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81화
약진 (8)
“그 눈빛.”
그가 검지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네 눈빛이 마음에 든다. 날 죽여버리겠다는 놈을 도전자로 만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그가 나직하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나는 슬슬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불러낸 건 회담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음습한 의도가 느껴졌다.
“검을 뽑아라.”
나는 울토르의 대검을 소환해내며 말했다.
“뭐 하러?”
“뭐 하긴, 그 주둥이를 손봐주려고 그런다. 너도 명색이 에사인이라면 부하들 앞에서 도전을 피하진 않겠지.”
“재밌군, 너는 에사인이 뭔지도 모르고 있지 않나. 울토르의 힘만 흡수한 게 아니라 그 우둔한 뇌까지 닮아버리다니.”
“그만 조잘대고 검이나 뽑아라.”
나는 검극으로 그의 목을 겨누었다. 양군 합쳐 도합 백만도 넘는 사람들이 우리 둘을 지켜보는 중이다.
놈이 어떤 목적으로 회담을 주선한 건지는 몰라도, 내 목적은 이거다.
쓸데없이 인력낭비, 자원낭비 하지 말고 일대일로 결정하자고.
“흐흐.......”
그니르가 또 그 재수 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결코 너와 싸우지 않는다, 라힐.”
“싸우지 않으려면 왜 여기까지 왔나?”
“지금부터 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말해주도록 하마. 나는 본영으로 돌아가서 돌격명령을 내리겠다. 너는 어떻게든 나와 싸워서 전쟁을 빠르게 끝내려고 하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내 발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너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겪게 될 테고, 네 작은 나라가 점차 시체로 뒤덮여가는 걸 무기력하게 바라본다.
전쟁은 네 작은 나라가 반절로 쪼그라질 때까지 계속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네게 영원한 충성을 약속했던 자들이 모두 등을 돌릴 때, 비로소 너는 깨닫는다. 인간이란 얼마나 간교하고 비열한 존재인지. 공포를 기반으로 삼지 않은 통치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시나리오 쓰고 있네, 미친놈이.”
후우웅.
날갯짓을 한 차례 하자, 그의 발이 땅에서부터 한 뼘이나 떠올랐다.
“슬슬 시작해보지, 나는 네 도전을 적극적으로 즐겨볼 참이다. 첫 제물은 강철의 자매단이 좋겠군. 그년들은 특별히 산 채로 잡으라고 일러두겠다. 묶어놓고 한 포씩 뜨며 황제폐하를 배신한 소감을 물어보고 싶군.”
그의 무미건조한 눈빛에서는 인간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수천 년간이나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다보면 인간성이 남아날 수가 없는 거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려나?
라는 한가한 고민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인류를 위해, 당장 이 미친 신들의 지배를 끝내야만 한다.
“그니르.”
그는 돌아가기 전, 아주 잠깐 내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을 뻗어 그의 죄업을 움켜쥐었다.
“큭...!”
그가 허공에 뜬 채로 잠시 경직되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그의 죄업을 꽉 움켜쥔 채, 왼손으로 대검을 힘껏 휘둘렀다.
쩌어엉.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그의 몸뚱이가 포탄처럼 위로 솟구쳤다. 그는 기습적인 참격을 창으로 받아내며, 내 힘을 반탄력 삼아 까마득한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래, 재주껏 날뛰어봐라!”
하늘 위 한 점이 된 그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신호였다.
칠십만 대군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때맞춰 우리 쪽에서도 진격명령이 떨어졌다. 나를 대신해 지휘권을 받아둔 막시무스가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사자후를 터뜨렸다.
터터텅.
오만에 달하는 크록 전열보병이 거대한 방패를 일제히 앞으로 내밀어 방패의 벽을 형성했다.
크록 전사단은 빗발치는 소총탄을 가볍게 튕겨내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어깨너머로는 최초로 실전투입되는 골렘 시험기가 보였다. 골렘은 역장을 전개해 총탄이나 포탄 따위의 모든 투사체를 튕겨내며, 전장을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그때였다.
