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69화
기상 (7)
우리는 다음 날 오후 무렵에 기엔에 도착했다.
이상한 느낌은 성문에 도달하면서부터 들었다.
우선 평지거인이 보이지 않았다. 에신의 모든 성문은 인간의 완력으로는 열 수 없는 사이즈로 만들어졌기에 문을 열어줄 거인이 최소한 한 명은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성문에는 거인도, 지키는 병사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차가 몇 대나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넓게 열린 채 방치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예전에 나오실 때도 이랬습니까?”
“글쎄요, 저도 이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버틀린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성문을 넘자 개미새끼 한 마리 띄지 않는 황량한 주거지가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기엔 시에 머물 때, 도시는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활력마저 잃지는 않았었다. 재건을 위한 토목공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사람들은 잿더미 위에서도 희망을 노래했다.
이곳이 그때 본 그곳과 같은 장소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마치 네흘렘에 온 것만 같았다.
너무 거리가 썰렁해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도시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광장이 가까워질수록 코가 마비될 것만 같은 역한 냄새가 뻗쳐왔다.
시체 더미를 태우는 냄새가 틀림없었다. 광장에서 뿜어져 나온 매캐한 연기가 사방에 깔려 낮인데도 주변이 어둡게만 느껴졌다.
“잠깐.”
정기호가 손을 들며 걸음을 멈췄다.
그가 왜 그러는지는 잠시 후 드러났다.
붉은 법복을 입은 네댓 명의 사람들이 맞은편에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눈구멍만 뚫어둔 포대 자루를 투구 대신으로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두꺼운 법전을 들었고, 왼손에는 철편이나 채찍을 쥐었다.
그니르의 추종자들.
에신판 이단심문자다.
그들은 흉신을 따르는 자들을 색출해 불에 태워 죽이는 역할을 한다.
오데르를 따르던 시절엔 업무상 불가피하게 마주칠 일이 많았다. 그들과의 만남은 불행하게도 항상 어느 한쪽이 죽거나 다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우리가 뭘 잘못하진 않았겠지요?”
버틀린이 초조한 투로 물었다.
핀트가 엇나간 질문이었다. 저들은 생사람 잡는 스킬의 달인들이다. 잘못이 있다고 해서 살 사람이 죽고, 없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살진 않는다고.
“언제부터 기엔이 이 모양이 됐냐?”
“동생이 실각할 때부터다. 지금 스트리아령을 지배하는 건 그니르라고 보면 된다.”
정기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혹시 라드 소식은 들었냐.”
“사제단에게 항의하다가 가택에 연금당했다고 들었다. 그에 대한 재판도 곧 열린다. 끌려 나가면서 사제 몇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한 모양이다.”
“......개판이군.”
기엔 영주 라드는 이졸데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젊지만 행동력이 있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도 확실했다.
그에겐 개인적으로 부채의식을 느낀다.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이고 말았다는 마음의 빚 때문에.
“죄송한데 저들이 우리에게 곧장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잘못한 게 없으십니까?”
“죄라면 많지요.”
“어떤 죄입니까? 혹시 흉신을 섬기시나요?”
“그건... 흉신의 정의가 무엇인가에 따라 다르겠습니다.”
“그렇군요, 하하......”
버틀린의 다리가 들썩였다. 그는 수틀리면 당장에라도 뒤로 돌아 튀어나갈 기세였다.
처억.
그니르의 사제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버틀린은 체념한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아주 잘 연마된 살기 한 가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가장 앞에 선 사제가 물었다. 쉰 목소리가 최소 오십 대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사제는 무기도 없이 오직 법전만을 쥐었다. 법복에는 다른 이와 다른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친척을 만나러 왔습니다.”
“이 길이면 남문으로 들어왔겠군?”
“그렇습니다.”
“아니요.”
나와 버틀린의 대답이 갈렸다.
“저는 동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분들과는 방금 만난 참입니다. 원래는 발나스령 출신입니다만, 장사를 하러 잠시 고향을 떠나있었죠.”
“장사라고? 네겐 장사를 할 만할 물건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도적 떼에게 던져주고 왔습니다. 다행히도 황제폐하의 가호 덕에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버틀린이 두 손을 모으며 황제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황제를 안줏거리마냥 씹어대던 어제 태도와는 딴판이었다.
장사 얘기도, 발나스령 출신이라는 것도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와 전혀 달랐다.
“그렇군. 남쪽에서 온 건 두 명뿐이라.”
사제가 흡족한 듯이 웃었다.
“사실 저도 이분들이 남쪽에서 왔다는 걸 이상하게 여기던 참이었습니다. 흉신을 섬기느냐고 다그쳤는데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더군요.”
“네가 먼저 물어봤다고?”
“그렇습니다. 제가 불경한 것들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버틀린은 우리를 팔아 살아남을 길을 모색했다.
나는 그를 비난하지 않겠다.
그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있거든.
“그렇다면 너는 흉신과는 무관하겠군.”
“예. 저는 오직 황제폐하만을 섬깁니다. 여기, 이렇게 엠블럼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버틀린이 손에 쥐고 있던 황제의 증표를 보여주었다.
황국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낡은 우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절박한 몸짓이 아무 의미도 없을 우상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좋아, 아주 좋아. 너는 폐하의 종복이 틀림없구나. 너는 그냥 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간단한 확인절차를 한 번 거치자꾸나. 간악한 흉신의 추종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입으로 두말을 하곤 하니까.”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불이다.”
사제가 쉭 소리를 내며 콧김을 내뿜었다.
