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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79화 (179/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79화

약진 (6)

“먹는 것까지는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말썽만 부리지 마라. 네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기 싫다면.”

“제 명예는 제가 알아서 지켜요. 당신은 누구이기에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

“내가 누구인지보다 네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지 않을까.”

“멍청한 질문이네요. 당연히 저는 자랑스러운 녹스 영지의 벌판에 나와 있죠.”

이것만큼은 인정해야겠다. 평생 떠받들리기만 한 인간의 자존감이란 만리장성처럼 공고하다.

“참모장.”

나는 그녀의 곁에 선 장교를 불렀다.

“시중인은 한 명만 남기고 모두 돌려보내라. 남는 천막을 배정해주고, 허튼짓하지 않게끔 잘 감시하도록.”

“잠깐만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요? 시중인을 한 명만 남기라고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옷을 갈아입으라고요? 식사는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고요? 당신 눈에는 제가 직접 허드렛일을 하는 천것들처럼 보이나요?”

“.......데려가.”

험상궂은 크록 전사들이 그녀를 에워싸며 압박을 주었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어요. 저는 이런 대우나 받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소녀는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항의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싸가지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좁쌀만큼 돋아났던 동정심이 빛의 속도로 사라져버렸거든.

“정기호, 아무래도 전생에서 너와 만났더라면 우린 친구가 못 됐을 것 같다.”

“난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전직을 고려하자면 어차피 친구는 될 수 없었을 것 같군.”

“놀라지 마라. 우린 실제로 많은 높으신 분들의 친구였어.”

“다 사업적인 관계 아니냐.”

“그런 딱딱한 말로 정의하기엔 우린 그분들의 지극히 사적인 모습까지 속속 알고 있었지.”

“그러니까 다 사업적인 관계 아니냐고.”

정기호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방패 같은 냄비에 담긴 라면을 게 눈 감추듯 후루룩 먹어버렸다.

크록이 식사량이 많다는데, 그에 비하자면 새 발의 피라고 하겠다.

“볼모는 그렇다 치고, 진짜로 여기 계속 주둔할 거냐?”

“식비 대준다는데 어쩌겠냐. 먹여 살릴 입이 오십만인데.”

“이곳은 사방이 지나치게 트여있다. 수적 열세를 안고 싸울 장소로는 적합하지 못해.”

“그니르의 군대가 불을 다룬다는 걸 잊지 말자고. 산이나 숲을 끼고 싸웠다간 얼마 전 목생족 꼴이 나고 말 거다.”

“방재대책을 세워둬야겠군.”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마력을 움직여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저만치 밀어내버렸다.

“지금 내가 걱정하는 건 불이 아니라 그니르의 실력이다.”

“그니르는 울토르보다 서열이 낮지 않나. 너라면 문제없이 상대할 수 있을 텐데.”

“사람들이 떠드는 서열 믿지 마라. 실제로 박 터지게 싸워서 정한 순서가 아니니까. 길레악이 가장 강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 아래로는 미지수라고 보는 게 좋을 거야.”

황군이 무적이라는 이미지를 만든 건 울토르였다.

울토르가 오랜 세월 변방을 돌며 야만족들을 토벌하는 동안 그니르는 황국 내부에서 암약했다.

장차 에사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유망주는 모조리 그의 손에 의해 싹수가 잘려나갔지.

만약 그 과정에서 마력의 탈취가 이뤄졌다면, 그니르의 힘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니르의 군대가 화공을 걸어올 걸 대비해 한국으로부터 방염장비를 대거 도입했다.

병사들은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드넓은 영역에 걸쳐 길게 자란 풀을 베어내고, 불이 옮겨붙을 만한 물품들을 최소화했다.

그사이 소미의 앨범이 전군에 보급되었다.

앨범 전체를 찬트로 채운 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소미의 주가가 근래 엄청나게 올랐다는 게 느껴진다. 숙영지 어디를 가나 그녀의 노래가 들려오는 걸 보아하니.

찬트라는 효능을 빼놓고도, 노래 자체도 잘 만들어졌다. 댄스곡에 힙합에, 요새 유행하는 장르들이 적절히 잘 버무렸더라고.

