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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80화 (180/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80화

약진 (7)

“러시아라면 황국과 전쟁 중이라지 않았나?”

“대외적으로는 그렇다고 알려져 있지. 하지만 북부전선, 동부전선, 어디에도 러시아군을 봤다는 제보가 없어.”

“선전포고는 눈가림용이라는 건가.”

“참신할 것도 없잖아. 지구에서도 자주 해오던 짓거리니까.”

러시아와 미국이 제3세계 국가나 테러단체를 후원해가며 대리전을 벌여온 거야 비밀도 아니지.

서로 잘 되는 꼴 죽어도 못 보겠다니까.

하지만 냉전시대의 잔재가 내 발목까지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다.

“악수를 뒀군. 총은 큰 도움이 안 될 거다. 오히려 혼란만 야기하겠지.”

“내 생각도 같다.”

왜 아직까지도 크록 군대의 주무장이 소총이 아니라 검, 도끼, 망치겠냐고.

원거리 투사체를 막는 방법은 정말이지 다양하다. 충분한 수의 마법사를 확보한다면 도시를 반구형으로 뒤덮는 방호마법진도 설치할 수 있다.

마법진이 너무 품이 많이 든다면 간단히 비싼 갑옷을 사다 걸쳐도 된다. 질 좋은 갑옷을 입고 마력으로 신체능력을 끌어올린 전사를 총으로 죽인다는 건 상당한 끈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군수장비에 비용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나라 군대처럼 60년대 수통이 아직도 내무반에 굴러다니는 꼴은 못 봐줄 것 같아서.

공화국 정규군, 특히 크록 전사가 착용한 제식갑옷은 황국 기준으로도 아주 뛰어난 품질의 무구였다.

“아마 저들도 영지군이 뭔가 해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을 거다. 발목만 잡아도 성공이 아니겠나.”

“발목이 잡혀주면 안 되겠군.”

나는 참모들이 그린 전술지도에 각기 동그라미를 세 개 그렸다.

동그라미는 세 방향에서 우릴 조여 오는 그니르의 군대를 가리킨다.

동그라미에 맞서는 도형은 네모였다.

슥슥.

나는 큼직한 네모 하나,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네모를 그렸다.

우리의 본대는 20만.

거기서 암살형 크록이 빠지면 15만의 전사가 남는다.

크록들은 작고 똑똑하거나, 커다랗고 신체적으로 우수하거나, 중간이 없이 극과 극의 형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아쉽지만 암살형 크록이라 불리는 그룹은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죽어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이 덩치들과 맞먹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이 얼마나 강하냐면 암살형을 지능형으로 바꿔 부르자는 건의가 올라왔을 때 폭동이 벌어질 뻔했다고.

아무튼 5만을 별동대로 뺀 나머지 15만도 다 같지가 않았다.

15만의 전사들 중에서 카둔의 공방에서 제작한 아티펙트로 중무장한 정예는 1만에 불과했다.

이 1만의 정예부대는 평범한 크록 전사들과 구분 짓기 위해 특별히 ‘흑철 전사단’이라 명명되었다.

정글에서 나는 광물에 포함된 불순물이 까만색을 띠었기 때문에, 자연히 갑옷도 까만색 일색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흑철 전사단 중에서도 가록의 주인이 될 자격을 인정받은 전사는 고작해야 천 명 남짓이었다.

이들은 한때 크록 기사단이라는 성의 없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부대가 정식으로 예편되며 흑철 기사단이라 명명되었다.

우리의 핵심전력이 바로 이 흑철 기사단이었다. 나머지 전력 전체와 싸워도 동수를 이룰 만큼 무지막지하게 터프한 놈들이다.

쉽게 생각해서 한 명 한 명이 살아있는 탱크라고 보면 된다.

가뜩이나 강한 놈들에게 내가 직접 축복까지 내려줬기 때문에, 부대 단위로 붙는 정규전에서는 당해낼 전사단이 드물 거라 자부한다.

흑철 기사단의 상위개념도 존재한다.

자신의 세대에서 최강을 다툴만한 강자 100명을 가려 뽑은, 이른바 근위전사단.

“막시무스.”

