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77화
약진 (4)
그래, 에사인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지.
그런 주제에 수많은 업을 꾸역꾸역 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의 방식에 저항감을 느낀다. 무한한 힘과 권력이 나를 황제와 똑같은 놈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이네스의 유리알같이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화이트모카처럼 영혼이라도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래, 까짓거.”
나는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흉신의 존재의의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때도 됐지. 이 땅에는 인류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에사인이 너무 많으니.”
“바로 그거야.”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쉽진 않을 거야. 지금까지 내가 가르쳐준 모든 비술을 합친 것보다 수백 배는 어려운 술식이니까.”
“쉬울 거라고 기대도 안 했다.”
“게다가 내가 가르치려는 건 변형술식이거든. 기존의 것을 네게 어울릴만한 형태로 비틀었기 때문에, 좀 더 난이도가 높지.”
“그냥 원래 술식을 배우면 안 되고?”
“그건 네가 쓸 수 없어.”
“왜?”
“네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 테니.”
“아하.”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사술이라는 의미였다.
대통령이라는 놈이 닭 피 뒤집어쓰고 굿판이나 벌이고 있으면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말겠지.
이리하여 이네스는 내 가정교사가 되었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겠냐만.
UA 영사 모리스는 몇 시간 뒤에 의자에 실린 채 지휘본부에 도착했다. 의자에 달린 바퀴 회전축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영사의 도착을 앞서 알렸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모리스는 군복을 입은 채였다. 그녀의 변화무쌍한 패션은 영사다운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서, 나는 이게 AI의 결함일지, 아니면 서양인 특유의 조크일지 잠깐 고민해보았다.
돈을 걸라면 전자에다 걸어보고 싶긴 한데.
“본론으로 들어가지. 모리스탄이 멸망했다는 소식은 알고 있나, 영사?”
“멸망하진 않았습니다. 그에 준하는 타격을 입긴 했지만, 지도부가 살아남았고 모국이 건재하니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습니다.”
모리스의 모니터가 바뀌었다. 폭격을 당한 듯 불타는 도시와 벌겋게 물든 하늘이 송출되었다.
광케이블을 깔아둔 것도 아닌데, 이 깡통은 어째 불가능한 일이 없단 말이지.
“어쩌다 모리스탄이 그 지경까지 간 거냐? 황제의 권능이 어떤 종류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
“이 앵글은 파괴된 도시를 저희 측 기자가 촬영한 겁니다. 전투 당시 상황을 찍은 카메라는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강한 물리력과 공간을 전이하는 힘 정도가 저희가 알아낸 전부입니다.”
“강한 물리력이라.......”
나는 모리스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사이에도 화면은 휙휙 바뀌는 중이었다.
흉물스럽게 철골을 드러낸 콘크리트 잔해, 반으로 깔끔하게 갈라진 아파트, 박살 난 포진지가 순차적으로 표시되었다.
강한 물리력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겠다. 마법만으로는 아파트를 저렇게 깔끔하게 자르는 게 불가능했다.
“혹시 황제가 무기를 다루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특이하군. 황제의 권능은 정신계열 쪽일 줄 알았는데.”
“우리에게 보인 모습이 그의 전부가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 월터 뭐시기인가 하는 양반은 황제하고 수를 겨뤄보기도 전에 내뺀 건가.”
“총독께서는 한 번의 전투에 모든 걸 걸 수 없다고 전술적인 판단을 내리신 듯합니다.”
“네 전술적인 판단은 어떻지? 아직도 천하삼분계가 유효한지 궁금한데.”
“물론 유효합니다.”
모리스가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으니 두 가지 요인이 추가적으로 갖춰져야 합니다. 첫째는 공화국이 적시에 황국을 견제할 것.”
“첫 번째 조건부터 물 건너갔구만. 미치지 않고서야 혼자서 나라를 때려 부수는 괴물과 싸울 수 있을 리 없지.”
“그러려고 군대를 소집하신 거 아닙니까?”
“내 신도들을 탄압한다기에 항의차원에서 불러뒀다. 서한을 보내놨으니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
“공화국 군대는 황국의 땅을 무단으로 점령했습니다. 이런 일이 그냥 덮어질 리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정 안 될 것 같으면 머리라도 숙여야지, 어쩌겠어.”
모리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드디어 저 낯짝이 당황하는 꼴을 보는구만.
그래, 네가 아무리 잘났어도 황국으로부터 방금 날아온 답신 내용까지 알고 있진 못할 거다.
“말장난을 하시는군요. 공화국은 이미 황국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명료합니다.”
“혹시 그 명료한 상황에 항복이란 옵션도 있나?”
“.......”
모리스가 나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녀에게 영혼이 깃들었다는 화이트모카의 말이 떠오른다.
미안한걸, 나는 2D 여성에게 감정이입을 잘 못하는 편이라.
“뭘 원하시는 겁니까?”
“뭘 원한다기보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거다. 내 병사들이 아무리 강하고 충성스럽다지만, 50만이나 되는 군대를 유지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거든. 월급 줘야 되지, 밥 먹여야 되지, 게다가 밥만 준다고 군대가 굴러가나? 신무기도 개발해야 해, 사기를 유지하려면 여론도 관리해야 하고...”
“한화 50조.”
모리스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병사 한 명당 전투수당 1억, 전사자 수당 3억씩 지급하겠습니다. 베트남 전쟁을 참고하신다면 이게 얼마나 후한 조건인지 아실 겁니다. 덧붙입니다만 사무국에서 의결된 사항이라 일체의 협상이 불가합니다.”
이걸 이미 의결까지 해뒀다고?
UA에도 머리 돌아가는 놈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우리가 삐딱선을 탈 걸 대비해 시나리오를 짜둔 걸 보면.
