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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72화 (172/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72화

기상 (10)

그는 목이 졸려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딱히 그의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바라는 건 그의 죽음이 불러일으킬 전시효과가 전부였다.

이들은 썩어빠진 시스템 위에서 너무 오랫동안 군림해왔다.

도시를 멋대로 점거하고, 영주를 인신구속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말뚝에 매달아도 누구 하나 잘못됐다는 말을 하지 못할 만큼.

나는 군중에게 이들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일 뿐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다치면 피를 흘린다는 걸 알리고 싶다.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굽히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힘으로.

잠시 후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동시에 대대적인 의식의 개변이 일어났다.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은 함성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그의 죽음은 수천 명의 민중을 전사로 바꿔놓았다.

형리는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고, 붉은 법복을 입고 있던 그니르의 종자들은 성난 인파에 삼켜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라힐! 라힐!”

흥분한 군중들은 웃통을 벗어 불을 붙였다. 불이 붙은 옷을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내 이름을 외쳤다.

“정말로 라힐 님이 맞으십니까?”

버틀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어쩌려고.”

“어쩌긴요. 사이좋게 말뚝에 박히겠지.”

“라힐이 맞아. 아쉽게도.”

“허미, 쉽헐.”

버틀린이 팔을 벌리며 과장된 리액션을 취했다.

“제가 당신을 좋아하긴 합니다만.......원래부터 이렇게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르십니까?”

“나도 예전부터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거든. 에사인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걸 보니 천성인가 보지.”

사람들이 각성한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저간의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지금 내가 처하게 된 상황을 비유하자면 갑자기 화난 토끼 수천 마리를 떠맡게 된 사육사와도 같았다.

맹수가 우글거리는 숲 한가운데서 말이지.

여긴 그니르의 전초기지였다. 그니르 본인이 근처에 있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추종자들도 몇천 명이나 주둔 중이었다.

상황은 내게 매우 불리하다.

그니르는 굳이 나와 생사결을 펼칠 필요가 없었다. 본인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동안 부하들이 시민들을 제압한다면 내겐 추종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꼬리표가 붙겠지.

놈은 사람들에게 겁을 줘서 신앙심을 창출해내는 타입의 에사인이라, 자기 부하가 싸움에 휘말려 몇이나 죽어나가던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반면 이 척박한 토양에서 조심스럽게 나에 대한 믿음을 키워가던 사람들은 내가 직접 나서고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걸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부우우우우.

곳곳에서 소집을 알리는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대사제의 죽음은 삽시간에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니르의 것으로 여겨지는 완강한 마력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했다.

분위기에 도취되었던 군중들이 하나둘 미몽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신생 에사인 라힐과 오랫동안 의식의 뿌리에 박혀있던 그니르의 대결.

전자의 승리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져나가리라는 건 쉽게 상상 가능하겠다만.

“하지만 대책이 전혀 없지는 않아.”

별안간 운집한 군중들의 뒤쪽에서 한 무리의 전사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불안한 눈초리로 뒤를 돌아보았다.

새로이 등장한 건 대영주 이졸데의 직속부대, 큰망치 전사단이었다.

그들은 방어구를 착용하는 걸 수치로 여기는 신념에 따라 최소한의 의복만을 걸친 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가장 무모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선 건 대머리에 턱수염이 북슬북슬한 거한이었다.

요른,

이졸데의 최측근이자 정기호의 라이벌로 알려졌으며,

스트리아 수성전 때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던 전사다.

그는 형장 앞까지 걸어와 자신의 거대한 망치를 바닥에 힘껏 꽂아 넣었다.

쿠웅.

“큰망치 전사단장 요른,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이다, 요른.”

나는 형장 난간에 상체를 기댄 채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 험준한 세상에도 내게 우호적인 에사인이 몇 있기는 하다.

그들 중 한 명은 영광의 용광로를 만든 카둔이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챔피언인 아길리를 기꺼이 내준 다가트였다.

큰망치 전사단은 다가트를 추종하는 광신자 집단이었다.

내가 사고를 친 데에는 그들이 용기의 에사인의 추종자답게 날 지지할 거란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병력이 없다고?

그럼 다른 에사인의 병력을 끌어오면 되잖아.

“저는 배움이 짧아 복잡한 말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묻겠습니다. 대영주님을 구하려면 제가 무얼 해야겠습니까?”

“간단하게 대답하지. 나와 함께 스트리아에서 그니르의 잡것들을 몰아내면 된다.”

“들었나!”

그가 부하들을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이 시간부로 우리는 라힐 님의 손과 발이 된다. 이의 있는 놈은 망치 들고 앞으로 나서라!”

망치 들고 이의를 표시하는 게 저들의 전통인가보다.

의견이 하나가 될 때까지 망치로 서로의 머리를 내려치는 모습이 상상이 간다.

쿵, 쿵, 쿵.

다가트의 전사들은 앞으로 나서는 대신 망치자루로 땅을 내려치며 요른에게 호응했다.

그들은 다가트에게 충성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대영주를 사랑했다.

정기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대영주는 역시 이졸데가 맡는 게 옳았던 것 같다.

이로서 내게 갑자기 일만에 달하는 병력이 생겨버렸다.

크록 군단과 겨룬다고 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예병이었다.

이러면 상황이 반전되는 거지.

