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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78화 (178/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78화

약진 (5)

장군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그들은 이제나저제나 진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난데없는 핵무기 카드 덕에 느리게 가겠다는 원안은 자동으로 파기되었다. 장차 방사능으로 뒤덮이게 될 땅을 한 뙈기나마 온전히 건지려면 조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이는 게 맞다.

개인적으로는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다.

현대과학의 총화인 대량살상무기와 주술의 정점인 에사인의 대결.

만약 누가 공화국을 정조준해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날린다면, 나는 죽지 않을지 몰라도 사람들이 떼로 쓸려나가는 건 막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지.

하지만 상대는 두 차원을 통틀어 최강의 주술사들을 거느린 국가였다. 황제를 등에 업은 그들이 만만찮은 상대가 아니라는 건 지금까지의 전황이 증명한다. 연합국 측도 오죽 답이 없었으면 핵무기까지 꺼내나 싶다.

우리는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티에말령과 스트리아령을 가르는 경계를 넘었다. 50만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도강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개판이로군.”

정기호가 신랄하게 말했다.

박격포 포구를 강물에 처박고 질질 끌고 다니는 크록 전사들을 보며.

본분을 잊고 물장난까지 치는 놈도 보인다. 물 만난 크록이라는 말을 여기서 쓰면 될 것 같다.

그래, 질서정연하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다. 그보다는 자유분방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제식훈련을 시킬 만큼 여유가 있었던 건 근위전사 한정인지라.

그니르의 군대는 아직 집결이 끝나지 않아 우리를 저지하지 못했다.

듣자 하니 그쪽은 우리보다 더 오합지졸이라는 것 같았다. 돈 많은 영지를 끼고 앉아 질펀하게 마시느라 합류가 늦어진다는 첩보도 들어왔다.

명색이 군인이라는 것들이 왜 통제가 되지 않느냐.

기강이 해이한 것도 이유이나, 문화의 차이도 존재했다.

에신인들은 조직의 힘을 신뢰하지 않았다. 뛰어난 개인이 집단의 힘을 찍어 누르는 걸 보아왔으니까.

아무리 구령 소리가 크고 오와 열을 잘 맞추면 뭐 하냐고.

짝다리 짚으면서 담배나 피우는 망나니한테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가면.

티에말령 초입에 위치한 도시는 녹스 시였다. 녹스의 영주는 우리 군대가 지평선에서 머리카락을 드러내자마자 항복 깃발을 높이 올렸다. 혹여 내 시력이 나빠 보지 못할까봐 평지거인 사이즈로 만든 거대한 깃발이었다.

우리는 훤히 열린 성문을 거쳐 개선군처럼 입성했다.

스트리아와 달리 티에말은 부유한 영지였다. 녹스 시는 심지어 성문틀까지 금으로 치장해두었다.

기실 대부분의 영지가 스트리아보다는 돈이 많았다.

스트리아는 덥고 습하고, 나무밖에 잘라다 팔 게 없는 벽지인지라 웃통 까고 돌아다니는 다가트의 전사들 말고는 내세울 게 없거든.

“거룩하신 질서의 수호자, 에신의 유일하며 정당한 지배자, 위대하고 강력한 에사인 라힐 님이시여, 녹스에 오신 걸 진심을 담아 환영하십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중년 남성이 수행단을 끌고 와 내게 예를 표했다.

그나저나 인사말 읊다가 숨넘어가겠다. 내 사제들도 저렇게까지 날 추켜세우지는 않는다.

“반갑다, 라힐이다.”

“미천한 제 이름은 로드릭 녹스라고 합니다. 녹스 가문은 조상 대대로 이 땅을 공정하게 다스려왔으나, 하는 일이라고는 세금 걷어가는 것밖에 없는 무능한 황제 패거리들이 무리하게 돈과 병사를 요구하는 통에 근래 급격히 세가 기울고 말았습니다. 라힐 님께서 그 간악무도한 자들에게 따끔한 본보기를 보이시리라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작자는 내가 인간 거짓말탐지기라는 걸 모르나 본데.

