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84화
약진 (11)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크록 장군들은 그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은 표정이다만, 지구 출신 장교들은 표정이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정기호나 나처럼 두 세계에 한 발씩 걸친 입장에서는 요지경도 이런 요지경이 없다.
“포탈이 공격적인 용도로도 이용될 수 있다는 걸 잊었군.”
“왜, 포탈로 마약도 파는데 괴물이라고 다니지 말란 법이 없지.”
“이러면 우리도 한국이 공격받을 상황을 대비해야지 않나.”
“그렇...... 겠다만, 군대를 뺄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니까 자문 정도로만 생각해두자고.”
“영국은 어떻게 될까요?”
소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작년에 콘서트 일정 때문에 영국에 오래 머물렀거든요. 좋으신 분들이 도움 많이 주셨는데.”
“망하진 않을 거야. 저래 봬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대국이니까. 다만 인간보다 몇십 배나 강한 괴물들이 나라 곳곳에 퍼진 걸 다 솎아내려면 고생깨나 하지 않을까.”
“그들 중 일부는 지구 생태계에 적응해 인류와 공존하게 될 가능성도 있어.”
이네스가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중국은 에신의 생물자원에 대해 연구 중이었어. 에신의 동식물은 지구보다 훨씬 생명력이 강해서, 만약 어떤 경로로든 지구로 종자가 넘어오게 된다면 감당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거라고 하더라.”
“생물자원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우리부터 걱정해보자고. 당장 우리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으니까. 나는 UA가 그래도 여름까지는 버틸 줄 알았다.”
“네게 전술핵 사용 동의를 구했을 때 UA는 이미 자신들의 패배를 예감하고 있었을 거야. 핵무기란 점령할 땅에 쓰는 무기는 아니잖아?”
“이대로라면 우리의 패배도 예감이 되는군.”
드디어 우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는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에 개의치 않으며 발언을 이어갔다.
“외교부장관으로서 제의하지. 우리에겐 UA보다 더 나은 파트너가 필요하다. 단독으로도 황국과 맞먹을 만큼 다수의 에사인과 병력을 거느린 나라가.”
“그런 나라가 존재하긴 하나?”
“있다, 신성 이제니오스 위원회라고.”
“.......농담이 지나쳐, 우르.”
“내가 농담에 소질이 없다는 걸 알 텐데.”
우르가 딱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두 가지다. 혼돈과 손을 잡아 구태의 질서를 치느냐, 구태와 손을 잡아 혼돈을 무찌르느냐. 우리의 힘만으로 둘 모두를 거꾸러뜨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세상일이란 우리 편할 대로만 흘러가진 않더군. 느리게 보여도 한 걸음씩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본다.”
“혼돈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게 세상을 진일보시키는 길이라고 자신하냐.”
“자신한다, 최소한 우리가 지진 않았으니.”
“그놈들이 우리하고 손을 잡아주긴 하고?”
“그건 전적으로 네게 달린 문제다, 라힐. 나브니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다.”
“......환장하겠군.”
그 불여시 같은 여자하고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골이 아파진다.
그러나 우르의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이 타이밍에 신성 이제니오스 위원회가 치고 올라와준다면 정말로 큰 도움이 될 터.
압도했다고 여겨진 앞선 전투에서조차 병력을 5천이나 잃었다.
황국에겐 한 줌밖에 되지 않을 병력이겠으나, 우리에겐 5천도 치명타였다.
800여 흑철 전사단의 손실이 특히 뼈아프다. 그들은 마그나크록과 신성 이제니오스 위원회와의 전쟁에도 참여한 베테랑들이었다.
크록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면 그만 아니냐고?
크록들도 사람이랑 똑같다,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제 몫을 하지 못한다.
경험이 쌓일수록 더 유능해지는 건 당연하겠고.
“질서의 수호자로서 네 평판이 우려된다면, 외부에 공표하지 않고 물밑으로 접촉하면 된다. 사람들이 꼭 진실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째 이런 일에 익숙해 보이는걸.”
“실제로 익숙하다. 삼상회의 수장으로서 매일같이 해왔던 게 그런 일들이지. 오늘의 동지를 배신하고, 어제의 적과 손을 잡는.”
“자랑은 아닌 거 아시죠?”
소미가 타박하듯 물었다. 우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자랑하지 않지만, 부끄러워하지도 않아.”
“공화국에는 혼돈과 싸우다가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분들이 많이 계세요. 그런 분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신념을 굽혀서는 안 돼요.”
“굽히자는 게 아니라 유보하자는 의미다. 먼저 황국을 쓰러뜨리고, 그다음에 혼돈을 상대하면 되지 않나.”
“아까 세상일이란 뜻대로만 흘러가진 않는다고 말씀하셨죠. 그들과 손을 잡은 것 때문에 지금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세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이쯤에서 정리를 하지.”
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우선 확실하게 선을 긋자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르마알과는 손을 잡지 않아. 그놈은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이니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하지만 나브니라면 대화를 해볼 수는 있어. 그 여자는 내가 자기 군대를 불태워버린 걸 전혀 개의치 않아 하거든.”
“...진심이에요?”
“놀랍게도.”
내가 측근들에게조차 차마 들려주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브니의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며 무얼 보고 겪었는지.
15년이란 결코 적지 않은 기간이었다. 나브니는 그 긴 세월 동안 내 정신을 붙들어두기 위해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였다.
그녀의 노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이버 불륜’쯤 되시겠다.
그녀 덕분에 누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게 됐거든.