마치 옷감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귓바퀴를 때렸다. 가공할 에너지의 덩어리가 날아와 아군 전열을 들이받았다.
방패의 벽이 산산이 흩어지고, 수십 명의 크록이 일순간 핏덩이가 되고 말았다.
흡사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만 같았다.
착탄지점에는 직경 십 미터가 넘는 둥그런 크레이터가 패였다.
잠시 후 분출하는 피보라 속에서 비익족 전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운석 같았던 그 에너지는 음속을 초월한 돌격이 만들어낸 파동이었다.
놈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크록 전사들의 목을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찾듯 수월하게 베어버렸다.
놈은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정점의 경지에 도달한 자였다.
전선 여기저기서 비슷한 광경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그니르의 비익족 부관들은 실력적으로 결코 우리의 장군들의 아래가 아니었으며, 숫자는 몇 배나 더 많았다.
“라힐!”
정기호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적의 비행전단이 후방으로 돌아갔다. 비행전단을 이끄는 건 그니르 본인이다. 놈을 막지 못하면 보급라인이 모조리 끊기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 거다.”
“강철의 자매단은?”
“교전 중이지만, 이대로라면 전멸은 시간문제다.”
나는 남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수천 명의 비익족 전사들이 그물처럼 얽혀 교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강철의 자매단의 금빛 갑옷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띄었다. 그녀들은 대여섯 배가 넘는 수적 열세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엘리시아도 저기 있나?”
“있을 거다. 마지막에 배속을 바꿨으니.”
“예비대는?”
“오천. 비익족 천 명과 마법사 다섯 포함이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깨달았다.
그니르는 전 국토가 불타는 와중에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단을 잡겠다며 자국민이나 족치고 다녔지.
그래서 그들이 군대로서 얼마만큼의 힘을 보유했는지는 미스터리였다.
막연하게, 비익족 에사인이 수장이니만큼 공군은 강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뚜껑을 따보니 강한 정도가 아니었다. 지상군이 얼추 대등한 전력을 지녔다면, 공중전은 어른과 아이만큼이나 차이가 컸다.
- 나는 너와 결코 싸우지 않는다, 라힐.
분명 그렇게 단언했었지.
여기서 내가 강철의 자매단을 구하겠답시고 뒤로 빠졌다가는, 놈들은 우회기동해서 다른 곳을 치면 그만이다.
놈에게 일일이 응수하겠다는 건 전쟁을 장기화하겠다는 의도에 말려드는 꼴밖에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뾰족한 수가 있나?
전장의 주도권은 날개를 가진 자가 쥔다. 날개가 없는 이상 나는 그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신중히 생각해라. 지상의 상황은 나쁘지 않으니.”
정기호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영지군은 우리의 예상대로 오합지졸들이었다. 그들은 크록이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이미 전열이 붕괴될 조짐을 보였다.
반면 그니르의 본대는 영지군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것들은 자기 주인 못지않은 미치광이들이었다.
“신성한 전사들이여, 성전에 이바지하라! 황제폐하의 이름으로 악을 무찌르라!”
사제들은 숯이 된 제물들을 장대에 매달아 높이 들고, 임박한 영광을 노래했다.
교전거리에 들어가서는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거품을 물고 싸웠다. 그들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종교적인 신념에 도취된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으나, 놈들은 결이 다르다고 느껴졌다.
놈들은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하찮게 여겼다. 사지가 떨어져나가도, 복부를 꿰뚫려도, 웃으면서 마지막 힘을 모아 칼을 한 번 더 휘두르는 미치광이들이었다.
“예비대는 보내지 않는다.”
“그러면?”
“공중은 포기하고, 우리는 앞만 보고 나아간다. 그니르가 우리 전사 한 명을 죽일 때 우린 열 명을 죽이면 될 거다.”
나는 내 손에 피를 묻힐 각오를 마쳤다.
전직 암살자이자 현직 에사인으로서, 피를 묻힐 각오를 마쳤다는 건 고작 인간 일이천 명의 목숨을 입에 올리자는 게 아니다. 나는 오늘 공화국이 무너지는 속도가 빠를지, 황군이 무너지는 속도가 빠를지를 테스트해보기로 작심했다.
