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87화
약진 (14)
“얼마나 급하게 들고 왔으면 글자 하나 똑바로 못 썼냐.”
“그건 글자가 아니라 이번 전쟁을 위해 개발한 암호야.”
“이게 암호라고?”
나는 지도 위에 휘갈겨진 낙서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과연, 자세히 보니 단순한 악필은 아닌 것 같다.
“공중전력은 아직 적이 우위라는 걸 잊지 마. 비익족 정찰부대는 언제든지 임무가 실패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암호체계를 구축해두고 있어.”
“우리가 이런 암호를 쓴다는 걸 왜 나만 몰랐지.”
“넌 그런 하찮은 일까지 보고받을 입장이 아니니까.”
수긍이 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만한 권력을 쥐어보는 게 처음이라, 내가 어떤 대우를 받아야 옳은지 나조차도 모르겠거든.
“그래서 그니르가 어디라는 거냐?”
“다론의 영지에.”
“......망할.”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어.”
에사인이 에사인을 피해 몸을 숨길 만한 곳.
그곳이 다른 에사인의 품일 거라는 것 정도는 예측했다. 그래야만 숨 돌릴 틈을 벌 수 있을 테니.
그래도 다론은 선을 넘었지.
다론은 변화의 에사인이다. 엘리시아의 날개를 박쥐 피막으로 바꾼 바로 그놈.
그가 다스리는 자치령은 기괴하게 신체가 변형된 키메라들로 뒤덮인 인외지경이라 들었다.
“잃은 날개를 복구하려는가 본데.”
“최악의 발상이야. 다론은 상처를 고쳐주는 게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변화시킬 뿐이니까.”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날개만큼은 되돌려야만 했겠지. 비익족에게 순백의 날개란 등에 달고 다니는 영혼이나 마찬가지니.”
“다론은 아직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어. 황제를 위해 군대를 보내지도 않았지만,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어.”
“그니르를 받아줬다면 중립은 깨졌다고 봐야지 않나?”
“의사가 환자를 마다할 수는 없잖아.”
“아까는 의사 아니라며?”
“병원 간판을 달고 있긴 하니까.”
그렇다는군.
나는 이네스가 건넨 지도를 돌돌 말아 품 안에 갈무리했다.
공화국은 대륙에 버금갈 거대한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고작해야 50만 안팎의 군대로는 온전한 점령도, 관리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심판자 그니르를 거꾸러뜨린다면 상황은 급변한다.
우리가 다가가기 전에 저들이 먼저 성문을 열어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
“라힐.”
“왜?”
“저번처럼 너무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진 마. 아직 술법을 다 익히지도 못했잖아. 네가 그니르를 도발했을 때 난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술법은 거의 익히긴 했어.”
“그럼 여기서 시험해 봐도 될까?”
“지금은 장기간의 여행에 따른 컨디션 난조로...”
“라힐, 너 정말...”
이네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바빴던 건 인정할게. 하지만 지금도 연습할 시간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지?”
“지금이라면야.”
이네스는 미리 준비를 해뒀던 듯 막사 어딘가에서 자료를 바리바리 들고 왔다.
즈라즈가 종족 전체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유출을 막고자 한, 영혼을 흡수하는 비술이 담긴 비급서다.
남몰래 밝혀두지만 그녀는 가르치는 데엔 소질이 없었다.
너무 똑똑한 사람은 훌륭한 스승이 되기 어렵다고 하더라. 다른 사람의 빈한한 사고능력을 이해하지 못하거든.
게다가 그녀는 그 자체로도 어려운 주술을 내게 맞춤형으로 개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녀가 구상한 건 주술을 대검에 덧씌우는 형태의 스킬이었다.
그래야만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내가 에사인끼리의 대전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을 거라며.
맞는 말이긴 한데, 왜 디스처럼 느껴지는 건지.