약 일주일 후, 우리는 드디어 그니르의 군대가 움직인다는 첩보를 받았다.

모리스 영사에게 핵무기 사용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힌 후로는 이틀 후였다.

그날 벽두부터 수백 명의 비익족 정찰부대가 사방팔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날아돌아왔다.

“북쪽에서 그니르의 본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숫자는 약 20만, 닷새 거리입니다!”

나는 즉시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정찰조가 찍어온 영상을 확인해보았다.

우리는 회의실에서 정찰조가 촬영해온 영상을 확인했다. 그니르의 군대는 갑옷 대신 정화의 불을 상징하는 붉은 로브를 입었다. 로브를 입은 수십만에 달하는 사제단이 진군하는 모습이 흡사 거대한 들불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영상에는 그니르의 모습도 담겨있었다.

진군하는 들불 위에서, 기다란 마상용 창을 한 손으로 쥔 전사가 두 쌍의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떠있었다.

창촉은 충만한 마력으로 번개가 치듯 번뜩였고, 발끝까지 덮는 백색 비늘갑옷이 태양 빛을 찬란하게 반사했다.

울토르의 검과 마찬가지로, 그가 착용한 갑옷과 창도 초월적인 마력으로 벼려낸 전설적인 무구였다.

영상에 비친 면모는 비익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라는 타이틀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

장교들은 말없이 침만 꿀꺽 삼켰다. 모든 이가 그가 만만찮은 상대가 아님을 절감하는 중이었다.

“동쪽에서 들어온 첩보입니다. 100체가 넘는 평지거인 부대가 동쪽에서 접근 중입니다!”

영상을 확인하는 와중에도 다음 보고가 연이어 들어왔다.

이번 영상에는 진군하는 거인족들이 담겨있었다. 맹세코 나는 한 프레임 안에서 이렇게 많은 거인을 본 적도,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다.

쿵, 쿵.......

거인들이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화면이 지진을 만난 듯 출렁였다.

날면서 촬영을 했을 테니, 이 떨림은 당시 정찰조원이 느꼈을 심정을 말해주는 것이겠지.

거인족 부대는 100여 명에 불과한데도, 앞서 보았던 그니르 본대만큼이나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그니르가 어떻게 거인족들을 수족으로 삼은 거지.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첩보는 없지 않았나?”

아군 정찰조는 비행거리 일주일 이상의 초장거리 정찰을 나가는 중이다. 때문에 첩보정보에 시차가 존재함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들이 거인족을 규합 중이라는 정보는 여지껏 듣지 못했다.

“저건 문지기들이다.”

우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지기라니?”

“성문마다 붙어서 문 열고 닫는 놈들 말이다. 그니르도 제정신이 아니로군. 저 거인족 병단이 전멸한다면 도시들은 문을 열 수 없어 기능을 멈추게 될 거다.”

“이판사판 아니겠느냐.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열지 못하는 성문 따위 알 바 아닐 테니.”

우르술라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거인을 상대할 비책이 있겠습니까?”

“글쎄다, 내 기억에 거인 암살의뢰는 받아본 적은 없구나.”

“저것들의 약점은 머리다.”

우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거인은 가죽이 두껍고 재생력이 좋아서 무기로는 상처를 입히기 힘들다. 대포를 쏜다고 해도 치명상을 입히긴 어렵다고 본다. 거인을 제압하려면 제공권을 잡은 후 머리를 공략하는 게 최선이다.”

“그니르를 상대로 제공권을 잡으라니, 어려운 주문이로군.”

우리는 전원 비익족으로 구성된 강철의 자매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녀들은 지옥 같던 서부전선에서도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분명 믿음직한 전력이긴 하나, 상대가 하필이면 그니르였다.

그는 비익족 유일의 에사인답게 황국 최강의 공중전력을 거느렸다. 그의 군대와 하늘에서 맞선다는 건 자살행위처럼 여겨졌다.

“후방으로 빼둔 계집을 불러와야겠구나.”

“엘리시아 말입니까?”

