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85화 (185/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85화

약진 (12)

“네가 없어도 여긴 잘 돌아가고 있어.”

“......역시 라힐 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마력을 잃는 순간 저는 쓸모를 다했다는 거, 이해는 하지만 매번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네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 아르세니오. 네가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라, 견습 기간도 끝나지 않은 마법사에게 손을 벌릴 만큼 우리 상황이 급하지가 않아. 네가 교육을 다 마친다면 그때는 싫어도 여기저기 끌고 다녀주도록 하마.”

“교육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늦어요. 그땐 황국이 사라져있거나, 공화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 거니?”

“전 제가 광기의 아르세니오라고 불린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

나는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로켄은 아르세니오의 몸을 빌려 온갖 입에 담지도 못할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르세니오 본인은 모를 거라고 여겼었다.

“저는 발을 마음껏 뻗을 수조차 없을 만큼 비좁은 둥지에서 태어났죠. 저는 죽을 때까지 제가 그 더럽고 퀴퀴한 둥지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여겼어요. 그러던 어느 날, 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찬란한 빛을 내뿜는 남자가 꿈에 나타났어요. 남자는 자기를 황제라고 소개했죠.”

그날의 감정을 되새기는 듯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저는 그날부터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었어요. 상상이 되시나요? 한 추레한 비익족 꼬마아이의 인생이 백팔십도로 뒤바뀐 모습이? 저를 괴롭고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얼마나 하찮아졌는지? 저는요, 황제폐하를 위해서라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고 여겼어요.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위병들이 뒤에서 손가락질을 해도, 눈을 닫고 귀를 막으면 괜찮을 거라 끊임없이 저 자신에게 속삭였어요.”

“네 잘못이 아니야. 로켄이 개새끼지.”

“로켄 님은 제게 아무런 강요도 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비겁자가 된 건 저 스스로 선택한 결과죠.”

아르세니오가 슬픈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최근 볼 때마다 죽상이었던 이유가 이거였네.

넘쳐나던 마력을 하루아침에 잃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싶었건만, 이런 속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그래, 네 기분은 잘 알겠다. 분명 더러운 기분이겠지. 꿈의 지배자라는 놈이 네 정신에 기생하는 기생충이었을 줄은 몰랐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전쟁에 목숨을 바칠 이유는 되지 않아.”

“저는 저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께 속죄해야만 해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지만 저는...”

“진짜 속죄를 하고 싶다면 절대 쉽게 죽어주지 마라. 미안한 마음을 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득바득 살아남으라고.”

아르세니오는 입을 다물었지만,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너 혹시 내가 전생자라는 거, 알고 있냐?”

“당연히요.”

“지구에서는 주술사가 본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도?”

“하지만.......라힐 님은 지구에서도 주술로 활약하지 않으셨나요?”

“지금은 포탈이 뚫려서 그런 문제가 없지만, 예전엔 힘을 전혀 못 썼어. 나도 마력을 잃은 설움을 겪어봤다고. 황제의 전사들과 당당히 맞장 뜨던 놈이 이생에서는 웬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삿대질 받아가며, 조인트 까여가며.......어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접싯물에 코 박아 죽고 말겠다.”

“하하.”

아르세니오가 작게 웃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갔다.

“돌이켜보면 나도 참 비겁했네. 당시 내가 했어야만 하는 말이 정말 많았거든. 하지만 그랬다간 직장에서 잘릴 게 빤하잖아? 먹고살기 위해, 가느다란 삶을 연명하기 위해, 눈먼 봉사에 벙어리 흉내를 낼 수밖에 없었지. 다 그런 거라고, 누구나 가슴 속에 저마다의 비겁함을 안고 살아가는 거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지킬 본능 같은 거랄까.”

“덕분에 머릿속이 맑아지네요.”

“그래?”

“저는 더 이상 저 자신을 지키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더 비겁해지고 싶지 않은 거였어요.”

“너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코로 들었냐?”

아르세니오가 다시금 웃었다.

분명 표정은 훨씬 밝아졌다. 그러나 고집은 전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죄송해요, 라힐 님. 그래도 이건 제가 정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나도 웬만하면 네 말을 들어주고 싶은데, 내가 네 일에 제삼자가 아니라서 그런다. 이미 너는 많은 사람들과 인연으로 얽혀있어.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황자님이요?”

“황자도 포함이지.”

우르는 아르세니오를 끔찍이도 아꼈다. 아르세니오가 싸우다가 꽁지깃 하나라도 잃어버린다면 그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혹시 삼상회의 귀족들이 관상용으로 비익족 소년을 곁에 두곤 한다는 거 아시나요?”

“야, 걔는 달라. 걔는 널 진심으로 걱정한다니까.”

나는 자신이 없어 말끝을 흐렸다. 우르가 왜 아르세니오에게 집착하는지, 그를 구원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맞아요, 이황자님은 특별한 분이시죠. 여느 귀족들과는 다르게 격의 없이 절 대해주신 게 참 좋았어요.”

“널 절대 전장에 데려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도 그놈이다. 네가 여기 나타났으니 그 청탁은 망해버렸지만.”

“저도 부탁 하나 드릴게요.”

“또 뭐?”

“이황자님이 절대 황제를 만나지 못하도록 해주세요.”

“.......그건 대체 왜?”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황제를 만나게 해달라는 게 우르의 부탁이었다.

못 들어줄 부탁은 아니다 싶었다. 그는 가면을 쓴 채 평생 아버지의 그림자에 억눌려 살아왔다.

쌓아둔 말이 한두 마디가 아닐 터.

