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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76화 (176/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76화

약진 (3)

“골렘.......”

나는 기계의 이름을 나직하게 읊조려보았다. 중장갑에 감싸인 결전병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어감이었다.

“보시는 차체는 프로토타입입니다만, 당장 실전에 투입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성능이 올라와 있습니다. 다만 생산에 정밀한 마법적인 공정이 필요하니만큼 양산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양보다 질이 우선이니까요.”

“밤낮으로 작업에 매달리면 사흘에 한 대꼴로 출하할 수 있을 거다. 전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다만, 골렘을 더욱 업그레이드하고 충분한 물량을 확보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전방 상황이 어찌 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라면 어떻게든 끌어보겠습니다.”

골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시간을 최대한 끌어야만 했다. 황제의 힘을 약화시키지 못한다면 필패할 것이기에.

나는 다시 포탈을 타고 스트리아로 돌아가려다,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한 걸음만 내디디면 스트리아로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엘리시아가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전에 종군을 허락해달라는 청을 올린 바 있는데, 기억하실런지요. 그때 위대하신 분께서는 출병 전까지 시일이 남았으니 고려해보시겠다고 말씀해주셨지요. 이제 그날이 왔으니 다시 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녀가 검을 땅에 꽂아 넣으며 무릎을 꿇었다.

“저 엘리시아 마르밀, 공화국 국민의 자유를 위해 육신의 쓰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부디 허락해주시기를.”

“진소미가 군을 이끌 텐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진소미 님은 공화국을 받치는 기둥이십니다. 그분을 멀리하는 게 가능할 리도 없고, 그분의 판단이 잘못될 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제 역량을 다해 그분께 쓸모를 보일 따름입니다.”

엘리시아의 각오가 느껴졌다.

그녀는 피해가기보다 정면승부를 택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종군을 허락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국민의 대표자라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정부를 견제해야 할 야당대표가 내 명령으로 전선에 나가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일은 결코 벌어져선 안 되겠지요. 때문에 저는 당신에게 후방 보급부대의 호위를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영예가 덜할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따르겠습니다.”

엘리시아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지휘본부 주변은 마치 새둥지 같았다.

수백 명의 비익족 정찰병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통에 흰 깃털이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에 휘날렸다.

우리는 먼 거리를 효율적으로 정탐하기 위해 남부전선 지하 곳곳에 포탈을 매설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남의 땅에 개구멍 뚫기.

나브니가 써먹었던 전술의 응용이었다.

“대충 적의 윤곽이 나왔어.”

이네스가 얇은 서류를 입에 문 채 지휘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방대한 정보량과 정보분석기능을 높이 사 참모로 차출되었다.

“그니르의 직속 사제단과 전사단의 수는 30만이야. 그를 따르는 영지군이 50만, 도합 80만의 군대가 티에말령에 집결 중이고.”

“.......예상보다 적네.”

스트리아령 하나에서 뽑아낸 군대만 30만인데, 그니르의 차출에 응한 영지군의 숫자가 적어도 너무 적었다.

“전쟁이 너무 장기화되어서 남아나는 영민들이 없나 보지.”

“아니면 그니르의 리더십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겠고.”

“영지군은 숫자만 많지 오합지졸이라고 봐. 그러나 나머지 30만이 성가시겠지. 종교가 사람을 어떻게 미치게 하는지는 잘 알 테니.”

“신심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아.”

“네가 신경 써야 하는 건 아버지의 동향이다, 라힐.”

우르가 끼어들었다. 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모리스탄을 멸망시킨 후 아버지의 행적이 묘연하다. 아마 다시 황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겠지. 밖을 나다녔으면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니까.”

“하루아침에 일개 국가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남자가 왜 다시 황궁으로 돌아갔을까.”

“나도 그게 의문이다. 아버지의 의중을 알아내기 위해 누님과 꾸준히 연락을 하는 중이다.”

우르의 누님이라면 일황녀인 라티카 게네발이다.

내가 라티카에 대해 주워들은 건 부하들이 물어다준 단편적인 정보가 전부였다.

그녀는 삼상회의 일익을 이끄는 거대한 파벌의 수장이며, 이번 사태 이전부터 우르를 알음알음 도와줬다고 한다.

“더 시급한 문제도 있어.”

이네스가 물고 있던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뭐냐, 이건?”

“인류의 빛과 소금.”

서류를 열어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머리가 아찔해지는 천문학적인 숫자들이었다.

“...설마 돈이냐?”

“그래. 넌 우리가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우리에겐 장기전을 수행할 만큼의 재원이 없어. 크록 전사들을 일터에서 끌어낸 것 때문에 한창 물이 오르던 내수산업이 치명타를 입고 말았지.”

“하지만 예산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 않냐? 올해 확보한 예산이라면 내년까지 충분히 버틸 텐데.”

“네 판단이 옳아. 장부가 똑바로 기재되었다면.”

“........욕해도 되냐?”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김형식 총리의 비리가 그저 기업과 짝짜꿍해서 이권을 팔아넘기는 수준에 그치지 않은 모양이지.

그가 데려온 엘리트들은 정부주요직을 꿰차고 예산안을 입맛대로 편성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지 검증하고 싶어도, 회계 같은 전문분야를 섣불리 건들 수 있어야 말이지.

덕분에 그들은 나 이상의 권능을 손에 넣었다.

죽은 자도 살린다는 최고의 권능, 금권을.

그동안 얼마나 내가 우스웠을까?

면전에서 적당히 비위나 맞춰주면서 얼마나 날 같잖게 보았겠냐고.

그의 바람대로 감사원도 자기 인물들로 꾸리는 데 성공했다면 세상 거리낄 게 없었겠다.

