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82화
약진 (9)
나는 벙 쪄서 되물었다.
“엘리시아 님께서 지휘를 맡으셨습니다.”
그녀가 자긍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듣자 하니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각성한 엘리시아는 단지 외모만 달라진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엘리시아가 강해졌다고 해도 그니르를 막아설 정도는 아닐 텐데.
이후로도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하나같이 놀라운 이야기들뿐이었다.
특히 막시무스는 100인의 근위전사들을 이끌고 그야말로 전설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단 한 명의 인원 손실도 없이 거인병단을 제압했다.
거인이 한 명씩 쓰러질 때마다 천지가 요동을 쳤다고 한다.
비명소리는 어찌나 큰지 평원에서 메아리가 칠 정도였다고.
악귀처럼 눈앞의 적들을 쳐죽이느라 바빠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좌익에서는 소미를 찬양하는 찬트가 전장의 함성을 집어삼킬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고 한다.
찬트는 전투가 끝난 지금도 멎지 않았다. 들판을 가득 메운 전사들이 한목소리로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이 흡사 땅이 열병을 앓는 듯했다.
소미는 뭐랄까, 그림이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연출이 뭔지를 알았다.
황군은 상상 속의 황제를 떠올리며 싸워야 했으나, 공화국 군대는 신성한 아우라에 휘감겨 전장을 압도하는 아름다운 소녀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전자는 있던 힘도 빠져나갈 판이고, 후자는 없던 힘이라도 생겨날 판이었다.
그니르의 소식을 물어다준 건 우르술라였다.
나는 적 비행전단의 공습을 받아 초토화된 진지에서 그녀를 만났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겠지만, 나는 피에 젖은 그녀의 모습에서 일종의 아름다움마저 느꼈다.
이게 나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닐 거다. 그녀는 가장 짙은 그림자이던 시절부터 암살자들의 우상이자 연인이었으니.
“아, 라힐.”
그녀가 초점이 불분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다치셨군요. 지혈을 해야겠습니다.”
어깻죽지에 제법 깊은 창상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큰 목소리로 의무병을 호출했다.
우르술라는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내내 넋이 나간 듯했다. 그녀가 이렇게 무기력해하는 건 처음 보았다.
“처음으로 살행이 실패했다.”
“그니르였습니까?”
그녀가 고개만 돌려 전장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마치 태풍이 할퀴고 간 것처럼 처참히 박살 난 막사에 핏물로 붉게 물든 비익족의 날개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설마 저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 명의 형제들이 희생해서 만든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날개 하나 건졌을 뿐이다.”
“저게 그니르의 것이라면 고작 날개 하나 정도가 아닙니다. 칠십만 군대를 뒤로 무르게 만든 결정적인 전과입니다.”
“칠십만 군대보다 그 시건방진 놈의 목 하나를 더 원했다. 확실히 이케이드보다는 명줄이 질기더구나.”
“그럴 겁니다. 저도 잠깐 합을 겨뤄봤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상대였습니다.”
그니르는 에사인에서 한발 더 나아간 개념인 그엔사인을 언급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지금껏 만났던 에사인보다 한층 더 강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응급처치가 끝났다. 그녀는 오 센티미터도 넘는 창상을 지혈하는 동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네 새 장난감이 꽤 쓸만하더라.”
“골렘 말입니까?”
“골렘.”
그녀가 내 말을 곱씹었다.
“이름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아쉽게도 제가 지은 건 아닙니다.”
“카둔의 역작이라지. 그게 틈을 만들어준 덕분에 목을 건사했다.”
나는 반파된 채 나뒹구는 골렘 한 기를 그제야 보았다. 역장을 방출하는 포탑 상부는 강력한 물리력에 뜯어져 나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누님, 날개는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저런 흉물을 어디다 쓰려는 것일까?”
“그니르는 장대에 뭘 거는 걸 좋아하더군요. 그놈 방식을 그대로 돌려주려고 합니다. 날개를 기수에게 들려줘서 가는 곳마다 전시를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게 애꿎은 포로를 불태우는 것보다 효과가 훨씬 좋을 거다.”
우르술라가 재밌는 상상을 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니르에게는 악의가 가득 담겼을 상상일 테지.
아무래도 그니르는 그녀와 단순히 합만 겨룬 게 아니라, 내게 그랬듯 말로도 도발을 서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와의 대화는 내게 생각지도 못한 걸 환기시켜 주기도 했다.
포로.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치렀던 전쟁에선 포로가 발생하지 않았다.
서부전선에서는 승전하자마자 물러나야만 했고, 마그나크록과의 전쟁은 종족 전체를 걸고 벌인 뒤끝 없는 단판승부였기에.
그러나 황국과의 전쟁은 아주 고전적인 형태의 점령전이었다.
점령전에는 점령전만의 문법이 필요했다. 녹스 영주에게 볼모를 요구했던 것처럼 앞으로는 포로를 처리할 기준도 세워야만 한다.
“로드릭 녹스.”
“예, 거룩하신 질서의 수호자, 에신의...”
“그냥 라힐이라 불러라.”
“여, 영광이옵니다.”
로드릭 영주는 나와의 만남을 상당히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입 발린 말뿐이었던 태도는 완벽하게 달라졌다.
첫 만남에서는 말만 공손했다뿐이지 야만인 족장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으나, 지금은 감히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주눅이 들어버렸다.
여섯 번째 권능의 군세를 자기 땅 앞마당에서 박살 내버리는 걸 봤으니 주눅이 들 만도 하지.
