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67화
기상 (5)
물론 UA에게도 최소한의 대의는 있다. 황국이 정신계 마법을 무분별하게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힘들지.
우리가 벌이려는 게 단순한 세력전이 아니라 점령전이라면, 민심을 얻을만한 확실한 명분이 필요하다.
내 눈에 띈 건 대영주 이졸데의 명성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정기호의 동생이라는 사정까지는 잘 모른다. 그녀가 황제가 저버린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할 뿐.
하지만 좋은 일은 금방 잊히기 마련이고, 신앙의 힘은 여전히 굳건했다. 이졸데가 완전히 잊히기 전에 여론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끌어와야만 했다.
“밥만 축내는 떠돌이들을 드디어 써먹어보는 것일까.”
우르술라가 말하는 떠돌이란 모험가들을 지칭했다.
“덤으로 저에 대한 선전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졸데만 너무 띄우면 제 모양이 빠지니까요.”
“네 선전일랑 걱정 말거라. 황제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도록 만들어줄 테니.”
우르술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장담하니 불안해진다.
부디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어 던졌다는 소리만은 안 나왔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저는 올라가보겠습니다.”
“잠깐.”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건 선물이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얇은 서류철이었다.
“선물이라기보다는 일거리 같습니다만.”
“하지 말라는 짓으로 얻어낸 가십거리다. 보려는 자에게는 흉이고, 보지 않으려 하는 자에게는 티눈에 지나지 않을 일이랄까.”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었다. 평소 말을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인지라, 이유가 궁금해졌다.
나는 호기심을 넣어두고 우선 집무실로 올라왔다. 정보국이 명분을 쌓는 동안 나는 나대로 할 일이 많았기에.
이 전쟁에서 내가 맡을 역할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구심점.
여기에 대해서는 노코멘트하도록 하자.
자화자찬이 될 것 같거든.
둘째로는 승부사.
에신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지구와는 양상이 판이하게 다르다. 백만 군대를 섬멸하더라도 에사인을 죽이지 못한다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기에.
공화국을 대표하는 에사인인 내가 길레악이나 로켄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이 전쟁은 하나 마나라는 소리다.
때문에 부하들이 주어진 일을 하는 동안 나도 특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미 훈련을 도와줄 사람과 합의가 끝난 이야기였다.
그 전에 우르술라의 선물부터 확인을 해보도록 할까.
하지 말라는 짓이라면 십중팔구 도감청일 텐데.
- 불순분자 특이동향 보고
서류는 이런 대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 지난 일주일 사이 강남구 모처에서 김형식 총리와 삼경그룹 전무 이택길의 비공식 만남이 두 차례 이루어짐.
- 이후 김형식 총리는 삼경그룹에게 물류유통단지 개발사업권을 넘겨줌.
- 김형식 총리는 삼경그룹에게 받은 돈으로 궁궐 인근 땅을 대단위로 매입 중임. 자금의 규모로 보아 총리가 직접 관여된 부적절한 계약이 연내 최소 삼십여 건 이상일 것으로 추정됨.
- 김형식 총리는 그 외에도 매관을 위해 뇌물을 받는다는 혐의를 사고 있음. 이 부분은 확실한 증거가 없어 지속적인 감시 요망.
서류는 김형식 총리의 비위를 담고 있었다.
일전에 삼경그룹 김오중 회장이 우리나라의 유통망을 넘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내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누구도 그다음 이야기를 업데이트해주지 않았거든.
보아하니 업데이트해주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김형식 총리가 백로처럼 깨끗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건 건준위 시절부터 느꼈던 바였다.
그러나 고작해야 세상의 때가 묻은 정도의 죄업으로는 살인마가 드글거리는 세계를 헤쳐 온 내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의 하마평을 무시했고, 총리라는 직위까지 끌어올렸다.
사람은 쉽게 안 바뀐다더니, 내 안일함이 이런 식으로 돌아오나 보다.
생각해보니 괘씸하네.
이 양반은 법학자란 말이지.
내게 스카웃되기 전엔 법학과 교수였고.
학자이기 이전에 교육자였던 인간이 불법을 저지르면 어쩌자는 거냐고?
게다가 이 양반이 맡고 있는 일이 오죽 많나.
법대로 처리를 해버리면 당장 그날부터 국정공백이 생길 판이다.
똑똑.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바로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박이나 실장은 아니었다.
나는 누가 볼세라 서류를 책상 깊숙한 곳에 넣어버렸다.
“들어오시죠.”
“실례합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엘리시아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쌍의 검은 날개가 집무실 안을 꽉 채우는 듯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말씀드리기 난감합니다만,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청이 있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곤란한 듯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말씀하세요.”
“저도 종군하고 싶습니다.”
“......예?”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무런 보직을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저 일개 병사로서 전선에 서도 좋습니다.”
“국민이 엘리시아 님께 바라는 건 일개 병사가 되는 게 아니었을 텐데요.”
“잘 아시겠지만 저희 당은 이번 선거에서 고작 15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래서는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도 없는 의석입니다. 그저 국회에 나가 머릿수만 채우고 있어서는 소임을 다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가 가진 검술 소양을 살려...”
“진소미 때문입니까?”
엘리시아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것으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엘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더니, 고개를 들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께 마음을 숨긴다는 건 정말로 불가능하군요.”
“알기 어려운 이유가 아니어서요.”
