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83화
약진 (10)
아르덴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입을 닫아버렸다.
아무래도 그는 전쟁 외적인 문제로 충분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내게 의뢰를 하던 당시만 해도 아내에 대한 호칭이 요물까지는 아니었으니.
“고개를 들어라, 아르덴. 내가 원하는 건 네 목숨이 아니야.”
“그럼 뭘 원하시오?”
“티에말령.”
그의 눈빛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
“가지시오.”
“...을 소유한 네 충성을 원한다. 당대에 한해 네 작위를 인정해줄 테니, 책임지고 영지를 안정화시켜라.”
“당신은....... 듣던 것보다 훨씬 관대하군.”
“그니르의 떨거지에게 들은 이야기라면 맞는 소리가 하나도 없을 거다.”
“자비를 베풀어준다면 나야 좋겠지만, 그렇게 물러서는 결코 그니르를 이기지 못할 거요.”
“어째서냐?”
“그는 오늘 전투에서 나온 전사자보다 몇 배나 많은 수의 영민을 불태워 죽였소. 나는 살날이 창창한 어린아이가 눈빛이 불순하다는 이유만으로 사제관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았소. 그가 하늘을 날 때 엎드려 경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태워진 이도 셀 수가 없소. 그는 우리를 공포로써 지배하오. 지금이야 그가 물러갔으니 우리가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여도, 진정으로 충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나도 너희에게 충심까진 바라지 않아. 내 뒤를 찌르지 않을 정도면 충분하지.”
“어떻게 장담하시겠소? 내가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아르덴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는 무서울 게 없는 사람 같았다.
나서서 죽여 달라는 사람이 무서울 게 뭐가 있겠냐만.
“저거.”
나는 엄지로 막사 뒤편을 가리켰다. 흰 장깃이 수더분하게 달린 날개가 기둥에 매여 있었다.
“저게 네 공포의 근원 아니냐?”
“저건 설마....... 그니르의 날개요?”
“그렇다.”
“대체 저걸 어떻게........”
“어떻게 여섯 번째 권능의 날개가 여기에 걸려있냐고? 네가 물어야 할 건 그게 아니겠지. 명색이 황국의 기둥이라는 놈이 날개를 두고 어딜 도망갔냐고 물어야지, 안 그래?”
나는 깍지를 끼며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당신이 그를 상대한 것이오?”
“아쉽게도 그놈 날개를 도려낸 건 내가 아니야. 가능하기만 했다면 그 재수 없는 목을 직접 따주려고 했는데, 날 피해 도망 다니다가 후방에서 부하에게 칼침을 맞았다는군.”
근위전사들이 쉭쉭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도 비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놈이 날개를 떼고 꽁무니를 내뺀 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거다. 나는 놈이 발뺌하지 못하도록 아예 역사책에 박제를 해둘 생각이었다.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기 힘들군. 여섯 번째 권능의 날개가 장대에 걸릴 날이 올 줄은.”
“더 살아보라고. 앞으로도 신기한 거 많이 보게 될 테니.”
“더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멋진 걸 보여준 것에 대한 보답은 하는 게 도리일 것 같소.”
나는 근위전사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그들은 즉시 아르덴의 손을 묶은 포승을 풀어주었다.
티에말령은 공화국보다 몇 배나 넓은 영지다. 인구가 훨씬 많은 건 당연하겠고.
당면한 전쟁만 해도 감당이 안 될 지경인데, 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그 넓은 점령지까지 관리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영주들을 복속시켜야만 한다. 이졸데나 아르덴 같은 대영주급 인물들이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그보다 더 좋은 상황이 없지.
내게 유리한 정황이 하나 더 있다면, 우르술라의 전투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거.
돌이켜보면 그녀는 나와 만나기도 전에 일곱 번째 권능을 암살했다.
지금은 막연하게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거니 싶었는데, 설마 그니르의 날개를 떼올 줄이야.
