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70화 (170/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70화

기상 (8)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남은 심각한데 혼자 웃으면 나쁜 놈 되고 말 테니.

얼마 전에 치러진 선거는 국가적인 이벤트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전체적으로 한국 출신 인물들의 약진이 돋보인 가운데, 황국인 출마자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어영부영하다가 대거 낙선하고 말았다.

그들 중 하나가 바로 버틀린이었던 모양이다.

우르술라는 그의 권력욕을 그냥 넘기지 않았던 거고.

누님에게는 여러모로 감탄하게 된다. 사람 보는 눈썰미가 정말 대단하거든.

“미안, 널 미리 알았더라면 한 표 줬을 텐데.”

“한 표를 누구 코에 붙이냐. 천 표도 넘게 차이가 났다! 예미랄 것.”

“천 표면 큰데.”

정기호가 혀를 차며 추임새를 넣었다.

나라가 작아서 지역구도 작았다. 천 표나 차이가 났다면 득표율이 바닥을 기어 다녔다는 소리였다.

통장 잔고도 바닥을 기어 다닐 테고.

선거비용을 돌려받으려면 득표율이 10%가 넘어야 한다. 돈 없어서 선거 못 치른다는 말이 나올까봐, 한국에 비해 후하게 잡은 수치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선거비용을 보전받기 위한 충분한 득표율을 달성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니까 임무를 망쳤답시고 머리털을 북북 쥐어뜯는 중일 테지.

“후, 인생.......”

버틀린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헝겊으로 피를 슥슥 닦아내더니, 좀비처럼 비척비척 일어났다.

“이제 어디로 갈 작정이냐?”

“별수 있어?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전부 매달아 불에 태운다는데. 공화국으로 돌아가서 얌전히 살아야지.”

그는 말과 달리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못다 한 임무에 미련이 남은 것 같았다. 아까부터 느낀다만 그는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늙어죽을 팔자는 아닌 것 같다.”

“너희들도 만만치 않어. 그니르의 사제를 둘이나 죽이다니, 제정신이냐? 그놈들한테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나 있냐?”

“그야 당신이 신호를 보냈으니까.”

“시킨 놈보다 하란다고 하는 놈이 더 나빠.”

“시켰다는 자각은 있네. 감형은 못 받겠어.”

“...너 평범한 모험가는 아니지? 아니, 너흰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고? 나는 지금 심장이 벌렁거려 죽겠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태연하냐?”

“우리도 심장이 벌렁거려. 투구를 써서 아닌 것처럼 보일 뿐.”

나는 정기호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떨리긴 하다.”

정기호가 세상 다시없을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버틀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정기호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겠다. 대충 감은 왔다. 하긴 그 여자한테 빚을 진 게 어디 나뿐이겠어.”

그는 우리도 낙선자 동지로 여기는 듯했다.

우리는 공도에 올라 곧장 스트리아 시로 향했다. 공도 좌우에는 그니르의 추종자들에 의해 말뚝형을 받은 시체가 즐비했다.

말뚝 아래에 박아둔 팻말에는 그들의 죄명이 낱낱이 쓰여 있었다.

- 존엄하신 황제의 신성성을 부정한 죄

- 마족의 부정한 에사인, 라힐과 진소미의 이름을 입에 올린 죄.

- 고대로부터 이어진 준엄한 계율에 의거하여 이자를 본보기로 삼는다.

- 심판자 그니르 님의 대사제 드라가 메라

“쯧.”

버틀린이 팻말을 읽으며 혀를 찼다.

“황국은 공화국과 완전히 선을 긋는 모양이구만. 이래서는 진짜 발도 붙여보기 힘들겠는걸.”

- 대체 이게 어떻게 되어먹은 거냐.

나는 정기호에게 사념으로 의문을 던졌다.

우리는 분명 얼마 전 황국에게 동맹제의를 받았다. 제안서는 날 새로운 권능으로 추대한다든가 무역을 재개하겠다는 등 핑크빛 약속으로 가득했다. 그 제의를 받아온 게 바로 정기호였다.

“삼상회의 의사는 아닐 거다. 황도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그니르 혼자 폭주하고 있다고?”

