
그저 최단속도로 타깃을 꿰뚫을 뿐인 기술이다.
그러나 이걸 쳐내려면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
뻐어엉.
고막이 먹먹해지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흡사 열차에 치인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두 발로 버티지도 못했다. 나는 한 바퀴 구르고 나서야 간신히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잘 버티는군.”
놈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궁금하나? 내가 어떻게 단기간에 강해졌는지.”
“그래, 궁금해 돌아가시겠다.”
“네가 알아야 할 게 어디 그것뿐일까. 너는 에사인이 아니야. 어쩌다 운이 좋아서 벼락출세한 천것이지.”
“좋으시겠어, 그 잘난 방법을 니들끼리만 알아서.”
“왜 아니겠나? 우리는 영세토록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운명지어졌다. 자격 있는 자만이 권리를 누려야 함은 당연한 일.”
“내가 만들 세상에서는 그걸 개소리라고 하거든.”
“네가 만들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라힐.”
그가 다시 랜스를 겨누었다.
창광이 번뜩이나 싶더니, 아까보다 훨씬 강력한 공격이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닥쳤다.
이번에는 막을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
카둔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갑옷이 우그러들며, 오른쪽 어깨가 인두로 지진 듯 격렬하게 타들어갔다.
“썅!”
나는 급한 대로 주먹으로 랜스를 쳐 밀어내었다.
오데르한테도 오른쪽 어깨를 당했는데, 정확히 같은 부위에 또 바람구멍이 나고 말았다.
자석을 달아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징크스라고 봐도 되지 않나?
“아, 에사인의 성혈이 흐르는군.”
그니르가 조소를 흘렸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적들은 아주 난리가 났다.
레게스트라 수비병들은 서로 정신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한목소리로 일치단결하여 함성을 내질렀다.
반면 우리 쪽은 초상집이 따로 없다.
겉으로는 조용하나, 속으로는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간절히 기도하는 중이었다.
지지 말라고, 다시 일어서라고, 한 명 한 명의 애달픈 염원이 북채처럼 가슴을 두들겼다.
“그니르, 뭐 하나만 물어보자.”
“유언이라도 남기겠나?”
“너 대체 뭘 희생한 거냐?”
“........”
놈은 잠시 말이 없더니, 투구를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상판이 어떨까 싶었는데, 놈은 말투만큼이나 재수 없는 면상의 소유자였다.
멀대 같은 장신에 어울리지 않는 곱상한 외모.
은발의 머리카락은 여자처럼 길었고, 이목구비는 공화국 거리만큼이나 번듯하게 구획이 나뉘어있었다.
“곧 죽을 놈이 입만 살았다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
“아니, 궁금하잖아. 다론이 어떤 에사인이냐고.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그 깐깐한 작자가, 날개를 새로 뽑아준 것도 모자라서 마력까지 뻥튀기해줬다고? 그런 일은 소설로도 쓰기 힘들지 않나?”
“마지막으로 말하마. 그놈은 나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내 창이 그놈의 추레한 미간을 먼저 꿰어버렸겠지.”
“또 거짓말.”
나는 피가 줄줄 흐르는 어깨를 틀어쥐며 놈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건 네 율법서에 쓰여 있지 않은 모양인데.”
“......그래, 그게 네 유언이로군.”
놈의 기세가 가시처럼 곤두섰다.
지독한 살기가 연기처럼 폐부 깊이 스며들었다.
보아하니 방금 내가 건드린 게 놈의 역린인 것 같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놈은 다론에게 무척 소중한 무언가를 내줬음에 틀림없다.
“잠깐이지만 재밌었다, 라힐. 네 실력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네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가장 마지막에 죽여주도록 하마.”
그가 랜스를 수평으로 든 채 몸을 웅크렸다.
오데르의 창과도 비슷한 일격필살의 찌르기 자세였다. 그는 지금까지 선보인 모든 공격을 뛰어넘을 최고의 기술을 준비 중이었다.
온다.
라고 생각한 순간 이미 창끝이 이마에 닿아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반보 더 빨랐다. 내 검은 이미 놈의 가슴팍에 박혀있었다.
“크허억...!”
놈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떠진다.
울대를 거슬러 솟구친 피가 엷은 입술을 비집고 왈칵 터져 나왔다.
나는 놈의 토혈을 피하지 않았다.
에사인의 성혈이라잖아.
나는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놈의 어깻죽지를 그대로 도려내버렸다.
“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성벽에 부딪혀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과연 놈은 에사인이 맞나보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몇 번이고 까무러쳤을 중상을 입고도 정신을 잃지 않는 걸 보면.
성벽 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조용한 정도가 아니라, 저마다 머리를 부여잡고 좌절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정신감응능력이 이럴 때는 좋지 않아. 부정한 감정의 전파를 걷잡을 수가 없거든.
“허억....... 허억........”
그니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력으로 어찌어찌 기절만은 면했지만, 충격이 컸는지 두 쌍의 날개가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너도 물어봐야지, 내가 어떻게 단숨에 강해졌는지.”
놈이 나를 죽일 듯이 사납게 노려보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오죽 좋았겠냐만.
“내겐 소중한 동료가 한 명 있거든. 남자였다가 여자가 된 놈인데, 그 사연이 또 골 때린다고.”
나는 손을 뻗어 울토르의 대검을 어루만졌다.
