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71화
기상 (9)
그는 마치 연극을 하듯 극적인 톤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그는 배우가 아니라 형벌의 집행인이었고, 그가 다루는 건 인간의 목숨이었다.
그리고 그가 집행하려는 인간의 목숨은 내게 속한 자의 것이다.
“자아.”
집행인의 손에 들린 율법서에서 빨간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정화의 불꽃이다.”
불길이 그의 손에서 횃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태워 죽여라!”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겁먹은 군중들을 찍어 누르는 듯한 벽력같은 고함이었다.
“죽여라, 죽여라!”
군중 일부가 그를 따라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사람들이 화형에 동조하는 건 아니었다. 내 눈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견을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힘겨워할 정도로 두려움이 만성화되어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이 참극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배교자여, 내 특별히 네게 마지막으로 죄를 뉘우칠 기회를 주도록 하마. 혹시 모르지. 네가 우리 모두에게 충분한 진정성을 보인다면 관대하신 황제폐하께서 네 가족들에게만큼은 자비를 베푸실지도.”
집행인이 죄수 한 명의 안대를 벗겼다. 죄수는 한쪽 눈이 없었다. 텅 빈 안와 주변엔 인두로 지진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나이 사십 대 가량의 남성이었다. 그는 당장 사면을 받는다 하더라도 가망이 없어보일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군중들을 훑어보았다. 그는 부르튼 입술을 열어, 갈라진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러분, 나는 공화국에 가보았습니다.”
그의 첫마디가 광장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어서 돌아와서 가족들을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집행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으며 할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곳이 이상향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집이 없어 천막에서 바람을 피해야만 했고, 먹을 게 없어 줄을 서서 배급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머리를 이고 누워도 행복했습니다. 어떻게든 자식 놈을 조금이라도 더 먹여보려고, 바랑 들고 구걸을 다녀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그곳에는 황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산 채로 말뚝에 박는 자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지껄이는군. 죽고 싶은 거냐?”
집행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날 죽여라, 그렇게 해서 황제의 실정이 감춰지기만 한다면! 내 자식을 고문해라. 그렇게 해서 전쟁이 멈추고, 황제가 이 나라에 평화를 가져다주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걸 너희도 알고 있겠지. 앞으로 상황은 나빠지기만 할 거라는 것도 잘 알겠지. 그 누구도 마음으로 너희를 따르지 않으며, 그 손바닥만 한 법전으로는 진실을 가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닥쳐라!”
집행인이 그의 가슴에 법전을 가져다대었다. 살갗이 녹아내리는 소리와 함께 찢어질 듯한 비명이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비명을 지른 건 사내가 아니라 그의 자식으로 여겨지는 어린 딸이었다. 아버지는 끝까지 비명을 참았으나, 딸은 안대가 채워진 채로도 아버지가 고초를 겪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사내는 살갗이 산 채로 녹아내리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외쳤다.
“여러분, 두 다리로 걸을 수만 있다면 당장 공화국으로 떠나십시오. 그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라힐 님이야말로 우리의 유일무이한 희망이십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희망은 지금 어디에 있나? 그는 왜 그를 따른다는 자들의 고단함을 방관하기만 하나. 그가 너무 고귀한 존재라 너희를 위해 직접 나서지 못하겠다면, 그를 따른다는 사제나 전사들은 코빼기라도 보여야 하는 게 아니냐.”
“그분은 그분의 백성을 위한 계획을 세워두셨다...”
“암, 그런 말로라도 위안을 찾아야겠지. 하지만 내 눈엔 어리석은 아비를 둔 아이의 슬픔만이 비칠 뿐이구나.”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입을 열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적막만 가득한 광장에서 오직 어린 딸의 울음소리만이 선명히 들렸다.
“판결하겠다.”
집행인이 불에 휘감긴 율법서를 펼쳤다.
“나 메라 드라가는 그니르 님께 위임받은 권한과 고대의 신성한 법률에 의거하여...”
“이 나라는 이미 끝장났어.”
버틀린이 곁에서 속삭였다. 핏발 선 그의 눈은 어린 소녀에게 못이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돈은 잊어버려. 너희가 여기서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죽고 싶지 않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아.”
“라힐.”
정기호가 진중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지금 떠오른 생각을 주저하지 마라.”
그는 갑옷 안에 넣어둔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말했다시피 동생은 내 소관이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네 소관인 사람부터 챙겨라.”
“...고맙다.”
“고마우면 나중에 고기나 사.”
정기호는 담배 연기를 꼬리처럼 남기며, 군중의 틈바구니로 성큼성큼 사라졌다.
“......이상으로 유죄를 선고한다.”
집행인이 죄의 낭독을 마쳤다.
동시에 나는 형장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이, 형씨!”
버틀린이 뒤에서 다급히 날 불렀다.
“형씨, 미쳤어?”
그의 손이 어깨를 콱 쥐었다. 나는 고개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천만금을 준대도 더 이상은 못 따라가. 저 양반은 그니르의 대사제라고. 저놈한테 찍히면 살아서는 도시를 못 빠져나간다니까.”
“수틀리면 날 팔아도 된다고 말했을 텐데.”