“이유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러면 나도 들어줄 수가 없지.”

“대신 라힐 님께 도움이 될 다른 이야기를 말씀드릴게요. 이 이야기는 라힐 님이 저를 막지 않으셔야 할 이유이기도 해요.”

“들어보마.”

“오면서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대강 들었어요. 높다란 요새에 발목이 잡혔고, 그니르는 도망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

누군지 몰라도 요점만 잘 전달했네.

요새보다 그니르가 도망쳤다는 사실이 더 뼈가 아프다.

놈은 내가 자신의 영혼을 흡수할 걸 염려했는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몸을 숨기는 중이었다.

“요새는 곧 무너진다.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했으니까. 그니르는 뭐, 제깟 놈이 도망가봤자지. 우리가 남부 전역을 점령하면 알아서 기어 나올 거다.”

“로켄 님을 드릴게요.”

“...뭐라고?”

“로켄 님을 드릴게요.”

아르세니오가 한 어절씩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나는 청력에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듭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로켄을 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한때 로켄 님은 제 몸을 그릇으로 삼아 많은 악행을 저지르셨죠. 그분께서는 저를 버렸다고 여기실 테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아직도 그분과 제 영혼 사이에는 아주 희미한, 그분께서는 신경도 쓰지 않을 만큼 사소한 한 가닥의 끈이 이어지고 있어요.”

“그렇다는 말은.......”

“네.”

아르세니오의 미소가 짙어졌다.

“저는 로켄 님의 정신세계 좌표를 알아요.”

충격적인 폭로였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내가 울토르의 힘을 흡수할 수 있었던 건 하나의 중국의 정신세계 좌표를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요행이 없었더라면 공화국 설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로켄 님은 매사 아주 완벽한 분이시죠. 그분이 실수하는 걸 보느니 해가 거꾸로 뜨는 걸 보는 게 빠를지도 몰라요. 생각해보세요, 누가 감히 위대한 에사인, 꿈의 지배자의 정신세계로 들어가서 존재를 건 싸움을 벌일 수 있겠어요?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테니, 실수도 실수가 아니게 되는 거죠.”

“그럼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라힐 님을 로켄 님의 정신세계로 보내드리는 거죠. 물론 라힐 님께서 그러실 의향이 있을 경우에만요. 아, 이건 미리 말씀드릴게요. 아쉽지만 저는 이황자님처럼 뛰어난 마법사가 못 돼요. 제 전력을 다해도 라힐 님 한 명을 보내드리는 게 고작이겠죠.”

“다른 마법사에게 좌표를 넘겨줄 수는 없나?”

“그것도 불가능해요. 과거의 저였다면 실존하지 않는 좌표도 얼마든지 구체화할 수 있었겠지만.”

아르세니오가 단호히 부정했다.

나는 그의 말이 전부 진실은 아니라는 걸 감지했다.

하지만 중요한 지점은 모두 진실이었다. 그가 로켄의 좌표를 알고 있으며,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것.

“골치가 아파지는데.”

에사인이 되고 난 직후였지?

다른 사람의 정신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미친 짓은 다시는 안 하겠다고 맹세했던 게.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저는 어디 안 가니까.”

아르세니오는 군에 합류하겠다는 걸 은연중에 선언했다.

그러나 더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어지간하면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 로켄의 좌표는 그냥 놓아주기에는 너무 큰 떡밥이었다.

나는 그날 새벽 숙영지를 떠나 나브니의 영토로 향했다.

나브니가 세운 욕망의 왕국의 정식 명칭은 ‘아이르 자치령’이라고 했다. 그 옛날 엘리시아가 언급했던, 황국과 전쟁을 벌인다던 나라들 중 하나였다.

자치령으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분명 아르세니오가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는 했지.

그러나 로켄은 에사인 중의 에사인, 그엔사인이 틀림없다.

놈이 보유한 마력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레벨일 터.

게다가 놈의 이명은 꿈의 지배자다. 정신계는 그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아르세니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날 담그려는 함정일 거라 의심했겠지.

그 정도로 험난한 싸움이 예상되었다.

아이르 자치령은 공화국보다 인프라가 훨씬 잘 정비되어 있었다. 국경의 경비초소를 통과한 후, 나는 그들이 내온 차를 타고 수도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동하는 동안 안내역을 맡은 목생족 전사들의 시선이 띠껍기 그지없었다.

전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민간인들도 만나는 족족 날 잡아먹을 듯이 증오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수십만 군대를 불로 태워버린 게 불과 반년 전의 일이다. 나브니에게는 별것 아닐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자기 동료와 이웃의 일일 테니.

하지만 어쩌겠어?

죽는 게 싫을 것 같으면 남의 땅을 넘보지 말았어야지.

나브니는 나를 알현실에 한 시간이 넘도록 방치해두었다.

시종 말로는 선객이 있다고 한다.

무거운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의 다른 가맹국이 사절을 보내온 모양이었다.

“여제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시종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

나는 그녀의 호칭이 언제부터 여제였는가 하는 사소한 의문을 품은 채 궁 안채로 들어섰다.

아이르 자치령의 궁은 욕망의 지배자라는 호칭에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어떤 금은보화도 나브니 본인보다 화려하지는 못했다.

나브니는 황금의 옥좌에 앉은 채 나를 맞아주었다.

“왔구나, 라힐.”

그녀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녀가 심어준 기나긴 환상은 아직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

나는 그녀 앞에 두 다리로 버티어 서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을 일이지만, 그녀가 심어준 환상은 그녀 자신에게조차 영향을 미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