“따라와라.”
나는 정기호에게 고개를 까딱거린 후, 대검을 들고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쩌어억.
대지를 두 쪽으로 가르는 듯한 참격.
인간이 되다만 육편들이 눈발처럼 휘날린다.
이 참격은 실제로 성벽을 갈랐던 바가 있다. 에사인이 되기도 전에.
나는 주저 없이 다음 일격을 가했다. 겁을 집어먹은 인의 무리에 무제한의 폭력을 털어놓았다.
“도, 도망쳐라!”
한 늙은 사제가 땅에 엎어진 채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나가있었다. 얼굴엔 피를 흥건히 뒤집어쓰고, 낯빛은 탈색을 한 듯이 창백했다.
“에사인이다, 라힐이 나타났다!”
사제들이 등을 보이며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니르의 상징이 새겨진 성물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무기로 쓰이던 율법서는 핏빛 전장을 뒹굴며 찢어진 책장을 민들레 홀씨처럼 뿜어내었다.
그들은 분명 죽음을 각오했으나, 내가 가져다주는 건 어떤 시구로도 꾸밀 수 없는 하찮은 결말이었다.
정말이지 거기에는 어떤 비장미도 없었다.
그저 낙엽처럼, 칼질 한 번에 수십 명씩 뭉텅이로 쓸려나갈 뿐이었다.
나는 계속 나만의 정의를 관철시켜나갔다. 사제들이 입은 붉은 로브보다 진한 피의 강을 거닐며,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반으로 갈라버렸다.
정신없이 베고 또 베다보니 어느덧 누구도 앞을 막는 이가 없었다. 대신 보이는 것이라고는 눈 덮인 산야뿐이었다.
어느덧 종단으로 칠십만 대군을 주파해낸 것이다.
게다가 이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검은 철갑주를 입은 크록 우량아들, 흑철 전사단이 대장정을 함께했다.
그들은 한눈에 봐도 열병식 때에 비해 수가 확연히 줄어있었으나, 그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적들이 치른 손실은 상상을 초월했다.
“위대한 분이시여, 위를 조심하십시오!”
적 공중전단 하나가 까마귀 떼처럼 하늘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들은 크록 전사들이 조금만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득달같이 내리꽂혔다.
그러나 흑철 전사단도 만만치 않아서, 비익족 전사가 착륙하자마자 다져진 고기로 만들어버리는 장면도 흔하게 나왔다.
“물러나는군.”
정기호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적들이 본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적 비행전단은 철군명령을 전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네 무모함이 통한 것 같다. 예비대를 아낀 게 옳았다.”
“무모함이 아니라 계산이야.”
“무모한 계산이라고 해두지.”
나는 피식 웃으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지휘를 포기하고 백정 노릇을 한 덕에 다른 전선의 상황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가 더 큰 손실을 입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순순히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걸 보여줬으니, 저들로서는 작전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을지도.
“가만, 저놈들 어디까지 가냐?”
적들의 움직임이 미심쩍었다. 그들은 본영을 지나쳐 병력을 하염없이 뒤로 물리는 중이었다.
“녹스 영지를 버릴 모양이군. 아직 병력이 온존한 데도.”
“그렇게까지?”
“저들은 정규군이 아니다, 사제단에 불과하지. 돈과 인력을 쏟아부어 가며 전선을 유지할 이유는 없다.”
“정규군도 아닌 것들하고 박 터지게 싸운 우리는 뭐가 되냐, 그럼.”
“방심하지 마라, 라힐. 그니르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다.”
갑자기 비익족 전사가 한 명 날아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보고 드립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사뭇 심각했다. 강철의 자매단은 버린 패였다. 지금껏 그니르를 상대했을 테니 비보가 날아오리라는 건 예상되었다.
“강철의 자매단은 적 3개 비행전단의 기습을 받아 교전을 벌였습니다만, 사투 끝에 무사히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