“예, 위대하신 분이시여.”

막시무스가 고개를 숙이며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바로 근위전사단의 단장이었다. 그의 전투력은 100인의 근위전사들 중에서도 발군이라 여겨졌다.

막시무스는 지금껏 회의실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동상처럼 미동조차 않았다.

전술에 대한 그의 입장은 언제나 간단명료했다.

나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

“근위전사단과 함께 동쪽 라인을 지켜라. 거인들을 네게 맡기겠다.”

“영광입니다.”

거인이 100체라고 했으니, 공교롭게도 근위전사단과 숫자가 같다.

최고의 유전자를 타고난 크록 전사와,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선 존재, 평지거인.

쉽지 않은 싸움이겠으나, 나는 내 부하들을 믿고 있다. 아니, 믿고 싶다. 여기서부터는 내게도 신앙의 영역이었다.

나는 다른 지휘관들에게도 라인을 배정해주었다. 소미는 왼쪽을, 제후라가 오른쪽을 맡고, 내가 가운데를 담당한다.

배치 자체는 특별할 게 없었다. 제후라는 공화국에 합류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묘인족의 장군이자 번개의 에사인으로서 충분히 일군을 이끌 자격이 있다.

소미는 이미 우리 군의 여신이었다. 병영마다 찬트가 울려 퍼지는 걸 듣고 있노라면 이게 군대인지 아이돌 콘서트장인지 모를 지경이었으니.

군대를 포진하고 지휘관을 배치하자 내가 할 일이 끝났다.

에신에서 벌어지는 여느 전투가 그렇듯이, 전술적인 잔재주보다는 개개인의 기량이 중요했다.

만약 그니르가 초장부터 내게 도전을 걸어온다면 우리 둘의 합으로 두 나라의 운명이 결정지어진단 소리다.

물론 그럴 확률은 낮다.

동부전선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뭐겠어.

에사인은 에사인과 싸우고 싶지 않아 하거든.

신도들도 자기가 모시는 에사인이 다른 에사인과 싸우는 걸 바라지 않는다. 오데르와 싸운 일로 내가 잔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그니르의 군대는 정찰병이 보고한 대로 닷새 후 녹스 영지에 당도했다.

나는 약속한 대로 영주의 딸을 돌려보내주었다.

더 데리고 있어봐야 민폐밖에 끼치지 않을 테니.

적의 군대 중 다수를 차지하는 영지군은 영상에서 봤던 것 이상의 오합지졸들이었다. 몸에 맞는 갑옷을 입은 병사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반면 그니르의 본대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위협적이었다.

에사인의 힘이 맹목적인 믿음에서 나온다면, 그니르의 신도들은 내가 아는 어떤 종교인보다도 더 광적이었다.

“......미쳤군.”

정기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배치를 마친 적 진영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그니르의 사제들은 내 추종자임에 분명한 사람들을 높다란 장대에 매달아 불을 질렀다. 산 제물이 질러대는 비명소리가 벌판에 메아리쳤다. 사제들은 잿더미가 되어가는 사람을 두고 두 팔을 벌리며 소리 높여 기도를 올렸다.

저 짓거리를 하려고 사람을 수백 킬로미터나 끌고 왔단 말이지.

한두 명도 아니라 오륙십 명을.

진짜 미친 거 아닌가?

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간단했다.

나를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인 거다.

도발의 의미도 있겠지.

우리가 이런 짓까지 하는데도 구경만 하느냐고.

그니르는 자신의 부관들과 함께 수백 미터 상공에서 부하들이 벌이는 역겨운 짓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제물이 완전히 숯덩이가 되자 날개를 접고 바닥에 착지했다.

이십여 명이 부관들이 그를 따라 일제히 착지하는 모습이 흡사 항공모함에 안착하는 전투기 편대를 연상케 했다.

잠시 후 그의 근처에서 비익족 전사 한 명이 날아올라 우리 진영으로 향했다. 비익족 전사는 병사들에게 붙들려 곧장 내 앞으로 끌려왔다.

그는 아주 젊고 수려한 용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갑옷의 가치로 추정컨대 상급귀족의 일원임에 분명했다.