방금 그 짧은 대사에서 거짓말이 두 번이나 탐지되었다.

이 땅을 공정하게 다스려왔다, 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황제에게 돈을 뜯겨 서글프다는 대목 말고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는 대사였다.

“날 믿는다니 다행이로군. 이렇게 훌륭한 도시를 태워버리고 싶진 않으니.”

“하하......”

로드릭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방울이 흐르는 게 보인다.

그에겐 농담을 가려들을 만큼의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그 정도 충정이라면 내 병사를 먹이는 덴 아무런 불만이 없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가 내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하온데 데리고 오신 군대의 숫자가 어떻게 되는지...”

“보급부대까지 합치면 50만 정도 된다.”

“녹스에는 얼마 동안 머무르실 계획이신지요.”

“그건 상황을 봐서 판단하겠다. 지금으로서는 기약이 없다고 봐야지.”

찰나지간 그는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볼살이 투르르 흔들리며, 입꼬리가 바들바들 경련을 일으켰다.

경제관념이 아주 확실한 영주 같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에사인 앞에서 지갑사정 쪼들린답시고 분노하는 걸 보면.

명나라 시절 변방 야만족에게 점령당한 지방관 심정이 딱 이렇지 않았을까?

남쪽 정글에서 기어올라 왔으니 우리 포지션은 흉노는 아니겠고, 남만쯤 되시겠다.

정부에서 군대를 보내기만 하면 금방 소탕될 잡것들이 주인 행세를 하며 곳간을 털어가니 환장한다는 거지.

“일단 궁으로 드시죠. 녹스는 쾌락과 환희의 도시입니다. 라힐 님과 용맹한 장수 여러분들을 접대하기 위해 영지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성심껏 만찬을 준비해두었습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볼 수도 없는 아름다운 시중인들도 종족별로 갖추어두었습니다.”

“잘 됐구나.”

이건 우르술라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옆에서 가만히 듣다가 아름다운 시중인이라는 대목에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난 내 형제들이 절제하는 삶을 사는 게 항상 불만이었다. 내가 가르친 절제란 침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자제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라힐, 너라면 내가 뭘 말하려는지 알지 않을까?”

“누님, 농이 과하십니다.”

나는 감정을 살짝 실어 항변했다.

전생에서 난 숫총각이었거든.

나도 지금껏 누님이 가르친 절제가 그런 의미인 줄로만 알았다. 욕망을 극한까지 제어해야만 훌륭한 암살자가 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고.

어차피 전국에 지명수배가 내려진 몸이라 한가하게 연애질이나 하고 돌아다닐 수 없는 입장이긴 했지만.

“틀림없이 만족하실 겁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것은...”

“그만, 됐다.”

나는 손을 뻗어 로드릭의 말을 가로막았다.

“밥 제때 주는 게 네가 할 일의 전부다. 우린 이만 돌아가겠다.”

“돌아가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말이냐?”

“병사들은 성 문턱도 넘지 못하고 천막에서 먹고 자는데, 나만 편하자고 황금 궁에 머물 순 없잖습니까.”

“신기한 발상이로구나. 너는 에사인이다. 네겐 만인의 위에 군림할 자격이 있어.”

“내가 에사인이라면 날 따를만한 이유를 만들어줘야겠지요.”

나는 측근들에게 고갯짓으로 성문을 가리켰다. 그만 나가자는 의미로.

“그리고 로드릭.”

“예, 라힐 님.”

“혹시 자식이 있나?”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아, 아들 없이 딸만 셋을 두었습니다만 아직 남자를 알기에는 너무 어린지라...”

“제일 나이가 많은 아이를 보내라.”

나는 그가 오해를 살 말을 더 늘어놓기 전에 사전 차단에 나섰다.

“네 자식은 네 충심의 증표로 여겨질 거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혹여 전투가 벌어진다면 돌려보내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큰애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똑똑하고 말주변이 좋은 아이라 마음에 드실 겁니다.”

한국인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웬 야만적인 짓이냐 싶겠지.

점령지 책임자의 아들딸들을 볼모를 잡는 행위는 역사서에서나 접해봤을 테니까.