“황국은 횡령죄를 두 손을 잘라 벌한다.”

우르가 참고하라는 듯이 조언했다.

“우린 아니야. 법과 절차는 존중해야지.”

“이 엄중한 상황에서도 말이냐?”

“엄중하니까 신법으로 벌하겠다는 소리다. 정보국장에게 가서 전해. 전임총리와 그 끄나풀들을 즉시 구속하고, 여죄를 낱낱이 캐서 보고를 올리라고. 만약 공화국 밖으로 도망친 놈이 있으면 납치를 해서라도 데려와라. 연루된 놈들의 재산은 모조리 동결조치하고, 기업에게 넘어간 이권도 환수하라고 해.”

납치를 해서 신병을 확보하라든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재산을 동결하라는 조치는 명백히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한다.

기업에게 이미 넘어간 이권을 막무가내로 되돌리겠다는 것도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이러라고 신법이 있는 거 아니겠어.

인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일을 신속히 밀어붙이라고.

“처벌은 그렇다 치고, 부족한 재원은 어떻게 충당하나?”

“그 잡놈들 재산을 전부 국고로 돌린다면 어때?”

“어림없지. 보름이면 녹아 사라질 거다.”

“한국 상황은? 우릴 도와줄 수 있을까?”

“그쪽도 사정이 여의치 않다. 레임덕에 대선 레이스까지 겹쳤거든. 박병철 장관이 당선되고 나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반년은 더 기다려야 하니까.”

“그럼 UA뿐이겠네.”

“내 생각도 그렇다.”

우르가 긍정적으로 말했다.

“UA도 급할 거다. 모리스탄이 하루 만에 날아갔다는데 한가롭게 정치적 손익이나 따질 여유가 없겠지. 황국의 뒤통수를 후려 준다고 하면 돈을 달라는 대로 주지 싶다.”

아직 우리는 황군과 교전을 벌이지 않았다. 다소간의 굴욕을 감수한다면 지금이라도 모든 걸 없던 일로 돌릴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 편이든 들 수 있다는 거.

그게 현재 우리가 가진 최대의 무기였다.

“모리스 대사를 불러와. 일 초라도 빠르게.”

카둔을 만나러 갈 때 썼던 포탈이 아직 그대로 열려있다. 잠을 잘 필요가 없는 깡통이라 가서 데려오기만 하면 될 거다.

우르가 방을 떠나자 본부에는 나와 이네스만이 남았다. 이네스는 내게 시선을 떼놓지 않으며 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초조해 보이네, 너답지 않게.”

“초조할 수밖에 없지. 그 황제가 전면에 나섰으니.”

“예언 때문일까?”

예언.

차마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한 부분이다.

선지자 아바르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새로운 예언을 내리기 위해 황도로 떠났다.

그녀가 어떤 비전을 보여줬는지는 모를 노릇이나, 황제가 칩거를 깨고 난데없이 실력행사에 나선 게 그것과 전혀 무관하진 않을 터.

“예언 같은 건 고민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지. 내가 궁금한 건 내 검이 황제에게 닿을 수 있을지 여부다.”

“닿을 수 있겠어?”

“아니.”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직 한참 멀었다고 느껴진다. 계획대로라면 좀 더 수련을 하고 전쟁을 벌였어야 하는데.”

“수련이라면 지금도 늦지 않았잖아.”

“네가 가르쳐준 정신계 방어술은 요긴하게 써먹고 있지. 하지만 황제와 내 간극은 단숨에 메울 수 있을 만큼 얕지 않아.”

“즈라즈.”

이네스가 큼직한 눈망울을 천천히 깜빡이며, 말라붙이 씨족장의 이름을 꺼냈다.

“그가 영혼을 흡수하는 비술을 자기 기억에서 지워버렸다던데, 사실이야?”

“그래, 내가 직접 확인했지.”

“그러면 내가 하나의 중국의 진짜 모습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가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즈라즈의 동족은 자살을 선택했다며. 죄책감 때문에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이네스, 너 혹시...”

“걱정하진 마. 우린 이제 완전히 갈라져서 생각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전부 다르니까. 나는 그들의 희생을 이해하려 노력하겠지만,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그들의 희생이 이해되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주술이 자아낸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집단자살극을 벌이고 기억을 말소하다니.

정녕 그게 최선이었을까.

머리를 맞댄다면 더 좋은 방법이 나오지 않았을지.

“나는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다고 여겨.”

이네스가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도구가 나쁜 게 아니야. 도구를 쓰는 사람이 나쁜 거지. 칼도 마찬가지야. 누군가에겐 흉기가 되지만, 내 손에 들리면 음식을 조리하는 유용한 물건일 뿐이니까. 마찬가지로 아무리 사악한 주술이라도 그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써야만 하는 상황에 한정해서 사용한다면? 그 결과로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나쁜 일에 전용될 수 없도록 우리가 철저히 감시한다면?”

“그걸 대체 누가 확신할 수 있겠어.”

“넌 확신할 수 있잖아.”

“뭐?”

“도구를 제어할 자신이 있어서 만든 게 신법 아니야?”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네스는 나더러 하나의 중국처럼, 영혼을 흡수해서 강해지라고 권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은 인간으로서 넘봐선 안 될 금도였다.

“이네스, 나는 네 조언을 존중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해선 안 될 말이 있다. 나는 환생을 경험한 사람이다. 설령 이생에서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라도 윤회를 거듭하며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걸 안다고.”

“그러면 윤회하지 않는 영혼을 먹으면 되겠네.”

“대체 그런 영혼이 어디에...”

“있잖아.”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내 가슴을 가리켰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조심스럽게 벌려지며, 소리 없이 이름 하나를 만들었다.

그니르.

“에사인은 불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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