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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74화 (174/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74화

약진 (1)

군대가 일어나기를 기리는 노래라니, 아이돌 앨범 컨셉치고는 너무 나갔는걸.

하지만 낡고 병든 거인을 타도하기 위해 뭉쳐야만 하는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한 선물이 없다.

“그래도 모든 트랙이 절 위한 건 아니에요. 오빠를 위한 노래도 있으니 안심하시구요.”

“팬들이 뭐라고 안 하니? 갑자기 이런 노래를 냈다고.”

“듣기만 해서는 모를걸요?”

“가사가 이런데도 모를 수가 있나.”

앨범 속지에 쓰인 가사엔 전쟁을 의미하는 아주 노골적인 단어들이 들어가 있었다. 적의 심장에 칼을 겨누라든가,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자든가, 거짓된 황제를 끌어내리자든가.

노래 자체는 가요다운 세련된 비트로 작곡되었겠으나, 가사만 놓고 보자면 노동당 주제가가 따로 없었다.

“알아봐주면 나야 더 좋죠. 어차피 언젠가 모두가 알아야 할 일이니까요.”

“...하긴.”

“장군 자리는 아직 유효하죠?”

“당연히 유효하긴 하지만, 왜?”

“왜라뇨, 이렇게 큰 전쟁을 앞두고선 날 두고 갈 생각이었어요? 진소미 이름 석 자를 헌법에 떡하니 박아두고요?”

“그렇기야 한데, 네 사정을 내가 잘 모르니 그렇지. 소속사 입장이나 활동 스케줄이라거나.”

“지금부터 내 무대는 에신이에요.”

소미가 미소와 함께 선언했다.

“앨범작업을 하는 내내 내게 기도하던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집중이 되지 않았어요. 물론 지금까지 팬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아왔죠. 그 사랑이 나란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고요. 하지만, 정말로 내가 받은 사랑에 보답하려면 아이돌로서 노래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내야만 해요.”

나도 공감한다. 그녀를 아이돌에 묶어두는 것만큼 낭비인 일이 없다.

“혹시 엘리시아 이야기는 들었니?”

“네, 당대표가 되었다면서요.”

“말해두지만 나는...”

“그런 여자 때문에 난처해하지 않아도 돼요.”

소미가 개구지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 잘못이 아니니까. 누구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여기가 공화국인 거잖아요.”

“하지만 엘리시아는 전생의 널 죽인 사람이잖아. 정말로 괜찮겠어?”

“전생의 자길 죽인 사람을 외무부장관으로 만든 사람이 할 말은 아니네요.”

“반박할 수가 없네.”

소미가 진짜로 엘리시아에 대한 앙금을 훌훌 털어냈는지, 나는 모르겠다.

조금 집요한 질문을 던져서 그녀의 진심을 알아볼 순 있겠지.

그러나 그건 예의가 아닐 거다.

소미가 돌아온 후 전쟁 준비는 급물살을 탔다.

카둔은 신무기의 제조에 박차를 가했고, 수많은 군단이 편성되어 국경지대로 이동했다.

그러는 와중에 황국으로부터의 답신이 도착했다.

그들은 우리가 불법적으로 스트리아령을 점거한 데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했다.

동시에 군대를 물릴 약 일주일의 말미를 주었다.

그니르가 직접 사과를 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외교적인 수식으로 이런 걸 최후통첩이라고 부른다.

정해진 수순에서 토씨 하나 벗어나지 않은 답신이었다.

“주군, 수석마법사 오르기입니다.”

주어진 말미의 첫째 날, 오르기가 내게 면담을 요청해왔다.

“마법청에서 훈련 중인 수습생들은 아직 전투에 투입하기에는 너무 미숙합니다. 황국의 압도적인 마법전력을 감당할만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카둔 님이 방어마법을 탑재한 신무기를 연구 중인 걸로 압니다만, 때에 맞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저도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카둔 님께서 고려 중인 건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방위수단입니다. 황국을 상대하려면 길레악의 사제들이 구사하는 대단위 정신계 마법에 대한 저항수단이 있어야만 합니다.”

정신계 마법의 무서움은 겪어봐서 잘 알지.

하나의 중국, 욕망의 나브니, 많은 강자들이 상대의 정신을 조종하는 술법을 부린다지만, 그들 중 최고에 군림하는 건 길레악이다.

나도 길레악의 사제들과는 싸워보지 못했다.

그들과 싸울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오래 사는 길이라 배웠거든.

“방법이 없겠습니까?”

나는 우선 오르기의 자문부터 구했다. 뼛속까지 암살자인 내 머리로는 특임조를 보내 마법사 목을 하나하나 따고 다니는 작전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우선 스트리아 대영주 직속 마법병단 모네모에 협조를 요청해뒀습니다. 다행히도 스승님께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조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모네모만으로는 수적 열세가 예상되니 외교부장관님과 함께 방법을 강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석마법사님만 믿고 있습니다.”

모네모는 오르기의 예전 소속부대인, 스트리아 최강의 마법사단체다.

백 년 만의 천재를 자처했던 발카사르가 얼굴마담인.

그들이라면 마법전력의 구색은 갖출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나는 물러가려는 오르기를 쳐다보다가, 무심코 한마디를 했다.

“옷이 바뀌셨군요.”

옷만 바뀐 게 아니었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신수가 훤해 보인다는 감탄이었다.

최근 오르기는 누가 봐도 잘 꾸미고 다니는 편이었다.

게다가 헤어스타일부터 악세서리, 옷차림까지 모든 게 그에게는 익숙지 않을, 한국에서 건너온 스타일이었다.

안 그래도 잘생긴 양반이 각 잡고 힘까지 주면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살란 말이냐고.