“그놈이 나한테 그러더라니까, 나는 멀티태스킹이 안 된다며.”
하얀 기운이 대검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기운은 이윽고 대검 전체를 휘감아 짙은 아우라를 형성했다.
이 기술을 뭐라고 명명해야 할까?
이네스는 기술의 명명권을 내게 넘겨주었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술법이기에.
생각해둔 이름이 하나 있긴 하다.
기억의 검.
돌이켜보면 에신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의 출발점은 전생의 기억이었다.
수많은 환생자들이 모여 자아내는 환장의 콜라보.
그 무대에 종지부를 찍을 기술이라는 의미로.
부끄럽지만 기술의 숙련도는 처참할 지경이다.
술법을 발동시키느라 버벅대는 통에 또 어깨를 대주고 말았다.
그러나 한 번 구동을 시키고 나면 그때부터는 온전히 검술에만 집중할 수 있다. 애초에 그러라고 개발한 술법이니까.
“그건........ 그 술법을 네깟 놈이 어떻게...”
그니르는 얼마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그는 술법의 본질을 한눈에 알아본 것 같다.
놈은 영혼마저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하나 남은 팔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저항이 유의미해지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나는 놈의 랜스를 간단히 쳐내 멀찍이 날려버렸다.
“그니르.”
나는 놈의 얼굴을 향해 대검의 날을 수직으로 세웠다.
투명한 검신에 겁을 먹은 사내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보아온 그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죽음이 다가온 게 느껴지나?”
“잠깐...”
놈의 머리가 자유롭게 허공을 유영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만 년간 세상을 유린해온 신의 최후였다.
머지않아 여섯 번째 권능을 향한 신앙도 종언을 맞이할 것이다. 절망하는 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마족에게 집어삼켜진 에사인의 최후가 일파만파 퍼져나가겠지.
나는 칼날에 묻은 피를 흩어버린 뒤 대검을 소환해제했다.
슬슬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그니르의 영혼이 내게 흡수되고 있었다.
그러나 과정이 상상했던 것만큼 순탄하지가 않았다. 주인을 닮아 완고한 마력이 또 하나의 싸움을 예고했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코와 귀가 막히고, 가만히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속이 메스꺼워졌다. 죄업으로 얼룩진 영혼이 마지막 발악으로 나를 안에서 뒤흔들어놓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놈의 반항을 억눌렀다.
놈의 영혼을 낱낱이 펼쳐 안을 들여다보았다.
명멸하는 시야 속에서 놈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운명의 에사인, 아바르가 보여주었던 비전처럼.
그니르.
그는 여느 비익족이 그랬듯 노예 태생이었다.
천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건 그의 오랜 콤플렉스였다.
그는 신성 파르마 제국의 군대가 대륙을 어지럽히는 틈을 타 우리를 탈출했고, 동족들을 모아 투스라에게 귀의한다.
그것이 최초의 비익족 비행전단이다.
당시 그의 눈은 호수처럼 맑았다. 그에겐 실제로 정의를 위해, 민중을 위해 싸우던 시절이 존재했다.
그의 뒤틀림은 그 자신조차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오랜 세월에 걸쳐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
뒤틀림을 자각했을 때, 정의감에 넘치던 비익족의 영웅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정화의 불로 인간의 고름을 쥐어짜는 괴물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는 우르술라에 의해 날개를 잃은 뒤 다론에게 몸을 의탁한다.
잃은 날개를 복구하고 마력을 증진시키는 대가로 다론이 요구한 건 비어버린 네 번째 권능의 자리와, 신체 일부의 소유권이었다.
결론적으로 그가 발휘한 힘은 실은 그의 몸에 깃든 다론의 힘이었던 거다.
아마 그가 나와 싸워 살아남았다면, 남은 생은 점점 자신의 몸을 침식해가는 다론에게 맞서는 데 바쳐야만 했겠지.
“라힐!”
눈을 떠 보았다.
타락한 영혼과 씨름하는 사이 내 군대가 이렇게나 가까워져 있었다.
크록 전사들이 주변을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우르, 정기호, 막시무스, 크롱크, 오르기, 이네스, 진소미, 제후라와 엘리시아까지, 한가락 한다는 작자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뭐냐, 너희들. 구경났냐.”
“그놈이 너더러 입만 살았다고 했을 때, 솔직히 후련했다.”
정기호가 덤덤히 농담을 건넸다.
농담....... 맞겠지?
“상처가 깊습니다, 주군. 응급처치를 하겠습니다.”
오르기는 충신답게 준비성이 철저했다. 그가 약을 뿌리고 붕대로 팔을 칭칭 감는 동안 진소미는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
“오빠, 다음에는 그냥 처음부터 이겨주면 안 돼요? 보다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라힐은 술법에 재능이 없어.”
주술 스승인 이네스의 혹평까지.
“하지만 검 솜씨는 언제 봐도 인상적이군. 지금까지 보아온 털 없는 자들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제후라를 두 계급 특진시켰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크록 한 명이 목청껏 소리쳤다.
“위대한 분이시여, 레게스트라 요새의 성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여나 싶을 만큼 견고하던 성문이 조금씩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와 동시에 성벽 위로는 항복을 의미하는 반기(半旗)가 게양되었다.
대강 응급처치도 끝난 듯하여, 나는 몸을 일으키며 기운차게 말했다.
“가자고, 황제 낯짝을 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