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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73화 (173/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73화

기상 (11)

“허락합니다. 스트리아는 이제 내 보호 아래 있습니다.”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졸데가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며 남긴 말이 떠오른다.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이번 일만큼은 명분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순리를 따르고 싶었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일이다. 그 황국과 전면전을 벌이려면 나로서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그러나 날 믿는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탄압받는다면, 나는 세상에 그래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보여줘야만 한다.

“황국에 서한을 보냅시다. 여섯 번째 권능 그니르가 내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걸 강력히 항의하고, 스트리아령을 점거한 건 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음을 통고해야겠습니다.”

“예.”

“삼상회의 늙은이들이 펄쩍 뛰겠군.”

정기호의 말대로다. 이후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수순이 정해져 있었다.

무단으로 땅을 점령당한 황국은 그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취하겠지.

그러나 나는 스트리아를 내줄 생각이 없다. 그니르도 내게 사과할 생각이 없겠고.

결국 두 나라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전장에서 맞붙게 될 거다.

“영주들의 반발이 심할 거야. 하지만 난 이번에는 대회의를 소집하지 않겠어. 그 겁쟁이들과 입씨름이나 하느라 허비할 시간은 없으니까. 스트리아의 운명을 썩어빠진 황국에게 맡길 놈들은 나와 전장에서 만나라지.”

“정말 많은 자들이 떨어져나갈 거다.”

이졸데는 정기호의 우려에 코웃음을 쳤다.

“잘됐네. 언젠가 그것들을 물갈이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대영주님, 듣자 하니 기엔의 영주 라드가 사제단에게 붙잡혀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청년이 영주님을 위해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력이 있으시다면 그를 도와주셨으면 좋겠군요.”

“라드는 제게 든든한 우군입니다. 즉시 요른을 보내 기엔 시를 확보하겠습니다.”

이졸데가 당차게 대답했다.

내가 라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나는 영지로 돌아가기 전 버틀린을 관청으로 따로 호출했다. 본의 아니게 그의 임무에 관여하게 되었으니 매듭은 지어줘야 할 것 같아서.

“부르셨습니까, 라힐 님.”

걸음걸이가 마치 통통 튀는 공 같다.

입꼬리는 내려올 줄은 모르고, 어깨는 최소 십 센티미터는 붕 떠 있는 듯했다.

나와 우연히 엮인 뒤 따로 호출까지 받게 되었으니 행복회로를 돌릴 만도 하지.

나는 속으로 웃음을 감추며 할 말을 정리했다.

“네가 우리 정보국에서 임무를 받고 파견되었다는 걸 안다.”

“역시 라힐 님이십니다. 예, 저는 라힐 님의 위명을 황국에 널리 알리라는 명을 받았지요.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 같아 기쁩니다.”

“정보국으로 돌아가 보고해. 시킨 일을 제대로 마쳤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가 봐.”

버틀린은 당황한 듯했다. 그는 떠나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할 말이 남은 듯 밍기적거렸다.

“왜, 할 말이라도 있나?”

“그건 아닙니다만...”

“그런가, 열 배의 보수를 약속했었지. 그것도 정보국에 청구하도록 하고.”

말이 짧아질수록 그의 얼굴도 흐려졌다.

나는 그가 더 실망하기 전에 듣기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다음에도 출마한다면 잊지 않고 한 표 주도록 하지.”

비로소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버틀린이 우당탕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에게 정말로 한 표 이상 주지 않을 작정이다.

그것도 비공식적으로다가.

하지만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그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지 알겠지.

라드에게 그러하였듯이, 내가 개인적으로 도울 수 있는 선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나는 살아있는 신으로서 지나치게 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내가 별 뜻 없이 표시한 개인적인 호감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계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버틀린은 라힐의 가호를 받는다.

인식이 이쯤 되면 그에게는 불가능이라고는 없어진다는 거지.

때문에 나는 그를 쓸 만하다고 여기면서도 거리를 두기로 했다.