주술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동안, 그니르를 은신처에서 끄집어내기 위한 모색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다론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에사인이었다. 그와 싸운다는 건 안 그래도 어려운 전쟁에 전선 하나를 더하자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우리는 다론을 자극하지 않는 동시에 그니르만 쏙 빼먹는 전술을 짜내야만 했다.
참신하면서도 익숙한 걸 가져오라는 기안하고 이게 뭐가 달라.
“라힐.”
주술 공부가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정기호가 밤늦게 막사로 찾아왔다. 이 삭막한 사내가 커피나 마시자고 먼저 날 찾을 리가 없기에, 나는 자동적으로 최악의 전개를 떠올려냈다.
“황제가 나섰나?”
“아직.”
“그러면?”
“아이르 자치령이 군대를 냈다. 그 마녀가 앞장선다고 한다.”
나브니가 약속을 지켰구만.
사실 난 이 순간까지 반신반의했다.
욕망은 가장 결정적일 순간에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라고 어릴 적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거든.
분명 그녀와 나 사이에 기이한 유대감이 만들어진 건 사실이나, 그건 의리라기보다는 단순한 변덕의 발로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그녀 또한 나에게 매여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나에게 바라는 게 결핍이라는데, 난 그 의미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는지라.
“한숨 돌리겠군.”
“그래서 하는 말이다. 네가 마녀에게 빠져서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소문이 군영 내에 파다하다.”
“...진심으로?”
정기호는 대답 대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게 묻힌 진실을 캐내려는 듯이.
“뭐냐, 너도 날 못 믿는 거냐.”
“못 믿는다기보다 너무 이상한 동맹이라서 그렇다. 네가 수행원을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것도 그렇고. 가십이라고 넘어가기엔 너는 실제로 그 마녀의 술법에 당한 적이 있지 않나.”
“멋대로 떠들라지. 단, 누님 귀에는 그런 헛소리가 들어가선 안 돼.”
“정보국의 수장이 너에 관한 소문을 놓칠 리가.”
“......망할.”
공화국은 내게 열과 성을 다해 충성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여자에 관한 소문만큼은 자비심이 없었다.
그것만큼 인간 본성을 자극하는 주제가 없으니 그러는 것일지도.
내가 첩만 셋을 뒀는데, 진소미가 그중 둘째인가 셋째더라는 소문도 가관이었지.
“우르술라가 그렇게 신경 쓰인다면 고백을 하지 그러냐?”
“고백은 안 돼.”
“안 될 게 있나?”
“난 불멸자잖아.”
“그래서?”
“차이면 이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는 날까지 괴로워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
정기호가 날 몇 초간 가만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왜 웃냐. 남 괴로워하는 게 그렇게 재밌냐.”
“혼자 알기 아까울 정도로 재밌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지, 쓸데없는 소문이라는 게 확실해졌으니.”
그가 널따란 지도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참모장들과 머리를 맞대 짜온 작전이다. 어떻게 다론 영지를 공략할지 고민해봤다.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우선 이곳 언덕으로 진입을...”
“작전은 됐어.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어떤 생각?”
“결투 신청을 하려고.”
정기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가 입을 벌리기 전에 선수를 쳤다.
“오데르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안 꺼낼 수가 있나? 그때 네가 오데르와 결투를 벌인 것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렸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너는 기백만 국민들의 염원을 짊어지고 있다, 라힐. 네 신상에 이상이 생긴다면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올린 모든 게 무너지고 말 거다.”
“그날 벌인 결투는 내가 경솔했던 게 맞아. 나는 이름 없는 숲에서 시시하게 죽어서는 안 돼. 설령 힘에 부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겨진 사람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겠지.”
“죽는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말란 말이다.”
“정기호, 뭐 하나 잊고 있지 않냐? 나는 대통령 나부랭이가 아니라 에사인이라고. 사람들이 내게 바라는 모습은 서류나 뒤적이며 가늘고 길게 연명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대검을 들고 악을 쳐부수는 영웅이다. 시대가 그런 영웅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기꺼이 응할 작정이다.”
