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75화
약진 (2)
“아무래도 놀라야 할 타이밍인 것 같군요.”
“하지만 너는 놀라지 않는 것 같구나.”
“그 사람이 지금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었죠. 요행에 기대서 치를만한 전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책도 있는 것일까?”
“예, 있습니다.”
“호오.”
우르술라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감탄했다.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시죠. 설마 제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국민을 사지로 밀어 넣겠습니까?”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알지만, 이런 압도적인 힘 앞에서 대책을 세운다는 게 가능한 일이더냐.”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당연히 승산이 없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그를 약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의 압도적인 힘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서 나옵니다. 어쨌거나 그 또한 에사인이니까요. 황국민들에게 황제가 그들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걸 납득시켜야 합니다. 설령 그가 외적들을 물리친다 하여도 당신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게 해줘야죠.”
“명분을 쌓는 것이 하나의 전술이라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일리는 있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겠느냐. 너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적대적인 국가에 첩자를 보낸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야.”
“버텨봐야죠. UA와 다르마알을 방패막이로 삼아가며.”
“그놈들이 순순히 응해줄까?”
“물론 그들도 다른 나라의 출혈을 강요하기 위해 몸을 사리겠죠. 하지만 낙장불입입니다. 이미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황국과의 전선을 열었습니다. 황국에 끼친 피해도 훨씬 크고, 군대도 더 많이 보유했습니다. 황제는 그들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관심을 주기 어려울 겁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자부했다.
나마저 흔들리면 시작해 보기도 전에 망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수많은 번민을 가슴에 묻었다.
모리스탄 총독은 대단한 강자였다. 그가 이끄는 모리스탄도 영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강호였고.
까마득한 세월 동안 불문에 부쳐졌던 황제의 권능이, 멀쩡한 나라를 하루아침에 파멸시킬 정도로 강할 줄이야.
“이번 전쟁에서는 누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님은 정보국 수장 이상의 역할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건 어떤 재미있는 일일까.”
“정보국 요원들을 총동원해서 누님이 공화국을 떠받치는 세 명의 에사인 중 한 명이라는 걸 널리 알려주시죠. 에사인을 한 명이라도 더 늘려야 승산이 있을 테니까요. 저는 작업하시는 동안 누님을 신법의 적용대상으로 지정하는 입법을 완료해두겠습니다.”
우르술라의 새카만 눈동자가 나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너는 참으로 이상한 놈이다, 라힐.”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까 곤충 한 마리가 널 만나고 가지 않았더냐.”
“누님, 그분은 곤충이 아닙니다. 즈라즈라는 이름을 가진, 어엿한 공화국 시민이죠.”
“국적이 어쨌건 다리가 다섯 개 이상이면 곤충이다. 하여간 그놈은 다른 존재의 영혼을 흡수하는 비술을 알고 있지 않겠느냐.”
“그랬습니다만, 이제는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까 잠깐 보니 그놈은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더구나. 분명 비술을 십분 활용한 결과겠지. 네겐 익숙한 모습이 아니더냐? 너는 울토르의 영혼을 흡수해서 한순간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는 힘을 손에 넣었다. 너는 분명 그런 식으로 단숨에 강해지는 달콤함을 잘 알고 있을 터.”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왜 그 다리 여럿 달린 것들에게 영혼을 흡수하는 방법을 묻지 않지? 네가 강해지는 게 황제를 상대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자행되는 나라는 제가 생각하는 공화국이 아닙니다.”
“너는 바보다, 라힐. 확실한 방법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가겠다니.”
“바보라서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우르술라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나는 그녀가 배를 잡고 웃는 동안 뻔뻔한 낯짝을 유지하기 위해 의지력을 최대한도로 기울였다.
“이만 가보겠다. 네가 열 배의 보수를 약속했다고 주장하는 머저리가 기다리고 있거든.”
우르술라가 여전히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방을 떠났다. 나는 그녀가 머문 공간에서 한참 동안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일주일의 말미가 지났다. 그 사이 공화국 군대는 요새도시에 총집결을 완료했다.
우리는 이졸데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비익족 전단을 스트리아에 급파하기도 했다.
여드레째가 되자 황국으로부터 답신이 날아왔다. 황제 에신 템의 도장이 찍힌 답신은 우르 황자의 손을 거쳐 내게 전달되었다.
“아버지가 쓴 게 맞다.”
우르가 서신을 넘기며 짤막하게 말했다.
“읽어봤나?”
“날 벌할 때 느꼈던 그 마력이 봉인에서 묻어나오더군.”
황제가 직접 작성한 서신을 받아보는 날이 올 줄이야.
나는 봉인을 뜯고 서신을 가로로 쫙 펴들었다.
- 에신 공화국 대통령 라힐에게 황제 에신 템의 이름으로 말한다.
서신은 일체의 수사 없이 담백한 어조로 시작되었다.
- 아바르에게 네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네가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다는 걸 잘 안다. 이 편지를 네게 전달했을 우르 게네발을 죽이고, 그 목을 가져와라. 그것만이 네 작은 무리가 내 분노를 비껴가는 길이다.
“.......확실히 그자가 쓴 게 맞네.”
“그렇다지 않았나.”
우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목을 잘라오라는 요구를 보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하겠지.
황제는 왜 자기 자식들에게 집착하는 거지?
이건 어딜 봐도 사랑이 아니다, 광기일 뿐.
한때는 그 또한 자식을 위해 뭐든지 하는 부모였다는데.
“부탁이 있다, 라힐.”
“뭔데?”