나는 그에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씨발, 진짜 이러기야?”
그가 거칠게 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내게서 떨어지진 못했다.
“열 배.”
그가 내게 가까이 붙으며 말했다.
“그때 준 돈에서 한 푼도 에누리 없이 열 배다.”
“얼마든지.”
“하, 진짜 인생이 어찌되려는지. 어쩌다 이런 미친놈을 다 만나서.......”
구시렁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가 나선 건 돈 때문이 아니었다.
돈이 변수가 될 수는 없었다, 목숨을 내놓자는 일이니까.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죽을 자리라는 걸 알면서도 남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
“뭐 하는 놈들이냐?”
드라가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나는 형장 위로 한 걸음씩 올라갔다.
“구경만 하고 있을 셈이냐? 천것들이 형을 방해하고 있지 않느냐.”
“비켜, 새끼들아. 마빡에 바람구멍 나기 싫으면.”
버틀린이 단검을 빼들고 서슬 퍼렇게 휘둘렀다. 형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당황스럽겠지, 이만큼이나 독기 어린 쥐는 처음 봤을 테니.
“......가관이로군.”
드라가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가관인 건 네 영혼이겠고.”
“지금 나더러 한 말이냐?”
“너 들으라는 말이 맞아.”
“너는.......네놈은....”
드라가는 다음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
아니면 다음 말에 뒤따를 책임을 어렴풋이 느꼈거나.
나는 그를 지나쳐 형장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내에게 당도했다.
사내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사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영혼이 흔들리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삶이 파멸로 곤두박질치는 와중에도 믿음을 놓지 않았다.
그는 눈알이 빠지고, 살갗이 녹고, 가정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내가 도탄에 빠진 세상의 한 줄기 빛이 되어줄 것이라 굳건히 믿었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숭배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런 종류의 믿음은 종종 기적을 낳곤 했다.
나는 충동적으로 정기호를 따라나서겠다고 한 게 실은 그의 기도에 응하기 위함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와 주셨군요.”
그가 힘없이 웃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나는 투구를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텅, 텅, 텅.......
금속 투구가 계단에 부딪혀 바닥을 한참 동안 굴러갔다.
나는 그의 손목을 한 손으로 쥐었다.
나는 그니르의 악랄한 금계를 쥐어뜯고, 드라가가 입힌 상처에 한량없는 마력을 불어 넣었다.
머지않아 그의 몸에서 유형화된 마력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유형화된 기운은 그가 에사인의 축복을 받은 주술사가 되었음을 알리는 선포나 다름없었다.
군중들은 숨을 죽인 채 죽어가던 자가 되살아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나는 치유의 능력이 한정된 이 세계에서, 소미가 어째서 절대적인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도 깨달았다.
추종자가 나를 향한 믿음을 잃지 않는 이상, 나는 몇 가지 제약을 건너뛰어 추종자의 소망을 현실화할 수 있다. 소망을 현실화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추종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였다.
이어서 나는 그의 처의 안대도 벗겨주었다.
딸아이도.
그들의 안대는 눈물로 절여져있었다.
그들은 내게 고마움을 표할 경황도 없이 사내에게 뛰듯 안겼다.
“버틀린.”
나는 버틀린을 나직히 불렀다.
“뭐, 뭐?”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중이었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무, 무슨 소리를...”
“눈치껏 행동하라고.”
일순간 어리벙벙하던 그의 표정이 비장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그에게도 깨달음이 순간이 찾아온 것 같다.
“라힐 님께서 납셨다, 이 새끼들아!”
그가 난간을 쥐고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때맞춰 나는 숨겨온 마력의 일부를 개방했다.
하늘의 빛깔을 바꿀 정도로 거대한 아우라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화형대의 불이 멎고, 형리들은 압력을 이기지 못해 나가떨어졌으며, 드라가의 손에 들렸던 법전은 페이지를 낙엽처럼 흩뿌리며 흙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당신이 라힐이라고?”
드라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그의 멱살을 쥐어 위로 높게 들어올렸다.
나는 처음부터 그와 말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내게서 빠져나가기 위해 갖은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나는 오직 마력의 압력만으로 그의 모든 움직임을 봉쇄했다.
“커억........”
숨이 꼴딱 넘어가는 소리.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쉽게 믿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겠지, 그니르의 대사제가 이렇게 추한 몰골을 보이는 것도, 그를 징벌하는 게 에사인의 진신이라는 것도, 무엇 하나 믿을만한 것이 없으니까.
“지금부터 공화국 법률에 의거해 널 심판하겠다. 근본은 없어도 공정하다고 자부하는 법이지.”
“컥, 커억.......”
그가 다리를 새우처럼 꺼떡였다.
숨을 쉬게 해달라는 신호겠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신호를 보냈을까?
“.......죽여라!”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번에는 버틀린이 아니었다.
침묵하던 군중들이, 한목소리가 되어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분노는 지금껏 억눌려왔던 만큼이나 커다랬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나는 열창하는 군중을 등에 업은 채, 서서히 위로 말려 올라가는 드라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묻고 싶군. 네 황제는 지금 어디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