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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86화 (186/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86화

약진 (13)

“그니르를 상대로 고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인과응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겠지?”

“고전 중이라니, 그놈이 꼬리를 내뺀 게 언젠데. 네 정보원들은 일을 안 하나 보군.”

“일을 안 하는 건 네 참모장들이 아닐까. 적장 모가지 하나 따지 못한 주제에 황국 안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던지, 지켜보던 내가 식은땀이 날 정도이던걸.”

나브니는 혼자가 아니었다. 반나체의 이십 대 청년이 팔짱을 낀 채 나를 꼬나보고 있었다.

그는 아슬아슬한 천 조각으로 중요 부위만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는데, 드러난 몸매가 어찌나 완벽하던지 흡사 다비드 조각상을 세워둔 것만 같았다.

“그쪽은 네 첩인가?”

나브니가 청년을 돌아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가라.”

“폐하, 저는...”

“다시 부를 때까지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먼지를 털어내듯 귀찮다는 투였다.

청년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궁을 떠났다. 청년은 나브니에게 아주 깊게 빠져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브니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간 네 대체제가 될 만한 것들을 물색해봤어. 변변찮은 사내새끼 하나 찾기가 얼마나 힘들던지.”

“네 취향이 이상해서 그렇지.”

그 청년과 날 비교해서 나를 고를 여자는 많지 않을 거다.

그 보기 드문 취향을 가진 여자 중 하나가 바로 욕망을 관장한다는 이 변태 에사인이 되시겠다.

“내 취향에는 아무 문제가 없거든. 그보다는 여자 눈도 똑바로 못 쳐다보는 놈들이 사내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게 문제가 아닐까.”

말은 쉽다.

나브니는 욕망의 결정체였다. 그녀를 처음 보는 자들은 성별을 불문하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트럭에 치이는 듯한 충격을 받고 만다. 그녀 앞에서 입이나 뻥긋할 수 있으면 잘한 거다.

“욕망의 여제의 취향에 아무 문제가 없다니, 속보로군.”

나브니가 피식 웃었다.

“여긴 어쩐 일이니? 나와 즐기기엔 시절이 좋지 않을 텐데.”

“네 말대로 전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아서. 사라진 그니르도 신경이 쓰이고, 요새는 무너질 기미가 없고. 이 타이밍에 네가 군을 이끌고 올라와 준다면 딱일 것 같아서 말이지.”

“너 정말 낯짝이 두껍구나. 나야 원래 그런 년이라지만, 네가 먼저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는 건 좀 아니지 않니?”

“내가 이런 놈이라는 걸 몰랐나?”

“아니, 알고 있었지.”

나브니가 유쾌하게 대답했다.

“그럼 문제 될 게 없겠네.”

“맞아, 문제 될 게 전혀 없지. 국민정서에 반하는 일이고, 신성 위원회의 총론에도 어긋나고, 기껏 세운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갈지도 모른다는 것만 빼면.”

“아직도 신성 위원회 소속이냐?”

“논의 중이야. 너보다 한발 앞서 찾아온 사절이 신성 위원회 사람이거든.”

“뭐라던데?”

“나더러 왜 익스티아를 안 보내냐고 다그치더라.”

“그래서?”

“만들기 싫다고 대답했지. 표정이 아주 가관이던걸, 후후.”

나브니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익스티아를 만들지 않아서 신성 위원회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일 아닌가?”

“생각해봐, 라힐. 남 눈치나 보며 살아왔으면 내가 어떻게 욕망의 에사인이 됐겠어.”

“용케 에사인이 됐네. 남 눈치 안 보고.”

“그러게 말이야. 몸이나 팔던 계집이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니니.”

나브니가 옥좌에서 내려와 내게 다가왔다. 뾰족한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가슴이 요동을 쳤다.

또 그런 기분이 든다. 정신적인 외도를 하는 기분.

나는 속으로 우르술라의 이름을 염불처럼 외웠다.

조금 뒤에는 이름을 외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져 상상력까지 동원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이 방법이 먹혔다.

마그나크록의 피를 흥건히 뒤집어쓴 채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던 모습.