“나는 그를 내 손으로 끝내고 싶다. 기회가 왔을 때 내 앞을 막아서지 마라.”
“........”
무슨 말이 나오려나 싶었다.
이럴 때는 괜히 부자지간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넌 국회의 신임을 받은 외무부장관이다. 난 행정수반으로서 각료의 자살을 방조할 이유가 없어.”
“난들 죽고 싶어 이러는 게 아니다. 기회가 찾아온다면 결코 내 말을 잊지 마라.”
“정 원한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그 기회는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기회여야 할 거야.”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더 하마. 무슨 일이 있어도 아르세니오를 출전시키지 말아다오.”
“그건 오르기가 이미 말하고 갔어. 수련마법사들 수준이 너무 낮아서 써먹을 수가 없다던데.”
“그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말이 바뀔 수도 있지 않나?”
“약속할게. 아르세니오는 절대 출전시키지 않겠다고.”
“그거면 됐다.”
우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세니오는 애초에 전력 외로 분류된 자원이다. 그러니 그를 출전시키지 말아달라는 청탁은 양심에 거리낄만한 게 아니지.
“아르세니오가 대체 너한테 어떤 의미이기에 그러냐?”
“그는 더럽혀진 내 영혼의 등불이다.”
우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왠지 불안하게 느껴진다. 나는 직업 특성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왔다. 그간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저런 식으로 웃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더라고.
화르륵.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황제의 서신을 태워버렸다. 황제가 우르의 머리를 요구한 건 이제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 되었다.
“나도 네게 부탁을 하지. 선전포고를 받았으니 우리도 응당한 조치를 취할 때가 왔다. 우리는 현시간부로 주어진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황제의 압제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해방하고자 한다. 우리가 가진 외교채널을 모조리 동원해서 이 전쟁의 정당성을 알려다오.”
“그러겠다.”
우르가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건물 밖으로 향했다.
그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떠나기 전 느꼈을 심정이?
예정된 파국인 걸 짐작하면서도, 조국이 전화의 불길에 휘감기라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는 기분.
바깥에는 이미 장군들이 집결해 있었다.
멀리에는 사병들도 구름처럼 운집해 있었다.
황국으로부터 서신이 날아왔다는 게 그들이 들은 전부겠으나,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다들 짐작하는 거다.
“오래 기다렸다.”
나는 짧게 한마디 던진 후 말을 아꼈다. 내게 시선을 부딪쳐오는 수많은 자들을 하나하나 마주 바라보았다.
그들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 내 마지막 망설임을 털어버렸다.
나는 울토르의 대검을 높이 들며, 그들에게 힘주어 선언했다.
“황제를 끌어내리러 가자.”
먹먹한 함성.
천지가 요동치는 듯했다.
이날 크록 군단 20만, 용병 7만, 비익족과 묘인족을 포함한 기타종족 3만, 도합 30만의 대군이 국경을 넘었다.
스트리아령은 일제히 성문을 열어 우리를 받아들였다.
정기호가 우려했던 반발은 없었다. 영주들은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고 이졸데의 편을 들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하니, 30만 군대 앞에서 차마 다른 의견을 낼 엄두가 나지 않았겠지.
황국도 관망만 하지 않았다. 그니르가 남부영지 전체에 대대적인 소집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더불어 그가 대륙 전체에 퍼뜨려둔 직속 사제단이 속속 티에말령으로 결집하는 중이라는 첩보도 날아왔다.
일촉즉발의 시기에 나는 카둔의 긴급한 호출을 받고, 오르기가 연 포탈을 통해 공화국 수도에 들렀다.
“바쁠 텐데 잘 와주었다.”
카둔이 기름때가 잔뜩 묻은 얼굴로 날 반겨주었다.
“아닙니다, 절 부르신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이지.”
그녀가 소매로 코를 훔치며 씩 웃었다.
“드디어 완성하신 겁니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조심스레 물었다.
카둔은 수입해온 K-2 전차를 분해해 새로운 전략무기를 발명했다. 그러나 신무기의 심장이 되어줄 스틸하트를 완성하지 못해 구동에는 실패했었다.
스틸하트란 AI 연구에 영감을 받아 기계에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이 작업을 위해 천재 프로그래머 김인재의 팀이 가세했었다.
“와서 직접 보아라.”
그녀가 이중 삼중의 보안문을 해제하고 나를 공방 안쪽으로 데려갔다.
그곳에 그녀의 작업물이 있었다. 두꺼운 장갑판과 무한궤도를 탑재한 신무기가.
지난번에 봤을 때에 비해 외관상으로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차량 안쪽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열기가 새어나오는 걸 감지했다.
마력이 뿜어내는 열기가 틀림없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의자에 앉아있던 사내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인재였다.
“편히 계십시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제가 느끼는 기운이 필시 스틸하트겠군요.”
“그, 그렇습니다. 다행히 기일에 맞춰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김인재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여전히 대화를 어려워하나, 오늘의 그는 평소처럼 주눅이 들어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카둔이 나설 차례를 가로챌 정도로 의욕이 넘쳐보였다.
“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이름을 짓기 위해 정말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개발보다 더 어렵다고 느껴질 정도로요.”
그가 시도한 건 분명 농담이었다. 카둔이 곁에서 배를 두드리며 웃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위이이잉.......
그가 한 걸음 다가서자, 차량에 저절로 시동이 걸렸다. 전조등이 샛노란 빛을 내며, 상부 제단이 빙글 돌아 나를 향했다.
“다, 다행히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구조체를 정의한 어휘가 있더군요.”
그는 여기서부터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골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