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68화
기상 (6)
궁궐 안이 휑했다. 카룩카이의 귀환을 맞이하기 위해 근위전사들이 죄다 무기를 들고 근무지 이탈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같았으면 부대가 발칵 뒤집어졌겠지.
아무리 경사스런 일이라 한들 병사는 병사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 나라에서 전사란 가장 선망받는 직업이자, 개개인이 무술의 경지에 오른 달인들이다.
“대통령님.”
나는 복도에서 박이나 실장과 마주쳤다. 그녀는 급히 뛰어온 탓에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바, 방금 카룩카이 님께서...”
“창문으로 봤습니다. 지금 어디에 와있나요?”
“대전으로 들어오고 계십니다.”
“갑시다.”
나는 그녀와 함께 걸음을 재촉했다.
기뻐하는 크록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를 향한 수만 가지 색채의 염원도.
나는 마그나크록이 없는 세상에서 그들이 기대볼 수 있는 유일한 우상이었다.
대전 안은 이미 축제 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근위전사들이 모조리 결집한 건 물론이고, 궁 바깥에서부터 행렬을 따라 들어온 시민들도 엄청나게 많아서 옥좌 부근을 제외하고는 발 디딜 틈이 보이질 않았다.
군중들은 내가 등장하자마자 숨을 멎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자리에 앉아 우선 기둥 부근부터 살펴보았다.
이럴 때면 응당 나타나야 할 ESS의 카메라가 없었다.
정보국이 자신들을 감찰한다는 걸 알았는지, 아니면 최근 방송국을 둘러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건지.
“왕이여.”
카룩카이가 동굴이 울리는 듯한 저음으로 나를 불렀다. 그가 나를 왕으로 지칭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수도를 떠나기 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크기였다. 창문 아래에서 내려다봤던, 마그마가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던 크록이 바로 카룩카이였다.
나는 옥좌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안 그래도 크록들 중에서 남다른 몸집을 자랑하던 녀석이, 그동안 대체 뭘 먹고 돌아다닌 건지 한층 더 거대해졌다. 이젠 그 혼자만 종이 다르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그는 야생 크록들을 규합하면서 존재의 진보를 이뤄냈음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막시무스를 최강의 크록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 같았다.
“명을 받은 대로 내 동포들을 모아 데려왔다. 이들은 이제 과거의 신앙을 버리고 우리와 한배를 타기로 결의하였다.”
“정말 잘해주었다, 카룩카이.”
나는 진심을 담아 그를 칭찬했다.
나브니가 보여준 환영에는 여러 디테일적인 허술함이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야생 크록의 존재감 상실이었다.
그녀는 카룩카이가 내 특명을 받아 자리를 비웠다는 걸 몰랐기에, 그 부분은 두루뭉술하게 뭉개지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무려 십오 년 만에 명령이 결실을 맺는 걸 체감하는 중이었다.
“소개하겠다. 앞으로 네 힘이 되어줄 장수들이다.”
카룩카이는 이어서 장군급의 크록들을 차례대로 불러냈다. 모두 네 명으로, 한 명 한 명이 마그나크록에게 불멸의 힘을 물려받은 자들이었다.
원래 세 명이 더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전투에서 우르술라에게 두 명이 죽고, 나머지 한 명은 끝끝내 설득에 실패했다고.
당연한 소리겠으나 그가 모든 야생 크록을 다 모아온 건 아니었다. 죽은 마그나크록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들도 상당수라는 듯했다.
“오늘은 경사스러운 일이니 국고를 열도록 하지.”
나는 왼쪽을 돌아보았다. 김형식 총리가 언제나처럼 내 곁에 공손히 시립하고 있었다.
“개선축제 때 미처 쓰지 못한 물품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창고 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묘하다.
그의 비위사실을 알기 전에는 저 웃음이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로밖에 보이질 않았는데.
이제는 늙은 모사꾼으로밖에 보이질 않네.
“그럽시다. 오늘과 내일 양일간을 새로운 동포를 맞이하기 위한 축일로 선포하겠습니다. 이날만큼은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합시다.”
사람들이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크록들은 본인들이 이런 환대를 받을 줄 몰랐는지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국경일에 국고를 여는 건 한국인에게는 낯설겠으나, 황국에서는 오랜 관습이었다.
우리도 고민 없이 그 관습을 채택했다. 새로이 일어서는 나라가 국민의 결속력을 돋울만한 이벤트로 제격이거든.
“대통령님.”
기뻐하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김형식 총리가 은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카룩카이 님을 따라 합류한 크록은 약 12만 명입니다. 이대로라면 분양이 안 된 주거지를 모두 내준다고 해도 9만 명 이상이 겨울밤에 노숙을 하게 됩니다.”
그래, 기쁜 건 기쁜 거고 현실은 현실이지.
주거지만 문제가 아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도 시켜야 한다.
먹고살 길도 마련해줘야 하고, 차후에는 정치적인 욕망도 채워줘야겠지. 나열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일이었다.
“접경도시 사정은 어떻습니까?”
“아직 대부분의 건물이 건설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텐트를 나눠주세요. 일단 집이 지어질 때까지만 버티라고 합시다.”
“난민을 다뤄본 경험이 도움이 되겠군요.”
“그리고 말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아무렇지 않은 투로 전달될 수 있을지 생각하며 말을 끊었다.
“나라가 근래 제법 커지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런 듯도 합니다. 이제는 저도 슬슬 힘에 부침을 느낍니다, 허허허.”