“명색이 전직 부단장 출신인데 쌀이나 지키자고 뒤로 빼둘 때가 아니지 않겠느냐.”

“나는 찬성이다.”

정기호가 우르술라의 제안에 힘을 실어주었다.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민주주의 따위는 알 바 아니게 될 테니.”

“저도 동의해요. 우선 이기고 봐야죠.”

소미까지 찬성했다. 다른 장군들도 잇따라 거수로 찬성표를 던졌다. 그들은 애초부터 엘리시아를 뒤로 빼둔 결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지.”

내가 최종적으로 재가함에 따라, 엘리시아는 강철의 자매단의 지휘관으로 복권되었다. 어디까지나 이번 전투에 한정된 임시직이긴 하지만.

강철의 자매단은 그녀가 돌아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겠지. 그러나 그들이 화학적 결합을 이룰 때까지 기다려줄 만큼 상황이 한가롭지 못하다.

마지막 첩보는 서쪽에서 들어왔다. 영지군을 규합한 병력 50만이 접근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되게 만만해 보이는군요.”

“하룻강아지들이 많이도 모였구나.”

여러 영지에서 박박 긁어모아 편성한 서부군은 머릿수로는 다른 방면군을 압도했으나, 본대나 거인병단에 비해 평가가 아주 박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노련한 전사들은 동부전선으로 차출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실전경험이 없는 어린 소년병들, 노쇠한 탓에 군역을 피해갔던 노인들이 서부군의 다수를 이뤘다.

“저들을 빠르게 제압한 후 여력을 몰아 본대를 포위한다면 승산이 있다.”

“싸워볼 필요나 있겠느냐? 눈만 마주쳐도 살려달라고 빌 것 같은데.”

“누님 말씀대로 굳이 열을 내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저들은 군인이 아니라 투구를 씌운 시민일 뿐이니.”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영상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적의 비행전단을 견제하느라 아주 먼 거리에서 망원렌즈로 촬영한 영상이라,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 저들은 내가 알던 황군과는 어딘가 달랐다.

“저거....... 혹시 그거 아닙니까? 총?”

장군들과 장교들이 화면에 일제히 얼굴을 들이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만큼 화면은 충분히 큰데도 말이지.

“저건 총이 확실하다.”

한참 후 정기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총이 맞아.”

이네스의 컨펌도 떨어졌다.

이젠 확실해졌다, 정기호는 미필이라 영 믿음이 안 갔거든.

더 자세히 보니 총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박격포인 듯한 길쭉한 쇳덩이를 등에 지고 걷는 병사들도 드문드문 보였고, 구식이긴 하지만 견인포도 눈에 띄었다.

얼마나 구식인가 하면 사람의 힘으로 저걸 끌고 앉았단 말이지.

휘날리는 깃발이 아니었다면 세계 1차 대전의 기록물을 보는 것으로 착각할만한 영상이었다.

“이상하군. 녹스 영지에는 총이 없었다. 기껏해야 볼펜이나 손전등 따위가 시장에 돌 뿐이었지 않나.”

“설마 그니르가 지금까지 늑장을 부린 게 총을 보급하느라 그런 거였을까?”

“누가 감히 황군에게 무기를 보급할 수 있다는 거지? 미국,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나라를 상대로?”

정기호의 의문에 일리가 있다. 황국은 현재 영국의 속령인 모리스탄, 미국의 동맹국인 뉴 텍사스와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그리고 지구에 한정해서만큼은 영국과 미국이 황국보다 훨씬 입지가 높았다.

특히 미국은 무역봉쇄만으로도 멀쩡한 나라를 하루아침에 망하게 할 수 있는 깡패국가잖아.

도대체 어떤 미친 나라가 그런 깡패들을 상대로 뒷공작을 벌일 수 있단 말이지.

이 질문은 답이 나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미친 나라가 딱 하나 존재했다.

미국이나 영국만큼이나 에신에 일찌감치 개입했고, 그들과 사이가 극히 나쁘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듯한 이런 뒷공작을 밥 먹듯이 벌이는 나라.

“...러시아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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