장담컨대 그때 누님의 매력을 이길 여자는 단 한 명도 존재치 않는다.

“너 다른 여자 생각하네.”

“그럴지도, 아닐지도.”

“내 감은 못 속이거든. 네가 날 앞에 두고 다른 여자를 떠올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아니?”

“마누라처럼 굴지 않아도 돼. 너하고 엮인 건 해프닝이었을 뿐이니까.”

“네가 나한테 넘어오지 않는 건 단순한 연정의 문제가 아니거든. 내 권능이, 존재 의의가 부정당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나더러 다른 여자의 껍질을 뒤집어쓰게 한 것도 네가 처음이었다니까.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분해서...”

나브니는 정말로 분한 모양인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난 그러라고 안 했다. 한 네가 잘못이지.”

“너는....... 여러모로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을 떠올리게끔 해.”

“투스라 말이냐?”

“그래.”

“참고로 난 누구와 닳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방금 그 말.”

그녀가 검지 끝으로 내 가슴팍을 쿡 찔렀다.

“그 말도 똑같네. 그가 내게 해줬던 말인데.”

“그쯤 해둬. 진짜로 불쾌해질 것 같으니까.”

“라힐, 난 널 위해 백만 군세를 일으킬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너는 정말이지 그 남자와 무섭도록 닮았거든. 그 뜨거운 열정과...”

손가락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한 여인을 향한 순정, 결코 지지 않는 시운과 날 하찮게 깔아보는 오만함까지. 그래서 나는 두려운 거야. 한때 나는 그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지. 그를 손에 넣어 조종하고 있다고 자신했지만, 이용당한 건 오히려 나였어. 그가 숙원을 이룬 날, 나는 후처조차 되지 못한 채 거리로 밀려나고 말았지.”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네 옛 애인이 아니야. 나는 널 내 사적인 영역 안에 넣고 싶지가 않다. 내가 여기 온 건 어디까지나 공화국의 수장으로서, 아이르 자치령의 수반과 대화를 나눠보기 위함이다.”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칼로 나누듯 공사구분이 될까? 너도 나와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믿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시끄럽고, 협력할지 말지부터 밝혀.”

“.......좋아.”

그녀가 또각또각 소리를 남기며 다시 옥좌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다리를 길게 꼬아 앉은 뒤 턱짓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

“네 군대를 레게스트라 요새 위쪽으로 올려. 너까지 나선다면 그 미치광이들도 더는 버티지 못할 거다.”

“그리고?”

“남부를 함께 평정한 후, 쭉 전선을 밀어서 황도를 점령한다. 혹시 로켄과 길레악이 동부에서 돌아온다면 연대해서 대항하고.”

“UA는 어쩌려고? 나와 연합하는 건 네 독단적인 결정 같은데.”

“UA는 머지않아 망한다고 본다. 그쪽에 기대를 걸어보기엔 황군이 너무 강해.”

“하긴.”

“네가 걱정해야 할 건 UA가 아니라 신성 위원회의 다른 가입국일 테지. 공화국을 공개적으로 돕고 나선다면 네 처지가 상당히 난처해질 테니.”

“괜찮아, 널 돕는 게 아니라 황국을 치는 거니까. 황국과 싸우는 걸 싫어할 나라가 어딨겠어.”

“그럼 결심한 거냐?”

“라힐, 욕망의 본질이 뭔 줄 아니?”

나브니가 대답 대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건 네가 잘 알지 않나.”

“그래도 맞춰봐.”

“글쎄다. 뭘 가지고 싶어 하는 데 이유가 있나?”

“그것도 답이 될 수 있겠네.”

나브니가 생글 웃었다.

아름답다,

눈을 떼놓기 힘들 만큼.

“욕망의 본질은 결핍이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에는 금방 시들시들해버리지. 네가 날 차버린 후로, 나는 네게 강한 결핍을 느끼고 있어. 이 결핍은 나날이 커져서 날 안에서 잡아먹고 있어. 나는 네가 언제까지나 내 결핍을 자극할 남자였으면 좋겠어.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말해두는데...”

“알아, 내 애인이 아니라고?”