그는 날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외쳤다.

“흉신 라힐, 드디어 이 두 눈으로 보는구나!”

“막시무스.”

나는 막시무스를 나직하게 불렀다.

“전령이다, 죽여선 안 돼.”

청년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더니, 송신탑처럼 거대한 크록이 칼을 꺼내든 채 지척까지 다가온 것을 보고는 기겁해 자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자는 방금 위대하신 분을 모욕했습니다.”

“적이잖아, 그 정도는 감안해줘야지.”

나는 청년이 정신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래, 무슨 용건으로 예까지 왔나?”

“시, 심판자 그니르 님의 전언이다. 그니르 님께서는 당신과 양 진영의 중간지대에서 단독으로 만나 담판을 짓고 싶다고 하셨다.”

“의미가 있을까? 우리나 그쪽이나 서로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는데.”

“나는 모른다. 그렇게만 전해달라고 말씀하셨다.”

“알았다, 가봐.”

나는 그를 손짓으로 쫓아버렸다.

“응할 필요 없다.”

정기호가 말했다.

“나브니와 만났을 때 느꼈겠지. 놈들은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그래도 만나보긴 해야 해. 운이 좋다면 나브니 때처럼 일대일 대결을 벌일 찬스를 잡을지도 모르니.”

“그건 최후의 순간에 고려해야 하는 옵션이다, 라힐.”

“나 하나 던져서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면 싼 대가지. 그렇다고 그런 눈으로 보진 마라. 나 그리 훌륭한 놈 아니니까. 만능재생세포 연구가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안 설쳤을걸.”

“네 성격에 퍽이나 그러겠군.”

“진짜라니까?”

“만난다면 무슨 얘길 해볼 참이냐?”

“우선은 저거.”

나는 턱짓으로 아직도 피어오르는 중인 연기를 가리켰다.

“어떤 의도로 저런 짓거리를 벌인 건지 물어보려고. 변명이 가능할 리는 없겠지만.”

나는 그니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다.

그는 오래전부터 나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덕분에 우리 사이는 이제 단순히 싸워서 이기는 것만으로는 풀 수 없는 매듭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가 잘못된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걸 깨닫기를 원했다. 황국이 망해가는 데에 그가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것도.

그러려면 우선 그와 만나 그 따위로 살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해줘야만 한다.

회담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빠르게 성사되었다. 그날 오후 나는 100인의 근위전사단을 거느린 채 양 진영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유사시에 내 한 몸 지킬 수야 있겠으나, 이들을 굳이 데려가는 건 적들에게 우리의 전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크록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100인의 근위전사들.

흑철 갑옷을 꼬리 끝까지 차려입은 모습이 듬직하기 그지없다.

그니르도 수행원을 거느리고 나왔다. 그가 데려온 수행원들은 100명 남짓한 비익족 궁사대였다.

그들은 우리와 대척점을 이루듯 순백의 경갑옷 차림에, 사람 키만큼이나 큰 대궁을 장비했다.

그들도 우리만큼이나 가리고 가려 뽑은 실력자들임에 분명했다.

그들이 하늘에서 쏘아대는 커다란 화살은 천벌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이나 유명했다.

암살자시절 파리 같던 내 목숨에 가장 큰 위협이었던 존재였다.

그니르와 나는 이십 미터가량까지 접근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나브니보다 훨씬 노련한 전사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들어가면 한쪽이 죽기 전에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입수하게 된다.

“울토르의 힘을 흡수했다는 게 사실이었군.”

면갑의 틈새로 날카로운 눈빛이 새어나왔다. 샛노란 동공이 그림자 안에서 짐승처럼 번득였다.

“남 일처럼 얘기할 거 없어. 곧 네가 맞이하게 될 미래니까.”

“이로써 너도 그엔사인으로 향하는 길에 한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축하하지.”

“그엔사인?”

“에사인 중의 에사인이란 의미다.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네가 내 일부가 된다면 사소한 의문들은 자연히 사라질 테니.”

“미친 새끼.”

나는 불현듯 유쾌한 기분이 들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그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전쟁에 임하는 모양이다. 적의 영혼을 흡수해 존재를 소멸시켜버리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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