형리들이 단검이나 휘두르던 버틀린에게 움츠러드는 걸 보고 느꼈겠지만, 그니르가 스트리아에 데려온 건 전투부대가 아니라 사제집단이거든.

무늬만 사제지 칼 든 강도나 다름없는 치들이긴 하나, 그래도 정규군과는 꽤 전투력 차이가 날 거다.

종자들을 지키며 명성을 보전해야 할 쪽이 내가 아니라 그니르가 되었다는 소리다.

“......믿기지가 않네요.”

버틀린이 말했다.

“당신에 관한 소문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가장 믿기 힘든 이야기는 어떻게 요즘 같은 세상에서 평범한 인간이 신격을 얻을 수 있었냐는 거였죠. 듣기로는 기적 같은 행운이 따랐다고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그저 운이 좋아서, 마력이 많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걸 알겠습니다.”

“운이 맞아.”

나는 환호하는 큰망치 전사단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운이 따라줘서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지.”

이 유리한 구도를 만들어준 데엔 큰망치 전사들의 결단이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지금 황제를,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배반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나 다름없거든.

황국이라는 테두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는 말해서 입만 아프다.

“하지만 벌써부터 축배를 들진 말자고.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그니르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겨뤄봤던 에사인 중 만만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전투에 특화된 능력을 가지지 않았다고 여겨졌던 나브니마저 내게 원치 않았던 십오 년이란 세월을 선사해줬으니.

그니르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라고는 그가 비익족이 배출한 최초이자 마지막 에사인이라는 점뿐이었다.

한때 노예처럼 매매되던 비익족은 그니르의 등장으로 비약적으로 입지가 상승해 사회의 지배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나는 울토르의 대검을 소환해 어깨에 걸쳤다.

그니르의 기운은 여전히 이쪽을 탐색하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에 성난 군중은 눈덩이처럼 무리를 불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쇠스랑, 낫, 부지깽이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광장에 합류했다.

그들은 나와 이졸데의 이름을 연호하며 소리 높여 외쳤다.

“대영주님을 석방하라!”

“그니르를 쳐 죽이자!”

그들은 무서울 게 없어 보였다.

왜 무서울 게 없는 그들이 이제 와서야 나섰는지는 탓하지 말도록 하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사정으로 비겁하니까.

가슴 속에 저마다의 작은 용기를 간직하고 있고, 그걸 제때 꺼낼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다.

그날 그니르는 끝끝내 나서지 않았다.

나는 요른에게서 스트리아에 주둔했던 사제단이 북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제단은 스트리아 시뿐만이 아니라, 주 전체에서 물러나 티에말령까지 후퇴했다. 그니르의 주력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나는 이 모든 보고를 스트리아 시의 관청에서 받았다.

정기호의 여동생 이졸데와 함께.

이졸데는 그동안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살이 쪽 빠져 쇄골이 요철처럼 보일 정도로 도드라졌다.

그러나 깊게 가라앉은 호박빛 눈동자와 매서운 눈초리는 여전했다. 쏘아붙이는 듯한 말투도.

“그니르를 쫓아냈으니 저는 이제 폐하의 적이 되고 말았군요.”

“여전히 그 나라로 돌아가실 기회가 있습니다. 저와 무관함을 밝히고 그니르의 재판정에 출두하신다면...”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한 몸이야 어찌 되어도 좋습니다만, 제가 황국에 남는 건 영민들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이번 사태를 겪어보고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전쟁의 불길이 목전까지 닥쳐왔는데도 자기 나라 백성을 심판하는 일에 더 몰두하는 모습........저는 그런 나라로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자기 한 몸이 어찌되어도 좋다는 말은 대귀족의 입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내 권능이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단지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라는 걸 보증했다.

그래주지 않으면 곤란하지. 이 큰 땅을 믿고 맡길 사람은 드물거든.

“갈 곳은 있나?”

정기호가 물었다. 그는 동생 앞이라는 걸 의식해서인지 습관처럼 피우던 담배를 자제하고 있었다.

“나는 오라버니가 부러웠어.”

그녀가 정기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내겐 없는 검의 재능을 타고났으니까. 덕분에 난 어릴 때부터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지. 나는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다른 역량을 갈고 닦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책을 읽고, 변설을 배우고, 학자들과 시간을 보냈지.”

“쓸데없는 짓을 했군. 나는 네게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진짜로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더라. 하긴, 그러니까 암살을 당했겠지?”

“내가 다소 허술했다는 건 인정하지.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다를 거다.”

“과연 그럴까? 외모가 달라졌다는 건 인정하는데, 알맹이는 내가 알던 그 무심하던 남자가 맞는 것 같은데.”

“널 구한 사람이 나라는 걸 잊지 마라.”

“그렇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네.”

나는 그들이 암살 이야기로 농을 건넬 만큼 친해졌다는 데 소소하게 놀라는 중이었다.

이졸데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우리에게로 또박또박 걸어왔다.

“하지만 나도 언제까지나 오라버니한테 뒤처지고만 싶진 않았어. 생각해보면 조금 분하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모실 주군만큼은 오라버니보다 빨리 찾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그녀는 그 대목에서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스트리아의 대영주 된 자로, 스트리아령이 공화국의 속주가 되기를 청합니다. 부디 허락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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