나는 정말이지 그녀와 볼 장 다 봤고, 때문에 우리가 서로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하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한다.
“다른 이야기도 해보지. 그니르는 지금 뭘 하고 있나?”
“현재 에던령 외곽을 따라 30만 군대가 집결해있습니다만, 적 에사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날개를 잘린 게 어지간히 충격인가보군.”
“지금 앞에 나서면 잃는 게 더 많을 거다. 그 대단하다는 심판자가 어떤 몰골이 되었는지 모든 이가 알게 될 테니.”
“그러면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로켄과 길레악이 합류하기 전에 남부전선을 정리한다.”
탕.
나는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움직이자고, 제군들. 갈 길이 머니.”
우리는 에던령을 접수하기 위해 두 차례의 전투를 더 치렀다. 잘라낸 그니르의 날개를 높이 들고.
그니르의 날개는 그야말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적의 다수는 그니르에게 맹목적인 신앙을 바치는 광신도들이었다. 그들은 주인의 성체를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해를 하는 자, 무릎을 꿇은 채 울면서 기도를 올리는 자, 전의를 상실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자.
무기를 들 필요조차 없었다. 우리는 어린아이 손목을 비틀듯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다.
그니르는 자기 부하들이 갈피를 잃고 패주하는 동안에도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기세를 몰아 방위도시 레게스트라까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사이 UA는 발악을 하듯 핵무기를 십여 발이나 더 쐈고, 미처 요격준비를 갖추지 못한 외곽도시 서너 군데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황군은 북부전선을 완전히 정리한 후 동쪽에 모든 역량을 집결시켰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로켄과 길레악, 오림, 그리고 황국에 협조하는 군소 에사인 서너 명이 뉴 텍사스의 대통령과 장관들을 상대로 애를 먹고 있다고 들었다.
영국은 속령 모리스탄의 멸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동시에 유럽연합은 괴물천지가 된 영국으로 이어지는 모든 교통길을 끊어버렸다.
사실상 영국은 EU에서 내놓은 자식이 된 셈이다.
이 모든 게 봄이 지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네스.”
나는 까마득히 위로 솟은 검은 성벽을 바라보며 이네스를 불렀다.
“좋은 아이디어 있냐?”
우리는 레게스트라의 높다란 성벽 앞에서 일주일째 발이 묶여 있었다.
일주일 동안 우리는 감히 공성을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
레게스트라는 황국이 작정하고 만든 방위도시였다. 레게스트라의 진정한 무서움은 성벽의 높이가 아니라, 십만에 달하는 주민들이 전원 길레악을 추종하는 영능력자라는 점이었다.
그들의 일치단결된 의지는 도시 전체에 반구형의 역장을 치는 수준에 이르렀다.
저 안으로 병사들을 밀어 넣었다간 동영상에서 보았던 집단 광기의 현장이 재현되고 말겠지.
“글쎄, 길레악의 주술은 내 데이터에도 없을 만큼 오래된 것들이야.”
“그래도 뭐든 좋으니 아이디어를 내다오. 정신계 마법을 너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다.”
이네스가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 손길이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자아가 분열될 수도 있는 숱한 위기를 딛고 마침내 이네스라는 여성의 정체성에 안착했다.
“정신계 마법을 떼놓고 조언하는 건 가능해.”
“경청하도록 하마.”
“아무리 경지가 높은 주술사라고 할지어도 에사인이 아닌 이상은 먹어야 살거든. 저런 대단위 술법을 유지하는 건 체력적으로도 굉장히 힘든 일이고. 보급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계속 유지한다면 지쳐서 항복하지 않을까 싶어.”
“그렇군. 공군으로 요새를 우회해서 보급로를 끊으면 되겠네.”
“맞아. 가뜩이나 요새도시는 그니르의 잔당까지 받아들여서 입이 한둘이 아니잖아.”
“역시 너뿐이다, 이네스.”
순간 그녀의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그녀는 이네스란 이름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표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도 그걸 아니까 자주 표현해주려고 한다.
리액션이 질리지가 않거든.
이리하여 기약 없는 포위공격이 시작되었다. 병사들은 길어지는 원정에도 불구하고 사기가 드높았다. 레게스트라만 함락시키면 황도까지는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였다.
그니르가 다시 나타나거나, 동부전선의 상황이 급변하지 않는 이상 당분간 이러한 정체상태가 계속되리라 봤다.
마침내 나브니를 만나러 갈 틈이 생긴 것이다.
그날 밤, 홀로 행장을 꾸릴 때였다. 막사에 난데없이 불청객이 난입했다.
근위전사들이 그를 제지하지 못한 걸 탓할 수 없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그는 텅 빈 허공에서 유령처럼 솟아났다.
나는 이미 수상한 마력이 일렁이는 걸 감지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의 정체를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불청객은 두 뺨에 불그스름한 홍조를 띤, 하얗고 보드라운 깃털 날개를 가진 앳된 소년이었다.
“...아르세니오.”
나는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라힐 님.”
소년이 천연덕스레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그에게 되물었다.
“네가 어떻게........넌 분명 소집되지 않았을 텐데?”
“맞아요, 절 부르지 않으셨죠.”
“우르도 알고 있나? 네가 여기 왔다는 걸?”
“아무도 몰라요. 절 본 것도 라힐 님이 처음이에요.”
“넌 여기 있어선 안 돼.”
- 나는 아르세니오의 존재가, 그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더럽혀진 내게도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삼았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황자의 말이 벼락처럼 뇌리를 스쳤다.
“알아요, 하지만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