“예, 진소미 님의 존재가 제 결정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저를 싫어하시는 것만은 확실하니까요. 지금은 한국에 가 계시지만, 곧 돌아오시겠죠. 만약 그분께서 절 보시고 그때처럼 또 말 한 마디로 제가 이룬 모든 걸 없던 것으로 되돌린다면, 이번에는 견디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감하다.
소미가 엘리시아를 방치하는 이유가 정말로 그녀에게 깊은 절망을 안겨다주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소미더러 복수는 그렇게 하는 거라고 가르쳐준 사람이 나였다.
엘리시아가 이끄는 정당이 견제해야 할 사람이 나이기도 하고.
꼬여도 어떻게 참 이렇게 꼬이나 싶다.
“왜 진소미가 당신을 싫어하는지 정말 모릅니까?”
“모릅니다.”
엘리시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저를 싫어하는 이유는 압니다. 저는 아쉬움 모르고 귀하게 자란 귀족가 여식입니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에게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진소미 님께서 저를 싫어하시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모자란 계집이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있다고 생각하셨겠죠.”
엘리시아는 분명 변했다. 밑바닥까지 떨어져본 경험으로 이젠 어느 정도 역지사지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라는 표현은 소미에겐 충분치 않을 거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이 전장에서 사망한다면 저로서도 면목이 없을 일입니다. 아직 출병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이후에 차차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리시아는 군말 없이 물러났다.
속으로는 조금도 납득하지 못했겠지.
어쩌면 나조차도 그녀를 싫어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다.
이 문제는 소미와도 터놓고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엘리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알아둬야 할 것 같으니.
끼이익.
엘리시아가 물러나자마자 바톤 터치하듯 다음 타자가 들어왔다. 정기호였다.
“벌써 시간 됐냐?”
그는 나와 검술을 연마할 파트너였다. 그러나 수련을 하자고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풍기는 기세는 엘리시아보다 훨씬 무거웠다.
“라힐, 방금 의회에서 결론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국과 전쟁을 한다던데.”
“맞아.”
“출병까지 얼마나 걸리겠나?”
“글쎄다, 충분한 명분이 쌓이길 기다리려면 반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면 늦다.”
정기호의 고리눈이 호랑이처럼 번뜩였다.
“내 동생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한 달 남짓이다. 상대는 그니르다. 그놈이 정의를 내세우며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벌여왔는지는 네가 잘 알지 않나.”
“잘 알지. 그렇다고 해서 준비도 안 된 군대를 무작정 밀어 넣을 수는 없어.”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내가 동생을 구하러 가겠다. 공화국 장군이 아니라 전사 야즈의 이름을 걸고.”
정기호가 이렇게 나오리라는 건 알았지.
정기호와 이졸데의 관계는 묘했다. 그들은 평범한 오누이처럼 살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졸데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항상 정기호가 곁에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겐 공화국 장군 정기호가 필요하다. 혼자 죽게 내버려 두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거든. 게다가 그 장군이 내 검술훈련 파트너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고.”
“날 막는다는 소리냐?”
“아니, 훈련을 실전에서 진행해보겠다는 소리다.”
정기호는 내 말뜻을 몇 초 뒤에 이해했다.
“...네가 같이 가겠다고?”
“내 마지막 실전이 언제인지 들어보면 놀랄걸.”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던 십오 년을 카운트한다면 말이지.
정기호의 놀라움은 잠시 후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해온 내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아차릴 수 없는 미세한 변화였다.
“그렇긴 하지. 최근엔 네가 너무 서류하고만 씨름을 해서 허벅지 살이 붙지 않나 걱정하던 참이다.”
“잘 봤어.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있지.”
“그러면 언제쯤 시간이 나나? 주변 사람들이 널 도무지 놓아주질 않던데.”
“글쎄. 내일?”
“빠르군.”
“쇠뿔도 단김에 빼랬으니까. 어차피 이번 주 일정은 죄다 훈련이라 할 일도 없어.”
그건 거짓말이다. 그래도 기왕 같이 가기로 한 거 그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끔 해주고 싶다.
“좋아. 나는 그러면........ 검이라도 닦고 있으마.”
“유서도 작성해둬. 놀러 가는 거 아니니까.”
“유서는 애저녁에 써뒀다. 포탈을 열기 하룻밤 전에.”
그가 피식 웃으며 집무실을 떠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하게 기지개를 켰다.
창틀을 넘어온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근위전사들이 앞마당에서 제식훈련을 벌이곤 한다. 거대한 크록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사뭇 장관이어서, 나는 별일 없는 한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뭔가 달랐다. 앞마당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정예 크록 전사들은 줄은커녕 근무를 서는 것조차 잊고 부산을 떨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에사인 체면에 영문도 모르고 군중 속을 기웃거릴 수도 없어서, 나는 창가에 몸을 기댄 채 고개만 밖으로 빼냈다.
잠시 후 한 크록의 외침이 앞마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카룩카이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이윽고 마그마 같이 짙은 비늘을 가진 거대한 크록이 계단턱 위로 성큼 올라섰다.
그리고 그의 뒤로 그 못지않게 커다란 크록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한때 마그나크록의 장군이라 불렀던 자들.
얼마 전 무기를 맞대고 생사결을 벌였던 그들이 틀림없었다.
행렬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특유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목갑을 걸친 야생크록들이 선두에 선 거대한 크록의 뒤를 끝도 없이 따랐다.
카룩카이,
나의 대사제.
그가 마침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