그는 마대 자루 안에서 웃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네가 정녕 폐하의 충성스런 종복이라면 정화의 불을 문제 없이 견뎌낼 수 있겠지. 보잘것없는 육신의 고통조차 참지 못해 정화의 불에 저항하는 건 흉신을 따르는 사특한 무리들이나 할 법한 짓이 아니겠느냐.”
“저, 저는 황제폐하의 종복이 확실합니다. 굳이 시험해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버틀린이 사색이 되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도 네가 충정을 보여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제는 그의 항변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그는 이러나저러나 우리 모두를 불태워 죽일 작정이었다.
권력이란 인간을 어떻게 변질시키는가.
최근 나를 고민케 했던 화두가 있다.
그니르의 사제는 그것을 아주 훌륭하게 보여주는 표본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에사인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휘두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타인의 고통에 완전히 무감각했다.
그는 아무런 생산성도 창출해내지 못하며 오로지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만 만들 뿐이었다.
이 나라에는 그 같은 인간이 부지기수였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시스템은 그런 인간을 걸러내는 데 실패했다. 걸러내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하는 중이지.
“그를 고문하는 건 시간낭비일 겁니다.”
내가 사제에게 말했다.
“어째서냐?”
사제가 흥미롭다는 투로 반문했다.
“대단한 비밀을 숨길만한 위인은 아니더군요. 그저 황제에 대한 사소한 불만을 품었을 뿐인, 평범한 우리 이웃이었습니다.”
“폐하께 불만이 있다고?”
“전쟁을 너무 지켜만 보는 게 아니냐는 거죠. 그 정도 생각은 다들 하지 않습니까?”
이때 버틀린의 표정이 볼 만했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본 사람 같달까.
“감히 황제폐하께 그런 불경한...!”
사제가 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버틀린이 아주 잠깐 나와 눈을 마주쳤다.
찰나지간 그의 절박함이 시공을 초월해 내게 전달되었다.
“어엇?”
나는 맹한 소리를 내며 사제의 뒤쪽을 가리켰다.
사제의 시선이 자연히 뒤로 빠진 순간, 버틀린의 품에서 단검이 튀어나왔다. 그는 전광석화와 같이 검을 휘둘러 사제의 목덜미를 베었다.
파아앗.
잘린 경동맥에서 뛰쳐나온 선혈이 사방으로 흥건하게 튀었다.
“뭐, 뭣...!”
뒤에 서있던 사제들이 경악하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버틀린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들고 있던 단검을 냅다 앞으로 집어 던졌다.
단검은 사제의 팔뚝에 깊이 꽂혔으나, 치명상을 입히는 데엔 실패했다.
“휴, 흉신의 추종자다!”
마무리는 정기호가 했다. 정기호는 한 걸음 굳건히 내디뎌, 쇠몽둥이를 횡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뻐어억.
뼈와 살이 한데 뭉개지는 소리.
망국의 도시에서 울려 퍼질만한 화음이었다.
“씨발!”
버틀린이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씨발!”
골목골목 시선이 느껴졌다. 거리에 사람이 없다뿐이지 집 안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최소 열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참상을 몰래 훔쳐보았다.
“이놈의 인생이란 되는 거 하나 없다니까!”
버틀린의 한탄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는 동행한 후로 처음으로 가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천연덕스레 맞장구를 쳤다. 마치 서로를 팔아넘기려던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일단 자리를 떠야 할 것 같다.”
정기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둘러 성문을 빠져나갔다.
사제들은 자신들이 사냥당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상정조차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의 방만함은 자연히 경계의 소홀함으로 이어졌다.
이상한 소음이 나도, 비명소리가 들려도, 으레 누군가가 재미를 보고 있겠거니 하고 말아버리는 것이다.
버틀린은 기엔을 벗어나는 내내 뭐가 아쉬운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가족이 걱정됩니까?”
“걱정될 가족이 있었으면 그러지도 않았지.”
그가 퉁명스레 맞받았다.
자연히 말을 놓으며.
“그러면 뭐가 걱정이지?”
“뭐가 걱정이냐고? 뭐가 걱정이냐고? 여섯 번째 권능을 따르는 사제를 백주대낮에 쳐죽여놓고 뭐가 걱정이냐고? 그래, 나도 그게 의문이네. 도대체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느냐는 말이야.”
“어차피 황국으로는 돌아갈 생각이 없지 않았나.”
“그깟 황국, 될 대로 되라지. 내가 걱정하는 건 공화국이야. 황국에서 뭐라도 해내야 공화국 정부가 날 인정해줄 텐데.”
그가 바위에 걸터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당신 실력이면 공화국 정부에게 인정받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는걸.”
그가 발작적으로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내가 고작 검술로 인정받으려고 이러는 줄 아나? 그 나라에 나 정도 재주를 가진 놈은 널리고 널렸어. 애당초 크록을 군대로 거느린 나라에서 어떻게 검술로 입신을 하겠나.”
“그러면 당신이 노리는 건 뭐지?”
“내가 네게 말해줘야 할 이유는 뭔데?”
“글쎄........”
나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여긴 외진 곳이고, 우리는 두 명이라는 거.”
“........그렇군.”
그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가봐서 알겠지만, 공화국은 사람들이 떠드는 것처럼 지상낙원은 아니야.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딜 가나 비슷하지. 그곳에도 나 같은 놈도, 너희 같은 놈도 있다는 소리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그 나라는 황국과 차원이 다른 제도를 지녔다. 우리처럼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천것들에게도 에사인을 곁에서 모실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쪽 말로는 그걸 선거라고 부르더군.”
“가만, 당신....”
나는 그 대목에서 말끝을 흐렸다.
떠오를 듯 말 듯 희미한 잔상.
그가 유난히 친근하게 여겨졌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
그가 고개를 다시금 아래로 파묻으며 말했다.
“나는 낙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