선전한 건 우르술라뿐만이 아니었다.
흑철 전사단도 엄청난 활약을 해주었다. 근위전사들은 심지어 동수의 거인을 격파하기도 했다.
그들의 분투는 전쟁이란 어차피 에사인끼리의 대결이 아닌가 싶던 내 선입견을 근본부터 뒤흔들어놓았다.
만약 황제의 근위전사단이 소문대로의 실력이라면, 혼자 그들 전부를 상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니르의 날개를 장대에 걸고 티에말령으로 진주했다. 50만에 달하던 영지군은 거품처럼 녹아 사라졌고, 그니르의 본대는 하염없이 뒤로 물러나 에던령에 진을 쳤다.
에던령을 넘어 두 개 영지만 더 지나면 황도와 이어지는 길목을 지키는 방위도시 레게스트라에 닿게 된다.
개인적으로 레게스트라는 두 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곳의 거주민은 전원이 길레악의 성도였다.
그들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듯 남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적막한 거리와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던 거주민들의 눈동자는 다시 생각해봐도 소름이 끼친다.
황국에는 레게스트라처럼 에사인이 직접 통치하는 자치령이 몇 군데 존재했다. 자치령은 까마득히 먼 옛날, 황제가 여러 에사인의 충성맹세를 받아내며 그들에게 하사한 봉토가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우리는 그니르와 결판을 내기 위해 군대를 다시 정비했다. 전사자의 장례를 지내고, 병력을 충원하고, 정찰부대를 전선 너머로 파견했다.
그러던 와중 본진으로부터 급보가 날아왔다.
“핵이 투하되었습니다.”
전령의 짤막한 한마디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UA 공관에서 보내온 영상입니다만,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착탄하는 장면까지는 촬영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령은 나무를 대충 잘라 만든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동영상을 재생했다.
영상은 착탄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시점을 담고 있었다.
평탄화된 시가지와 외곽으로 번져가는 거대한 불길이 보였다.
화면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이유는 방사능 낙진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UA는 2월 13일 오후 2시를 기해 요새도시인 말렉에 원자폭탄 한 발을 투하했습니다. UA는 공습에 앞서 불필요한 민간인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주민을 소개시킬 것을 황국 측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UA는 폭탄 투하 후 황국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기시감이 드네.
사전 경고단계에서부터 항복 요구까지, 모든 게 2차 대전의 재탕이잖아.
“정말 이게 최선일까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전쟁을 끝낼 수 없는 걸까요?”
소미가 넋두리를 하듯 힘없이 물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내가 우려하는 건 이렇게까지 해도 전쟁이 안 끝나는 경우다.”
정기호가 요점을 짚었다. 나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상대는 뒤틀린 고대의 신이다. 고작 도시 하나 날아간 정도로는 감흥조차 주지 못할걸.
“그래서 어떻게 됐나? 항복 요구를 한 이후로는 진전이 없었나?”
“아닙니다.”
장교가 다른 영상을 틀었다. 첫 번째 영상과 별반 차이가 없는 화면이었다.
“라딘 시, 도렘 시, 마이든 시에도 차례로 원폭이 떨어졌습니다. 네 개의 도시는 완전히 전소되었고, 추정 사망자는 약 팔십만이 넘습니다.”
“끔찍하네요.”
“정말 대단한 무기로군요.”
한숨을 쉰 건 진소미, 감탄한 건 엘리시아였다.
“말렉, 라딘, 도렘, 마이든 모두 동부전선의 거점이 되는 요새도시다. 저곳들이 무너졌다면 동부전선이 와해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우리가 목숨 걸고 싸워 물리친 적이 고작 십만인데, UA는 폭탄 네 발로 팔십만 군대를 지워버렸군.”
“이러면 우리도 서둘러야겠다. 계속 그니르에게 발목이 잡혀있다가는 대륙을 셋으로 나누겠다는 계획에도 차질이 온다.”
“우르, 네 생각은 어때?”