그녀가 킥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알겠으니 그만 가 봐. 나는 시원찮은 것들이랑 마저 놀아봐야겠으니.”

회담이 끝난 후 나는 지체하지 않고 공화국으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오려고 했다.

나브니의 궁을 떠나자마자, 턱수염을 무성하게 기른 서른 중반의 사내가 날 찾아왔다.

그는 하와이안 셔츠를 거의 배꼽까지 풀어헤쳤는데, 드러난 상체엔 털과 함께 지저분한 문신이 가득했다.

그는 다짜고짜 나와 차 사이를 가로막으며 험상궂은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당신이 라힐이오?”

“...뭐라고?”

반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에신어이긴 에신어인데, 라틴계 특유의 굴리는 발음이 잔뜩 들어가 말귀를 알아듣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당신이 라힐이냐고.”

“그러는 넌 누구냐.”

“알렉스라고 부르쇼.”

“알렉스, 내겐 무슨 용무냐.”

그는 대답 대신 얼굴을 더욱 가까이 들이댔다.

“.......듣던 대로 반반한 상판이구만. 알레한드로 형제에게 당신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알레한드로.

엘 드라고 카르텔에서 파견한 약쟁이였던가.

힘을 포기하는 게 에사인이 되는 길이라는 조언을 해준 기억이 난다.

“엘 드라고에서 왔나?”

“그렇소. 당신이 그 계집한테 바람을 넣었다지? 익스티아를 포기하라고? 얼마나 훈훈한 소식이던지, 우리 보스께서 당신을 보면 안부를 꼭 전해주라고 신신당부하셨소. 아참, 알레한드로 형제 소식도 전해드리지. 그 친구를 참 따뜻하게 대접해주셨더군. 잊지 말아야 할 조언과 함께 말이오. 덕분에 멕시코만의 상어 떼가 포식할 수 있었소.”

나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놈은 지금 날 대금 밀린 약쟁이 대하듯 겁박하고 있었다.

아무리 우리가 엘 드라고와 직접 부딪혀본 적이 없다지만, 간뎅이가 부어도 너무 부은 게 아닌가.

“...다르마알과 손을 잡았다고 뵈는 게 없나 보군.”

“어디 다르마알 뿐이겠소.”

“내가 네 목을 치지 않을 이유를 한 가지만 대봐라, 알렉스.”

나는 미소와 함께, 살기를 살짝 내비치며 말했다. 그의 대답이 변변찮으면 이 자리에서 피를 볼 생각이었다.

그는 그제야 안색이 변하며, 두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지, 진정하시오. 나는 그저 우리 보스의 말만 전했을 뿐이오.”

“그렇다면 네 보스에게 가서 전해라, 에신이나 한국에 발을 붙이는 날엔 크록들이 포식하게 될 거라고 말이야.”

나는 사색이 된 그를 지나쳐 차에 탔다.

크록들에게 인육을 먹지 말라는 금령을 내리긴 했다.

하지만 전생자 협박용으로는 크록이 사람을 먹는다는 속설이 여전히 효과적이었다.

나브니의 궁을 떠나 전선으로 복귀하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진지는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포위망은 여전히 견고했고, 저들은 움직일 기미가 없어 보였다.

눈에 띄는 건 비익족의 움직임이었다. 수많은 비익족 정찰병들이 깃털을 휘날리며 지휘막사로 모여들고 있었다. 정찰병의 움직임이 이만큼 소란스럽다는 건 뭔가 중차대한 일이 벌어졌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고작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터질 수 있을까?

설마 동부전선이 평정되었다던가, 핵이 추가로 떨어졌다는 소식일까?

나는 궁금증을 가득 안은 채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 문을 열자마자 이네스가 날 맞이해주었다.

“라힐, 마침 잘 왔어.”

“무슨 일 있었냐?”

“자, 여기 첩보.”

그녀가 짐승의 가죽 위에 새긴 지도를 내밀었다. 지도 위에 무어라 쓰여있긴 한데, 얼마나 급하게 휘갈겼는지 글자를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이게 다 뭐냐?”

“은신처.”

이네스가 짧게 덧붙였다.

“드디어 그니르가 숨어있는 위치가 밝혀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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