뭐, 능력이 있다면 알아서 올라오지 않겠어.

나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정기호와 함께 공화국으로 돌아왔다.

공화국은 아직도 축제가 아직도 한창이었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의회 비준을 신속히 거쳐 총동원령을 내렸다.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게 되었으나,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축제는 언제라도 다시 열 수 있을 테니.

제후라가 이끄는 묘인족 전사단, 카룩카이와 막시무스를 구심점으로 뭉친 크록 군단, 전공을 세워 입신양명을 꾀하려는 이민자 출신 용병들이 속속 집결하는 와중에, 김형식 총리가 내게 면담을 요청해왔다.

“저번에 부탁하신 감사원 건입니다. 재야에 묻힌 뜻있고 유능한 인재들을 두루 선발해보았습니다.”

나는 그가 내미는 두툼한 서류를 대충 훑어보았다.

서류는 대한민국의 정부요직에 한번쯤 발을 담아 본 엘리트들의 프로필로 가득했다.

“추천안을 재가해주신다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감사원 설립을 추진해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서류를 옆으로 밀어두었다. 깍지를 끼고, 등을 의자에 깊이 묻었다.

“한데 총리님.”

“예.”

“미안합니다만 이번만큼은 총리님 안에 사인을 해드릴 수가 없겠습니다.”

“어이쿠, 추천자 중에서 대통령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이 있었나 보군요. 그렇다면 제 불찰입니다. 누군지 말씀해주신다면 그 사람을 제하고 다시 명단을 추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미 감사원 구성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예?”

나는 서랍에서 서류철을 하나 빼내 그에게 내밀었다.

“정보국에서 올린 추천안입니다.”

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서류철을 펼쳤다.

“감사원 구성은 과거 오데르의 수하였던 정보국 요원들을 우선적으로 임용해서 짜볼 생각입니다. 암행에 능하고, 물욕이 없으며, 저를 향한 충성심이 높으니 감찰업무를 맡길 최적의 인재라 하겠습니다.”

“...저는 대통령님께서 따로 이 일을 추진하고 계실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전쟁 준비로 바쁘셔서 그럴 경황이 없으실 줄로...”

“저는 잠을 자지 않잖습니까.”

나는 김형식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탁한 눈동자가 살길을 찾아 영활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가 되찾아준 젊음은 필시 그의 두뇌회전도 빠르게 했을 터.

“감히 간언을 드리자면, 감사업무란 행정전반에 대한 고도의 이해가 필요한 최상위 단계의 행정행위입니다. 행정업무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는 전직 암살자 출신으로만 부서를 꾸린다면 업무가 잘 돌아갈 것 같지 않습니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일감을 던져둔 뒤 어떻게 굴러가나 지켜볼 생각입니다. 총리님의 우려가 현실화된다면 제출하신 명단을 참고하여 외부전문가를 들이던가 해야지요.”

“참으로 현명하십니다.”

“그들에게 처음 내릴 임무는 고위공직자에 대한 성역 없는 감찰입니다. 아시다시피 공화국은 여러 종족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상향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공화국의 고위계층은 한국 출신의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있죠. 그들이 지식의 비대칭성을 무기로 삼아 비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으니만큼, 상당한 성과가 기대됩니다.”

“허허...”

총리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쯤이면 내가 굳이 새로운 안을 가져온 게 누굴 저격하고자 함인지 깨달았을 테지.

내가 이 나라를 세웠다.

나는 이 나라의 지도자에게 한 수 가르치고 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김형식은 모든 개국공신이 그러하듯 자기 권력에 도취되고야 말았다.

내가 왜 버틀린에게 한자리 주지 않았냐고?

바로 이렇게 될까봐 무서워서.

차수진 박사처럼 다소 무례하더라도 자기 분야에 대한 누구보다 뛰어난 열정이 있다던가,

정기호나 박이나처럼 권력욕 자체가 없다거나,

막시무스나 화이트모카처럼 종교적인 열의로 충만하거나,

우르술라나 우르 황자처럼 내게 꿇리지 않을 자의식의 소유자이던가.

