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59화
흘러간다 (14)
마그나크록의 피로 빚어진 유일무이한 주술형 크록, 화이트모카.
나는 그에 대한 평가를 속으로 몇 단계 상향조정해야만 했다. 그는 머지않은 미래에 크록의 영적인 지도자가 될 재목이었다.
이미 그는 그러한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몇 세대나 앞선 장군들이 갓 태어난 크록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래, 잘 부탁한다.”
나는 화이트모카와도 새삼스레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만든 당의 이름은 ‘위대한 여정.’
정당의 이름으로 어울릴법한 이름은 아니었다. 엘리시아가 지은 이름도 그렇고, 이쪽 출신들은 당명을 짓는 데 선입견이 없었다.
이리하여 세 개의 당이 공화국 정계에 정식으로 출범을 알리게 되었다.
앞으로 그들이 민주주의의 대원칙에 따라 기능을 잘하느냐는 전적으로 나 하기 나름에 달려있었다.
나는 헌법 위의 존재였다.
내가 그들을 무시하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공화국은 점차 퇴보하고 말겠지.
하지만 내게 존중을 받고 싶다면 그들이 그럴만한 자격을 보이는 게 먼저다.
“당수들께도 묻고 싶습니다.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와의 분쟁을 우리가 어떻게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먼저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함께하는 시민당 대표, 홍정수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사회운동가로서 이름을 알렸을지는 모르나, 정치로는 초년생에 불과하다. 그가 어떤 길을 제시할지 나로서도 궁금했다.
“먼저 도발을 해온 건 신성 위원회입니다. 국민들이 무려 스물다섯 분이나 돌아가시거나 실종되셨죠. 그분들의 한을 풀어드리는 건 저희가 금생에서 두고두고 지고 가야 할 몫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으로 도시 전체를 불태운다는 결정은 너무 과합니다. 저는 군대를 일으키지 않아도 충분히 외교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홍정수는 내가 목생족 도시를 불태운 일을 에둘러 비판했다.
홍정수는 누구나 바라는 꿈의 직장인 삼경그룹에 입사했다. 입 닫고 조용히 살았으면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렸을 텐데, 그는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말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홍정수 대표님께서는 사안을 너무 정치적으로 바라보시는군요.”
대귀족의 장녀, 촉망받던 전사단의 이인자. 이제는 신생 야당의 당수로 화려하게 변모한 엘리시아가 나섰다.
“이십오 명의 죽음이 전쟁을 일으키는 데 충분치 않았다면, 몇 명의 목숨이라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국민의 목숨을 꼭 그렇게 계량화해서 정치라는 이름의 저울에 매달아야만 하겠습니까?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접근법이 용인될지 모르지만, 제게는 아닙니다. 저는 국가란 국민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말씀이 좀 과하신 거 아닙니까. 저도 국민의 생명권을 지키자는 데엔 찬성한다니까요. 전쟁이 나면 더 많은 국민이 죽거나 다치니 신중하자는 거지요.”
홍정수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반발했다. 그는 상식선에서의 의견개진만 했을 뿐인데, 엘리시아가 그걸 그렇게 물어뜯을 줄은 몰랐나 보다.
나도 예상 못 했다.
홍정수가 반골이라면, 엘리시아는 투견이었다. 그녀는 후보자 토론상대였던 김치우도 본전조차 못 건질 정도로 사납게 물어뜯었더랬지.
그녀가 원래부터 저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지금 내 앞에 선 여인은 과거와 결별한 뉴 엘리시아다.
“신중은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했어야만 하는 겁니다. 공화국을 어쭙잖게 위협하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다른 나라에도 똑똑히 본보기를 보여야지요.”
“저도 대표님께 감정적으로는 공감하지만, 국가를 감정적으로 운영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저희 어깨에 수많은 국민들의 안녕이 달려있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수많은 국민들의 바람도 달려있죠. 국민들은 우리가 이 일을 그냥 묻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 말은 맞을지도.
크록들은 내가 다른 나라에 약한 모습을 보이길 원하지 않았다.
크록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은 전쟁이 물어다줄 기회를 반겼다.
자기 이름을 알리거나, 한몫 잡을 찬스라는 거지.
전쟁을 기피하는 건 오직 한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뿐이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게 그들인데도.
“두 당의 당론은 알겠군요. 그러면 이쯤에서 여당의 입장도 듣고 싶은데.”
“위대한 여정에 이르는 길은 일견 멀어 보이지만,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답이 보입니다.”
화이트모카가 두 손바닥을 하나로 모으며 뜬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재미나는 건 크록 장군들이 그와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는 거.
“여러분들은 스물다섯 명의 죄 없는 넋이 희생된 이유보다 희생된 방식에 더 주목해야만 합니다. 다들 아시겠으나 우리의 영도자이신 라힐 님께서는 죽은 후 다시 태어나 위대한 여정에 오르셨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영혼은 영속성을 띠고 세상을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화이트모카의 차분한 목소리가 대전을 조용히 잠식해나갔다.