정기호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이젠 너를 암살자라고 부르지 못하겠군.”
“난 널 계속 전사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지도를 움켜쥐더니 저만치 밀어버렸다.
“전령은 내가 맡도록 하지.”
여기서 전령이라 함은 민감한 사안을 알리러 적진으로 들어갈 역을 일컬음이다.
전사란 족속들이 결투를 얼마나 애중하는지는 몇 번이나 강조한 바가 있지.
에신에서 결투란 그 자체로 신성한 행위였다.
한 번의 결투에 작위와 영토가 오가는 일도 허다하다고.
그렇게 결투에 환장하는 민족이건만, 국운을 건 결투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책에서조차 읽어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거절당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우리에겐 최악의 시나리오 되시겠다.
아무리 나브니가 도와준다고 해도, 소모전을 감당할 전쟁이 아니기에.
정기호는 전령을 자처해 진영을 떠난 지 닷새 만에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내게 다짜고짜 편지 한 장을 쥐여 주었다.
“읽어봐라. 그니르가 직접 쓴 편지다.”
그는 편지를 읽어보지 않았으나, 표정으로 미루어 내용을 짐작하는 듯했다.
나는 많은 각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지의 머리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위대한 심판자 그니르가 마족의 주구...”
나는 그쯤에서 편지를 던져버렸다.
나머지 내용은 읽을 가치가 없었다. 날개를 잃은 것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빡쳤고, 잔인한 복수를 갈망하는지를 구질구질하게 써놓은 게 다였다.
내가 열받은 건 우르술라를 언급한 대목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날개를 자른 우르술라를 아주 원색적인, 양아치조차 안 할 법한 저열한 욕설로 매도했다.
“정말로 성사되었네요.”
소미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녀의 큼직한 눈망울은 나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화가 많이 난 것 같더라.”
“저는 라힐 님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르기가 힘찬 어조로 확신했다.
나도 날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간교한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는 눈 크게 뜨고 살펴야겠지.
“장소는 어디라고 합니까?”
“레게스트라 요새 앞.”
국운을 건 결투가 에신 역사에는 존재치 않는다고 했었지.
지구의 역사서엔 그런 기록이 여럿 있는 걸로 안다.
특히 요새를 앞에 두고 벌어지는 결투로 아주 유명한 사례가 있다지.
트로이.
헥토르와 아킬레스.
일리아드에 쓰인 그 결투가 정말로 벌어졌던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공화국이 마주한 운명과 그 당시 상황은 여러 면에서 흡사했다.
그니르는 이틀 후 부하들과 함께 등장했다. 그의 뒤를 따라 약 일만에 달하는 비익족 비행전단이 황혼을 가리며 벌판으로 날아들었다.
동시에 그의 참전을 기다렸다는 듯이, 요새 주둔군이 성벽이 떠나갈 듯이 환호했다. 우리도 질세라 방패와 무기를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에 본영 앞으로 나아갔다.
그니르는 이미 먼저 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보기 어렵군.”
“......곱게 죽이지 않겠다.”
놈이 기다란 랜스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사납게 말했다.
“널 창으로 꿴 뒤 내장을 모조리 빼내어 깃대에 걸어두마. 네 불멸성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살을 잘게잘게 잘라 떠돌이 짐승의 먹이로 뿌리겠다. 정화의 불이 네 하찮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때까지 타오르리라 맹세하마.”
나는 도발을 한 귀로 흘리며, 놈의 모습을 관찰했다.
휘황한 갑옷에, 두 쌍의 거대한 날개.
굳건히 버틴 허리와 기둥 같은 두 팔.
놈은 지난번에 봤을 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다론을 만났다면 뭔가 하나쯤은 내놓고 왔어야만 하지 않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너 대체 뭘 희생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