“모든 권능이 중앙정부의 힘을 벗어나 군벌화되어가는 중이다. 보아하니 그니르는 남부에 터를 잡으려는 것 같군. 공화국과 남은 앙금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 확실하지. 그놈은 그러고도 남어.”

그래도 삼상회의 귀족들은 깨어있는 편인 것 같다.

나와 손을 잡는다는 수는 황국이 낼 수 있는 대안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니.

그니르?

그놈은 잔인한데다 멍청하기까지 하지.

둘을 비교하자면 멍청한 게 더 나빴다.

지금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하냐고.

명분, 그거 하나 얻자고 이러는데, 그놈은 방금 내게 명분을 줬다.

여기 매달린 시체 하나하나가 내 명분이었다. 에사인이 자기 신도를 살리겠다는데 누가 감히 당위성을 논할 수 있을까.

“버틀린.”

“왜?”

“목소리 크지?”

그는 내 뜬금없는 질문에 미간을 찡그렸다.

“별걸 다 묻는구만. 남보다 작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러면 내가 소리쳐달라고 할 때 소리쳐줄 수 있겠냐.”

“대체 내가 왜...”

“이거면 어때.”

내가 꺼내보인 건 황국에서 통용되는 화폐였다. 정식으로 수교를 하지도, 무역을 하지도 않으나, 황국 화폐는 공화국에서도 충분한 화폐가치를 인정받았다. 난민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마침 군자금이 떨어진 참이었지.”

그가 내 손에서 돈뭉치를 잽싸게 낚아챘다. 단검을 휘두를 때보다 더 빠른 손놀림이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네.”

“말해봐. 듣고 판단해볼 테니. 들어온 돈은 다시 안 나간다는 건 알아두고.”

“간단해. 당신이 아까 우리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줬듯이, 곧 당신도 비슷한 신호를 받을 일이 있을 거야.”

“눈치껏 행동하라고?”

“그래.”

“내 눈칫값이 이렇게 비싸다고?”

“뭐 어때, 어차피 곧 휴지조각이 될 종이쪼가리인데.”

“....알았다. 눈치껏 행동해보지. 가만, 기한은 어떻게 되나? 날 몇 년이고 끌고 다닐 작정은 아니겠고.”

나는 속으로 셈을 해보았다.

“길어야 닷새. 닷새면 스트리아에 도착하고도 남을 테니까.”

“좋아. 닷새 동안은 네게 돈을 받았다는 걸 잊지 않도록 하지. 그 후엔 서로 갈 길 가자고.”

“계산이 확실하네. 역시 당신이 당선되었어야 하는데.”

나는 그의 아픈 곳을 찌르며 빙글 웃었다.

우리는 삼 일 후 스트리아 시에 도착했다. 스트리아 시는 겉보기로 기엔 시보다 상태가 훨씬 좋았다.

일단 이곳의 치안은 병사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이졸데의 직속 전사단인 큰망치 전사단은 남부영지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전투력을 가진 무력집단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섬기는 에사인만큼이나 간뎅이가 부은 자들이었다.

아무리 사제들이 눈에 뵈는 게 없다고 해도 용기의 에사인의 신도들을 건드릴 만큼 막 나가지는 않았다.

“장이 열려있구만.”

버틀린의 한마디가 여기 사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노점상들이 길가에 좌판을 쫙 깔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이 스트리아의 장날인 모양이었다.

장이 열려있다는 건 아직 공동체를 유지하게끔 하는 시스템이 살아있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거리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좀 더 구경해보았다.

손전등, 건전지, 탁상시계, 펜 등 소위 마족의 물건들이 버젓이 거래되고 있었다.

마족 꼬리표가 붙은 물건은 값이 비싼데도 인기가 많았다. 일단 포탈을 넘어왔다고 하면 프리미엄이 붙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장마당 안에 위치한 숙박업소에 여장을 풀었다.

어린 종업원은 피투성이가 된 버틀린을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직업 특성상 그런 사람들을 하루에도 십수 명은 접하는지라.

“팁이다.”

종업원은 내가 건넨 동전을 받고 눈이 동그래졌다.