그런 사람이라면 중책을 믿고 맡길 수 있지.

하지만 당신은 아니었어.

그래서 유감이었다. 그에게 신세를 많이 진 건 사실이니까.

그를 오랏줄로 묶지 않은 건 내가 베풀 수 있는 일말의 온정이다.

그에겐 신변을 정리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거다. 그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한다면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을 실망시키게 되겠지.

덜컥.

김형식이 혼이 나간 표정으로 집무실을 떠났다.

그와 교대를 하듯 문밖에서 기다리던 박이나 실장이 들어왔다. 그녀는 책상 위에 찻잔을 올리며 지나가듯 물었다.

“총리님 표정이 좋지 않으시네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쉬신다고 합니다.”

“총리님이요?”

“연로하신데도 그간 짊어진 짐이 지나치게 많으셨죠.”

“아.......”

그녀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실장님께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이번에 출정을 나가면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당분간 총리님이 하시던 일을 실장님께서 맡아주시면 어떨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저라도 좋으시다면요.”

“덕분에 안심입니다.”

“저기, 그리고, 이런 말씀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대통령님께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신다기에.......”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듣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별거 아니니까요. 저는 제 할 일에나 충실할게요.”

거짓말.

내 권능이 말해준다.

전혀 별일이 아닌 게 아니라고.

“그보다 진소미 님께서 돌아오셨어요. 총리님과 면담 중이시라고 전해드렸더니, 5층 테라스에서 기다리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녀가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려 들었다.

하지만 소미가 왔다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돌아와서 마시겠습니다.”

나는 찻잔을 내려두고 소미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박이나 실장에 관한 생각은 금세 사라지고, 소미에게 엘리시아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가 나를 번민케 만들었다.

소미는 테라스 귀퉁이에 놓아둔 테이블 위에 앉아있었다.

다소곳이 홀로 앉은 모습을 보자니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었다.

우리의 관계는 그때에 비해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오빠!”

소미가 날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소미.”

“얼굴 보기 진짜 힘드네요.”

“그거 내가 할 말이야.”

“어라, 의외로 멀쩡한데요? 분명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 들었는데.”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 대사를 모든 측근이 번갈아 우려먹는 걸 보면 내가 다친 게 그렇게 재미있나 보다.

“현대의학의 승리지. 아니다, 이젠 마도의학이라고 불러야 하려나?”

“암만 의학이 발달했어도 다치고 다니진 마세요. 지금 오빠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몇인데.”

“그 말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 채우겠다.”

“또 그랬다간 천 번도 채울걸요.”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건 다 뭐니?”

“이거요?”

그녀가 턱 끝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물건들을 가리켰다.

“자요, 선물.”

그녀가 내게 박스 포장된 CD를 쥐여 주었다.

“며칠 전 발매한 4집 앨범이에요.”

“드디어 이게 나왔구나.”

박스 겉면엔 앨범의 컨셉포토로 보이는 사진이 프린팅되어 있었다.

화려한 색감의 배경 속에서 투시즌 멤버들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하늘 위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기상.

앨범의 이름이자, 타이틀곡의 제목이었다.

“사인본은 오빠한테 주는 선물.”

소미는 사인이 되어있지 않은 다른 CD를 보여주었다.

“이건 공화국 국민들을 위한 선물이에요.”

“전 국민에게 너희 앨범을 나눠주겠다고?”

“그래야죠. 곧 큰 전쟁이 벌어질 거라니까.”

“전쟁과 앨범이 대체 무슨 상관이.....”

나는 말을 채 맺지 못했다.

과거 기억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에.

앨범과 전쟁이 얼마든지 상관있을 수도 있다.

나조차 그녀의 목소리 덕을 입었던 적이 있었다.

“감 잡으셨네요.”

소미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이건 저를 기리는 찬트에요. 멤버들과 합의해서 컨셉을 정했죠. 신성한 군대가 일어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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