나조차도 한국에서 먹은 먹물 때문에 심리적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 세계가 혈통만이 전부고, 마법과 주술로 치고받는 야만의 시대라는 걸 잊지 말도록 하자.

영주가 미쳐가지고 자기 궁에다 황실과 직통하는 포탈이라도 열어버린다면 하루아침에 좆 되는 거라고.

때문에 결정권한을 가진 귀족들은 허튼짓하지 못하게 자식을 볼모로 잡아두고, 마법사는 모조리 신원을 파악해서 감시해야 한다.

그게 이쪽 점령전술의 기본이다.

나는 숙영지로 돌아와 내 텐트에서 끼니를 때웠다.

오늘 메뉴는 한국에서 공수해온 봉지라면이었다.

라면 시식은 모든 장병들이 볼 수 있도록 막사 바깥에서 했다.

안다, 구리다는 거.

계절만 되면 나타나는 망둥어처럼 정치인들이 선거철에 서민 코스프레하는 모습, 나도 극혐해왔거든.

하지만 나는 병사들에게 내가 그들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적의 오장육부를 뒤집어쓸 각오도 되어 있다. 그 마음을 표현하는 소품이 이 라면 한 그릇이라는 건데.

이게 코스프레에 그치기만 하면 흔해빠진 정치인이 되고 마는 거고, 깃발 들고 앞장서서 적진으로 달려 나가면 에사인이 되는 거고.

“제대로 익었군.”

정기호가 냄비를 하나 가져와 내 옆에 앉았다. 그의 냄비는 사이즈부터가 남달랐다. 과장 조금 보태서 방패 대신 써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냄비에 가득 담긴 라면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먹방 찍으러 왔냐?”

“배가 든든해야 싸움도 하는 거다. 그게 챔피언의 비결이라고 말해두마.”

“너 아직 챔피언 타이틀전 안 치렀잖아.”

“이미 내 꺼나 다름없다.”

“글쎄, 그건 챔피언 입장도 들어봐야 할 거 같은데.......”

우리는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라면을 흡입했다. 나는 곧 정기호의 냄비에까지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무릇 지도자라면 휘하 장군의 짐을 덜어줄 줄도 알아야지.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내 작은 쇼에 감명을 받은 건 아닐 테고, 누군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인물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은빛 머리카락을 허리 어림까지 늘어뜨린 귀족 소녀가 일단의 수행원들을 거느린 채 나타났다.

그녀의 외모에 대한 표현은 생략하도록 하자.

혈통에 따르는 아름다운 외모는 이쪽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지라.

그보다 나는 그녀가 도대체 저 작은 체구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보석을 달고 있는지가 더 신기하다. 저걸 다 처분하면 족히 아파트 두어 채 값은 나올 거 같은데.

나와 정기호는 젓가락질을 멈춘 채 소녀를 쳐다보았다.

당연하지만 내 사람 중에는 이런 고귀한 족속이 없다.

“네가 로드릭 녹스의 딸이겠군.”

“실로 야만적이군요.”

그녀가 코를 쥐며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이교도들이란 어찌 하나같이 불결하고 예의를 모르는지.......분명 라힐 님의 숙소로 안내를 해달라고 했건만 여긴 도대체가.......”

소녀가 손사래를 치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녀는 아직 내가 에사인이라는 걸 모른다. 갑옷을 걸치긴 걸쳤으니 끽해야 장교쯤으로 여길 거다.

“라힐을 찾는다면 제대로 왔다만.”

“그리고 거기 그것.”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아직 비우지 못한 라면 그릇을 가리켰다.

“시종들이 키우는 짐승도 그런 잡스러운 요리는 먹지 않겠습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저는 결단코 당신들 이교도들의 음식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겠습니다. 혹여 강요한다면 아버지께 낱낱이 고해바칠 겁니다.”

“취향은 존중한다만, 라면을 모욕하는 건 선 넘었는데.”

나는 정기호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연덕스레 맞장구를 쳤다.

“사실이다. 라힐은 모욕해도 되지만, 라면을 모욕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아니, 그건 너무 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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