피투성이 전사로도 놀래키지 못한 소년을 반짝이는 동전이 이리도 쉽게 해내고 만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용사님은 선생님의 에신 버전쯤 되시겠다.

칼밥 먹는 아저씨들 듣기 좋으라고 붙이는 호칭이지.

“내가 스트리아는 처음이라 그런데, 이곳 사정을 좀 말해줄 수 있겠니?”

“물론이죠!”

그가 활기차게 소리치더니, 갑자기 주변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하지만 제가 말했다고는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당연하지. 비싼 돈 주고 얻은 정보인데 혼자만 알고 있어야지.”

“분위기가 나빠요.”

“어떻게 나쁜데?”

“사제님들한테 사람들이 많이 끌려가고 있어요. 도시 밖으로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아요.”

“오면서 말뚝형을 받은 사람들을 봤다.”

“으으......”

소년이 무서운 상상을 한 듯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대영주님이 위험하시다고 들었어요. 어른들은 대영주님이 잡혀가고 나면 아무도 우릴 지켜주지 않을 거래요.”

“누가 영주님을 잡아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메라 드라가.”

소년이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대사제님이래요. 대영주님보다 높으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너희 영주님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 않니? 잘못이 없는 분을 대체 왜 잡아갈까.”

“그건 저도 잘 몰라요. 그 얘기만 나오면 어른들끼리도 싸움이 나거든요. 하지만 저는 대영주님이 아주 훌륭하고 멋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들어보니 이졸데가 민심을 잘 잡은 것 같다.

내겐 좋은 소식이었다. 그녀를 살린다면 그녀가 잡은 민심도 결국엔 내게로 흐를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하나 묻자. 지금 대영주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니?”

“몰라요. 궁전에 계시지 않을까요?”

“그래, 고맙다. 그만하면 됐다.”

나는 소년을 보내주었다.

이졸데를 빼돌리는 일은 대화가 아니라 무력으로 해결될 거다.

무력이 아니라면 제때 그녀를 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스트리아 백성들은 이졸데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그녀가 갑자기 정체도 모를 사람들의 손에 의해 사라고 만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말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녀를 빠른 시일 안에 빼내야만 할 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도망쳤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 서사도 만들어내야만 했다.

쉽지 않은 임무였다.

하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기엔 광장에서 피어오르던 잿가루.

그니르의 추종자들은 광장을 너무나도 좋아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하는 행위가 정당하며,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기에 나는 광장부터 찾았다.

대체 이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실마리를 얻기 위해.

“이봐.”

버틀린이 광장으로 향하는 길 한가운데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이쪽으로 더 들어가면 또 사제들을 만나게 된다고.”

“괜찮아.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때처럼 날 팔아넘기면 되니까.”

“아니, 그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

“그래, 전적으로 이해해.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지. 그러니까 난 당신 걱정은 안 해.”

그는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말해두지만 당신들이 나한테 의뢰한 건 눈치껏 큰소리를 내달라는 것 하나뿐이야.”

“그랬지.”

“나한테 너무 큰 기대는 말라고. 나는 나대로 눈치껏 살길 찾을 테니.”

“부디 그래줬으면 좋겠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기어이 날 따라오는 게, 오래 살기 글러먹은 팔자가 확실하다.

광장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발을 딛기 곤란할 정도로 운집해있었다.

화형장도 보였다. 과시하기 좋아하는 그니르의 취향이 한껏 반영된, 쓸데없이 높은 형장이었다.

형장 위에는 세 명의 죄수와 한 명의 집행인이 올라가 있었다. 죄수들의 눈은 가리개로 가려졌고, 몸에는 모진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돌아버리겠군.”

내가 군중 속을 파고들기 시작하자, 버틀린이 나직하게 욕을 내뱉었다.

“똑똑히 보라! 흉신을 따르는 자의 최후를”

집행인이 손에 쥔 율법서를 높이 쳐들며 외쳤다.

“너는 라힐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 말했다. 너는 그가 황제폐하와 달리 너를 지켜준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 간악한 에사인의 머리털 끝조차 보이지 않는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