“제가 고른 옷이 아닙니다.”

오르기가 황망해하며 손을 내둘렀다.

“그럼 누가 골랐나요?”

“그게.......”

그는 눈을 질끈 감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곧 결혼을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요, 그게 가정법으로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아니, 상대가 대체 누구랍니까?”

“박이나 비서실장님이십니다.”

“아........”

이 아는 많은 것을 내포한 아다.

박이나 실장이 오르기를 점찍은 거야 비밀도 아니지.

똑 부러진 그녀가 오르기를 리드하리라는 것도 어렵잖게 상상이 간다만, 진도가 벌써 결혼까지 빠졌다고?

이래서 요즘 것들이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럼 박이나 실장이 내게 하려다 못한 말이 그거였나.

그녀는 가슴을 졸이고 있던 거다. 머지않아 새신랑이 될 사람이 피와 살이 튀는 최전선에 설까봐.

수석마법사란 직함상 오르기가 설 곳은 사지 중의 사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편의를 봐준다는 오해를 살까봐 연애를 한다는 말조차 않았다고.

“그럼 식은 개선과 함께하겠군요. 미리 축하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오르기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나는 그의 편의를 봐줄 수 없다. 그러는 건 박이나 실장에게도, 목숨 걸고 전장으로 나설 다른 모든 전사들에게도 실례일 테지.

하지만 전장에 선 그를 검으로 지켜주는 건 가능하다.

수석마법사가 사지로 들어갔다면, 곁에는 반드시 내가 함께할 테니.

주어진 말미의 둘째 날, 정보국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보고를 받고 있을 때였다.

김형식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다.

그의 사의는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의 측근 중 한 명의 손을 거쳐 내게 전달되었다.

거동이 불편하여 오늘부로 일체의 공무를 내려놓는다는 내용이었다.

그와 정치생명을 같이하는 고위관료 몇 명이 함께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사표를 즉시 수리했다.

총리가 물러났다는 소식은 저녁뉴스 끄트머리에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되었다.

당분간 비서실장이 총리대행을 맡는다는 뉴스도 함께 보도되었다.

나는 우리가 이로써 괜찮은 결말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정보국에서 캐낼 여죄 중에 선을 넘는 게 나오지만 않는다면.

그날 밤, 나는 뜻하지 않은 방문객을 받았다.

대전 한쪽 통로를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장수풍뎅이였다.

즈라즈.

말라붙이의 씨족장.

말라붙이는 개개인이 하나의 중국의 기억과 능력을 보유한, 공화국의 잠재적인 뇌관 중 하나였다.

사안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전쟁 준비에 온통 신경이 팔려 그들 일을 잊고 있었다.

- 오랜만인걸.

파드드득.

즈라즈는 대답 대신 거대한 등껍질을 펴서 속 날개를 보였다. 아마 저것이 그 나름대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방법인 듯했다.

- 반갑다, 대통령이여. 나는 오늘 씨족의 대표자로서 우리가 의결한 내용을 공화국에게 공식적으로 알리기 위해 왔다.

- 듣고 있어.

- 우리는 고등한 사고능력을 대물림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크록에 대한 연구결과에 고무되었다. 종을 보전하려면 공화국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게 우리가 내린 결론이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결론이었다.

그러나 사념을 통해 전해지는 즈라즈의 정신이 이상하리만치 혼탁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는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슬퍼하는 것 같았다.

- 식구가 된 걸 후회하지 않을 거다.

-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이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데에도 동의했다. 때문에 우리는 술법을 활용해 우리의 지식을 영구적으로 봉인하기로 결정했다.

- 그게 가능한 일이었냐?

-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 어떻게?

-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

- ........뭐?

나는 귀를, 아니, 사념을 해석하는 뇌를 의심했다.

- 네 앞에 선 ‘나’는 ‘우리’ 전체를 다시 하나로 합친 존재다. 이제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되었으니 더 이상 서로를 의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단일화된 의지를 한데 모아 위험한 지식에 대한 기억을 말소했으니, 미래세대가 위협받을 일도 없게 되었다. 모든 게 잘 된 일이지.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

영혼을 하나로 합치는 그 기괴한 주술을 또 썼다는데.

그것 자체만 놓고 보면 꺼림칙한 일이나, 그의 경우는 하나의 중국 케이스와 달리 모든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바랐으며,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결단이었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 ...공화국의 일원이 된 걸 환영하지.

나는 고심 끝에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진실을 간파하는 권능이 아니었다면 결코 내리지 못했을 어려운 결정이었다.

게다가 사념으로 대화를 나눌 때엔 그 사람의 감정 일부가 함께 읽힌다.

즈라즈와 대화를 나누며 나는 그의 고뇌와 비탄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개체로 분리되었던 자들이 하나로 합친다는 건, 조각난 장난감을 다시 맞추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 아니었다.

즈라즈와 의식이 통합되는 순간, 말라붙이를 이루던 개개인은 말소되었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 집단자살을 택한 거다.

그러한 결단을 가능케 했던 건 수백만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말았다는 죄의식이었다.

- 고맙다. 곧 황국과 싸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내 새로운 터전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종군하겠다.

즈라즈는 참전의사를 밝혔다.

그가 물러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르술라가 찾아왔다.

나는 황국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그녀와 매일같이 독대를 가졌다.

여느 날과 다름없을 일정이나, 그녀가 오늘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처음 보았다.

“라힐, 네가 알아둬야 할 소식이 있다.”

“말씀하시죠, 누님.”

“드디어 황제가 움직였다.”

“......정말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북부전선이 무너졌다. 모리스탄이 멸망했다는 소식이다, 황제가 나선지 단 하루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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