“우리도 어엿한 비상임이사국일 텐데. 매번 그런 건은 우리만 빼놓고 멋대로 정해버리는군.”
“우선 거리가 멉니다. 모든 회원국이 전쟁을 치르는 중이기도 해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중입니다.”
“실시간으로 소통할 때는 언제고?”
“그래서 두 번째 요건은 라힐 님께 먼저 동의를 구하고자 합니다.”
“말해봐.”
“전술핵의 사용을 동의해주십시오.”
“...진심이냐.”
순간 귀를 의심했다. 모리스가 인간이었다면 멱살이라도 잡았을 것이다.
“황제의 비상식적인 무력에 대응할만한 무기는 핵무기뿐입니다. 수십억 인민의 해방을 위한 불가피한 수단입니다.”
“핵무기는 인민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떼로 죽이는 무기일 텐데. 죽음이 곧 해방이라는 말장난은 아니겠고.”
“핵무기가 민간인 사상자를 유발하는 건 맞습니다. 방사능 등 2차 피해도 심각하지요.”
“그걸 알면서?”
“인류는 2차 대전 끝물에 핵무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했습니다. 비인도적인 수단이었다며 지금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당시 일본은 연합군의 거듭된 항복권유를 거절하며 ‘1억 옥쇄’라는 말을 공공연히 떠들었습니다. 1억 옥쇄란 문자 그대로, 국민이 모조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연합군은 만약 전쟁이 점령전 양상으로 흘러갔다면 족히 수백만의 사상자가 더 나왔을 거라고 분석합니다.”
일본군의 고집에 대해서는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원래는 원폭도 한 발로 끝날 일이었다던가.
도시 하나가 날아갔는데도 맞을 만하다며 허세를 부려서 두 번째 폭탄이 투하됐을 거다.
“압도적인 화력을 선보이자는 거군.”
“모리스탄이 일격을 당한 것 때문에 황제에 대한 황국민들의 충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간 수많은 장병의 목숨을 바쳐 간신히 황제의 카리스마에 대한 의문을 싹틔웠는데, 그 모든 희생이 단숨에 허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고 만 겁니다. 전투에서 한두 번 이기는 정도로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힘들게 되었지요.”
“대안은 핵무기뿐이고?”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 황국민들의 마음을 꺾어놓지 못한다면 1억 옥쇄가 아니라 10억 총옥쇄의 참상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10억 총옥쇄.
농담으로 들리지가 않네.
종교에 빠지면 약이 없다지.
황제교에 빠진 이들의 신심은 맹목 그 이상이다. 일곱 권능의 힘을 입어 삶이 바뀐 자들이 부지기수거든.
내가 난민출신 전사들을 용병으로밖에 쓰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금이야 자기 삶이 고단하니 아쉬운 말을 안 하겠지.
황제가 다시 사람들의 앞에 나서 통치행위를 시작한다면 입 닦고 입장 바꿀 자들이 태반이라고 본다.
“어쩌시겠습니까? 비상임이사국 수반으로서 공화국의 입장을 표명해주시죠.”
“나 혼자 독단으로 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우선 의회의 의견부터 수렴해보겠다.”
“이것만은 알아두시길. 핵무기 사용에 동의하는 것이 재정적 지원의 조건입니다.”
모리스 대사가 물러났다.
나는 즉시 장군과 참모들을 불러 그녀의 제안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핵무기가 뭔지 이해 못 할 에신 출신들을 위해 시청각 자료까지 곁들여가며.
그녀가 던지고 간 화두는 우리 진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우린 힘이 전부인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의를 부르짖다 역사서에 한 줄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수많은 나라들을 돌이켜보라. 이상도 이념도 이기고 나서 생각할 일이다.”
우르의 의견이었다. 에신 출신 참모들은 대부분 우르와 생각을 같이했다.
“세계 2차대전 같은 참극은 아직 벌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발생하지도 않은 피해를 상정해서, 단지 겁을 주자는 용도로 무고한 수십만 시민의 목숨을 희생시키자는 소립니다. 공화국이 급변하는 국제사회를 선도하는 리더가 되고자 한다면 그런 오점은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막시무스처럼 전적으로 나를 따르겠다는, 상황판단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의견도 다수였다.
참고로 막시무스의 자칭 라이벌인 크롱크는 찬성파였다.
“제 생각에는 핵무기는 위대하신 분의 위엄을 나타내기에 제격인 것 같습니다, 큼.”
크롱크는 좁쌀만 한 눈으로 핵무기가 거대한 버섯구름을 피워 올리는 사진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우리도 당장 똑똑한 인간들을 부려서 핵무기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쟁이 끝나도 그런 무기를 가진 것들에게 꿇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큼.”
핵탄두 숫자로 군비경쟁을 벌이던 냉전시대를 재현하자는 말이었다.
나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양쪽의 의견 모두를 들어보았다.
이로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구색은 갖춰졌다.
“결론을 내리지.”
장군들, 참모들, 기라성 같은 강자들이 내게 시선을 모았다.
“UA는 지금껏 우리를 한 번도 존중해준 적이 없지. 우리의 동의를 받겠다는 건 요식적 행위에 불과하다. 어차피 우리가 동의하지 않아도 쏠 무기는 쏘아진다. 때문에 우리는 이번만큼은 그들의 장단을 맞춰준다. 원하는 걸 주고, 얻어낼 건 얻어낸다.”
측근들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쯤에서 크롱크를 쳐다보았다.
“아까 우리도 핵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큼.”
“그럴 필요가 없다. 핵무기를 쓰려는 이유가 황국민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핵이 없어도 황국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걸 세계만방에 보여준다. 우리는 현 시간부터 독자적으로 작전에 돌입해, 최단기간 안에 그니르를 무찌르고 남부를 점령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