“슬슬 감찰업무를 담당할 부서를 만들어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명안이십니다. 시간을 주신다면 적합한 인사를 찾아서 명단을 올려보겠습니다.”
참과 거짓.
그 둘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엔 너무 많다.
김형식은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단 한 차례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직권남용을 한다든가 매관매직을 한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을 뿐.
질서의 에사인을 자처하려면 참과 거짓을 분간하는 것 이상의 권능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
“기대하죠.”
나는 김형식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에게는 이런 자리보다 더 적합한 형태의 결말을 마련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날, 정기호가 꼭두새벽부터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어차피 잠을 안 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값싼 사슬갑옷에 철투구, 족보도 없는 투박한 쇠몽둥이를 든 채였다. 황국 거리로 나가면 그와 꼭 같이 차려입은 자칭 모험가라는 족속들을 발에 채일 만큼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준비됐냐?”
“잠시 기다려.”
나는 라진으로 위장할 때 입던 갑옷을 놓고 잠깐 고민했다. 이건 모험가 행세를 하기엔 너무 값나가는 물건인지라.
쾅.
나는 주먹으로 갑옷 상판을 힘껏 후려쳤다. 장갑판이 주먹 모양으로 움푹 패이며 ‘한때 명망 있었으나 몰락해버린 가문의 망나니’ 룩이 완성되었다.
“됐다.”
“...너는 에사인이 되어서도 바뀐 게 없군.”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어.”
우리는 투구를 푹 눌러쓰고 궁을 빠져나왔다. 오늘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사람은 정기호 말고는 단 한 명, 박이나 실장뿐이었다. 그녀는 내 이름으로 일을 처리도록 맡겨도 좋을 정도로 신뢰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차를 타고 북쪽 요새도시로 이동했다. 요새도시는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해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끝없이 늘어선 텐트와 난민들 뿐이었는데, 이젠 제법 어엿한 도시 티가 났다.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 다다르자 정기호가 차량 속도를 늦췄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자.”
나도 그러자고 할 참이었다. 사슬갑옷 걸친 부랑자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하니까.
우리는 걸어서 북문 입구로 향했다. 북문은 여전히 입국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반면 나가려는 사람은 몇 안 되는 탓에,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의 시선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북문을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한 후줄근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데다,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생사의 고비를 숱하게 넘긴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눈빛이었다.
“스트리아로 갑니다, 기엔에 친척이 있어서.”
“마침 잘됐군요. 저도 스트리아로 갑니다. 길도 적적하고 하니 말벗이나 합시다.”
“안 될 것 없죠.”
그는 버틀린이라고 했다. 말주변도 좋고 붙임성도 있어서, 나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날 우러러보지 않는 일반인에게 날것 그대로의 의견을 들을 기회란 흔치 않았다.
가령,
“성문 나올 때 그거 보셨습니까? 벽에 더덕더덕 붙어있는 대포들. 성마족의 무기라고 합디다. 황제가 자기 아들을 뺏기고도 정글로 군대를 못 보내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랍니다.”
라든가,
“마그나크록이 쓰러지는 걸 못 보셨다고요? 저런, 자손 대대로 물려줄 이야깃거리를 놓치셨구만. 나는 아직도 가끔 그 흉측한 놈이 지르는 단말마를 꿈에서 듣습니다.”
라는 식의.
어느덧 날이 저물어갔다. 제법 먼 거리를 걸어왔건만 여전히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평평한 공터에 자리를 잡고 각자 가져온 배낭을 풀었다. 모르는 여행자들과 스스럼없이 음식을 나누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떠들다 날이 저물면 풀을 베개 삼아 잠에 드는 게 모험가들의 일상이다.
“정말로 세상이 망하려나 봅니다.”
난민들을 바라보며 버틀린이 말했다. 입에는 빵을 가득 문 채.
“황국은 아직도 전쟁 중이라지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 전쟁이란 소설책에나 나오는 이야기였는데, 어쩌다 나라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듣기로는 일곱 권능이 쓰러졌다는 소문도 있고....... 황제폐하는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지.”
그는 황제 이야기를 꺼내며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마치 회식자리에서 민감한 정치 이야기를 꺼내려는 사내동료 같았다.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에 따라 훨씬 더 민감한 주제가 될 수도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만은 확실합니다만.”
“내 말이. 아무리 마족들이 강하다고 해도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면 다 한주먹거리 아닙니까?”
“글쎄요, 그것도 저는 잘 모르겠군요.”
“후.......이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우리 가족이 무사하기만을 바라야지요.”
“가족을 만나러 가시나 봅니다.”
“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와봤죠. 남쪽 정글 깊숙한 곳에 귀족도 천민도 차별하지 않는 지상낙원이 있다기에. 내 눈으로 보니 소문이 현실만 못하더군요. 이젠 확인을 했으니 망설일 틈이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 스트리아령에 대해 들은 소식은 있으십니까? 저는 황국이 간만이라.”
나는 버틀린에게 빵조각을 더 건네며 넌지시 물었다.
“글쎄요. 저도 간만의 여행이라. 아, 대영주님이 그니르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요.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스트리아 대영주님이라고 하면 서부전선에서 큰 공을 세운 영웅이 아니십니까? 그런 분을 대우해주지는 못할망정 체포라니, 도대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그가 빵을 먹다 말고 혀를 찼다.
나는 이쯤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눈치채는 게 늦었다고.
그는 우르술라가 파견한 첩자 중 한 명이었다. 명분은 나와 정기호가 외유를 나선 이 순간에도 착착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