“딸을 참 잘 키웠더군.”
“감사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식입니다, 하하.”
딸 칭찬은 반어법이다. 그러나 굳이 그의 착각을 바로잡아 주진 않았다. 지금부터 해줄 말들이 더 충격적일 테니.
“포로를 임시로 네 영지에 수용해둘까 한다. 5만 명을 관리할 인력과 식량이 필요하다.”
“5만 명이라면.......”
그가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집계된 포로의 숫자는 약 5만 명이었다. 기록적인 대승에 걸맞은 기록적인 숫자의 포로였다.
대부분의 포로는 영주군 측에서 나왔다. 개중에는 교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백기를 올린 부대도 있었다고 한다.
“가능합니다. 겨울을 날 비축고가 줄어들긴 하겠지만, 그건 제가 어떻게든 메워보겠습니다.”
“그리고 네 영지는 금일부로 공화국의 점령지가 되었다. 영주로서 네 지위는 인정해주겠다만, 차기 영주는 영지민 모두가 참여하는 선거로 뽑는다. 네 가문이 누려온 특권은 당대에만 한정된다는 소리다.”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을 테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잘 생각해봐야 할 거다.”
그는 입을 벌린 채 한동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특권층의 특권을 당대에만 인정해주겠다는 게 내가 세운 점령전의 문법이다.
마음 같아서는 죄다 끌어내려버리고 직접선거를 치르고 싶으나, 수만 년을 이어온 체제를 한순간에 무너뜨린다는 건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
그가 충분히 영리하다면 썩어나는 돈과 권력을 이용해 자식 앞날은 얼마든지 보장해줄 수 있다는 걸 알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선포겠지.
“저는........너무 당혹스럽군요. 혹여 제 여식이 위대하신 분께 실수라도 한 것인지요?”
“날 그렇게 생각하나? 누군가의 실수 때문에 감정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거라고?”
그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너무 갑작스러워서.......저는 제 자식이 영지를 물려받지 못할 거라는 상상은 꿈에서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자식 놈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녹스 가문의 후계자로서 이 땅을 다스리기 위해 어릴 때부터 학문을 연마하고 마음가짐을 길러왔습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천품에게 권력을 쥐여 줬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당장 저만 해도 곳간을 지키는 문지기조차 아무에게나 믿고 맡길 수가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다리를 꼬며 비스듬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걸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다. 나는 이 나라를 정복하러 왔다. 나는 네게 보급을 요구할 필요조차 없다는 걸 상기해보아라.”
그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더 할 말 없으면 가서 아르덴을 불러와라.”
나는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포로들의 대표자 격 인물은 티에말령의 대영주 아르덴이었다. 그가 지배하는 티에말령은 스트리아령보다 훨씬 큰, 한국으로 치면 경상도 전체를 합친 것만큼 드넓은 땅이다.
이것도 운명의 장난일지 모르겠다. 나는 아르덴과는 안면이 있었다. 그는 전생에서 내 단골 중 하나였다.
기억하기로 그가 자주 넣곤 했던 의뢰는 정적의 제거였다.
그냥 정적은 아니고, 아내와 바람을 피울 거라 의심되는 정적.
그는 심각한 의처증을 가진 사내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의처증에는 근거가 있었다. 나는 의뢰를 수행하며 그의 아내가 저지른 숱한 불륜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티에말 가문의 수장이라는 지위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근방 사교계에서 소문이 자자한 추남이었다.
반면 그의 아내는 잠깐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못 홀릴 남자가 없을 사교계의 스타인 데다, 욕망을 관장하는 나브니의 신도였다. 아내는 고지식한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지겨워했고, 충동적인 로맨스가 주는 부적절한 자극을 추구했다.
나는 이후 그들의 결혼생활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머지않아 귀족의 정부나 족치고 다니는 시시한 일들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그때의 나는 그림자의 신이 가져다주는 위험하고 부적절한 자극을 추구했다.
“아르덴을 데려왔습니다, 왕이시여.”
근위전사 두 명이 아르덴의 두 팔을 양쪽에서 붙든 채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근위전사 둘은 좀 과하다 싶다.
내가 알기로 아르덴에게는 아무런 무술소양이 없었다. 아무리 신분이 전부인 에신이라지만, 생득권으로 대접받는 건 어디까지 아랫것들을 대할 때의 얘기고. 귀족 태생이 마법이나 검술 아무것도 다루지 못하면 같은 귀족들에게는 무시받기 마련이다.
그가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외모에 대한 언급은 굳이 하지 말자.
소문이 그대로라는 것 정도로만 언급하겠다.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찌든 눈. 저 눈이 수십 년의 세월을 격하고도 그에 대한 기억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저런 눈을 가진 고위귀족을 만난다는 건 정말이지 드문 일이었다.
“그냥 죽이시오.”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살고 싶지 않으니.”
“살고 싶지 않으면 왜 포로가 되었나.”
“된 게 아니오, 당신들이 되도록 만들었지.”
“전쟁에는 왜 나선 거냐. 살고 싶지 않다면서.”
“싸우고 싶어서 나선 게 아니오, 싸우도록 떠밀렸지.”
“죽기에는 아까운 삶이 아닌가? 모처럼 영주로 태어났고, 아름다운 아내도 얻었는데.”
그의 턱수염이 부르르 떨리며,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자리에서 그 요물을 언급하는 건 심히 부적절하오.”
“내겐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냥 죽여주시오. 내 삶은 그저 고통의 연속이었을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