우르는 지금껏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유일한 장군이었다. 그는 혼자 세상 고민 다 떠안은 표정으로 모니터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나 말인가?”
“그래.”
“유보하겠다. 영상을 다 본 후로.”
그가 전령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폭탄 이야기는 그쯤 해두고,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지.”
“알겠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박살이 난 거주지가 보였는데, 누가 봐도 현대적인 기술로 만들어진 도시였다.
원폭의 작품이 아닌 건 분명했다. 도시는 뭉개버렸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거칠게 훼손되어 있었다.
“황국의 반격이로군.”
“그렇습니다.”
전령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국은 UA의 거듭된 항복권고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UA는 레마 시를 향해 다섯 번째 원폭을 투하했으나, 공간마법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습니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미사일도 마법에 차단되었습니다. 동부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 길레악과 로켄이 이끄는 군대가 모리스탄을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모리스탄 총독 월터 스콧은 붙잡혀 말뚝형에 처해졌습니다.”
월터 스콧은 에사인으로 향하는 여정의 종막에 도달한 강자였다. 그러나 길레악과 로켄, 그니르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엔사인’ 두 명이 전력을 다해 밀어붙이는 데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겠지.
“이건 저희 정보국이 촬영한 영상입니다. 영혹의 들판에서 벌어진 양군의 회전을 담았습니다.”
수십만의 군대가 대치하는 장면.
그것만으로는 특별할 게 없었다.
전사들이 갑자기 미쳐서 서로를 찌르기 전까지는.
저 많은 인간들이 동시에 눈이 확 돌아가 동료의 배를 쑤시고, 목을 따고, 죽일 게 남아나지 않을 때엔 자해도 서슴지 않았다.
그야말로 한 폭의 지옥도였다.
게다가 이 광기는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황군조차도 미쳐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다.
“......심각한데.”
영상은 오랜 암살자 생활로 험한 꼴 다 보아온 나조차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왜 길레악이 최강의 에사인인지 알겠네요.”
소미가 말했다.
“길레악은 마음을 지배하는 권능을 지녔어요. 저런 류의 힘을 상대할 때는 군대가 아무리 많아봤자 소용이 없겠어요.”
“이네스, 네 생각은 어때? 우리가 저런 대단위 정신계 마법을 방어할 수 있을까?”
“불가능해.”
이네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너여도 말이지.”
“그래, 설령 군체의식이 지녔던 힘이 내게 온존했더라도. 그만큼 말이 안 되는 힘이야, 저건. 아무래도 그니르가 말한 그엔사인이란 개념은 실재하는 것 같아. 다른 에사인의 마력을 흡수해서 한도 끝도 없이 강해진, 특이점을 넘은 존재를 일컫는 거겠지.”
역시 그니르를 놓쳐선 안 됐다.
그의 마력을 얻지 못하면 게임이 안 될 판이다.
하지만 그토록 교활한데다 날개까지 달린 놈을 무슨 수로 잡을 수 있을지가 막막하다.
“다음 영상입니다.”
“영상이 또 있다고?”
“마지막입니다, 이건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보내온 자료입니다.”
전령이 마지막 영상을 재생했다.
약 삼 분 길이의 짤막한 영상이 끝날 동안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모든 장면 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이었다.
뒤집어진 채 공회전을 하는 자동차.
바닥에 쓰러진 채 피를 흘리는 군인과 검붉은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장갑차.
영상은 황폐화된 현대 지구의 시가지를 보여주었다.
하늘에는 익룡이 날아다니고, 아스팔트 위로는 집채만 한 절지류 괴물이 활보하고 있다.
말라붙이도 보였다.
이쪽은 즈라즈와 달리 지성이 없는, 진짜 곤충이다.
“황국은 모리스탄을 멸망시킨 후, 보복조치로 영국과 북부 삼림을 잇는 포탈을 열었습니다. 현재 런던을 비롯하여 영국 남부 전체가 통신이 두절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