“허나 저는 목생족에게 희생된 분들에게서 영혼이 순환한 징후를 읽지 못했습니다. 본질이 너무 뒤틀려버린 탓에 윤회를 하지 못하고 혼돈의 지배자인 다르마알의 손아귀로 떨어지고 만 것이지요. 여러분, 이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저지른 건 살인이 아니라 영혼의 말살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행위를 저지르도록 방기하는 것은 세상의 공리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전쟁을 하잔 말인가?”
“전쟁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입니다. 욕망의 에사인이 위대하신 분께 사죄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서로 피를 흘릴 일이 없겠지요.”
화이트모카의 의견은 홍정수와 엘리시아의 중간지점이었다.
불가피하다면 전쟁을 치르겠지만, 먼저 대화부터 나눠보자는.
그러나 나브니가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맹세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순간부터 그녀의 신격이 내 아래라는 걸 시인하는 셈이니.
“알겠습니다. 여러분들의 고견을 잘 들었습니다.”
나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박수는 한 손으로 칠 수 없지만, 싸움은 혼자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
아무리 내가 평화를 외친다 한들 저쪽에서 다짜고짜 머리채 붙들고 늘어지면 그때부터는 주먹질 오가는 거지.
참고로 먼저 주먹을 날린 건 저쪽이었다.
인부 건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저들은 대한민국에서도 익스티아를 퍼뜨리는 활동을 벌여왔다.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미국과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의 뻔뻔함이었다.
그들은 남의 땅에 흙발로 들어와, 남의 국민 목숨으로 서슴없이 장난질을 쳤다.
그러기 위해서 선전포고를 한 것도 아니고, 성명서 같은 걸 내지도 않았다.
마치 가게 진열대에서 사탕 빼먹듯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패륜을 저질렀다고.
저들에게는 해서는 안 될 일과 해도 되는 일의 구분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국제규범이니 체신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따박따박 지킬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다 내려놓고 싸우면 안 되나?
“...일단 UA가 하는 걸 지켜봅시다. 모처럼 중재에 나선다니.”
나는 복잡한 생각들을 생각을 안으로 갈무리했다.
보다 적절한 자리에서 꺼내기 위해.
밤이 깊었을 때였다.
집무실 창문이 조용히 열렸다.
곧 한 사내가 슬그머니 집무실 안으로 넘어왔다. 그는 도자기 화분과 책꽂이를 뱀 같은 유연성으로 피해가며 바닥에 착지했다.
“좀 정상적으로 다니면 안 되겠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습관이 되어서.”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정보국 소속의 요원이었다. 양복을 입은 것으로 미루어 지구에 배속된 자라는 것까지 식별할 수 있었다.
“오란이라고 합니다. 도쿄에서 누님을 모시다 오늘 아침부로 귀국했습니다. 그간의 활동내역을 보고드리고자 합니다.”
“듣겠다.”
“우선 의회 해산을 항의하는 시위가 일본 전역에서 큰 규모로 벌어지는 중입니다. 정부가 강경대응을 밝히고 경찰력을 대규모로 투입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사상자가 수백 명씩 나올 정도로 시위가 격합니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누님은 도쿄도지사와 손을 잡고 킬데인의 손에 떨어진 정부요인을 하나씩 암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꼭두각시를 아무리 많이 없애봤자 정세를 바꾸기는 힘들다고 하십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정부가 자위대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최근에는 거점을 도쿄에서 오사카로 옮겨야만 했습니다.”
“누님이 힘들다고 하실 정도면 그건 정말로 어렵다는 건데.......”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지옥이라고 봐야지.
일본은 정말이지 가망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봤자 중국만큼은 아니다만.
“알겠다. 여기에도 할 일이 많으니 그만 돌아오시라고 전해라.”
“그러겠습니다.”
“고생했다. 다른 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생각났다는 듯이 한마디 덧붙였다.
“목이 마르군요.”
“받아.”
나는 책상에 놓인 에너지 드링크 시제품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이걸 원샷한 현장소장이 감동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입도 못 벌리기에, 개발팀에서 사카린을 소량 첨가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오란은 음료를 품에 소중히 안은 채 다시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정상적으로 드나들라는 말은 그새 잊어버린 것 같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밤을 지새웠다. 어제 낮에 들여놓은 화두가 아직도 내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우리는 왜 다 내려놓지 못하는가 하는.
아침이 되자, 언제나처럼 박이나 실장이 가장 먼저 날 찾았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를 책상 위에 내려놓더니, 에너지 드링크를 저만치 밀어버리며 말했다.
“그 숭한 거 대신이에요.”
“숭하다니요, 이젠 꽤 맛이 납니다.”
“그러면 차는 물릴까요?”
“아닙니다. 감사히 마시도록 하죠.”
나는 군말 없이 그녀의 호의를 받았다. 내가 찻잔을 기울이는 사이 그녀는 어질러진 집기들을 정리하고 새 서류를 착착 내려놓았다.
“이젠 비서를 따로 둬야겠습니다. 언제까지 실장님을 수고스럽게 할 순 없으니까요.”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그녀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나저나 모리스 대사가 아침부터 또 접견을 요청해왔어요. 중재 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네요.”
“벌써 말입니까?”
“저도 그게 이상해요. 여기까지 통신망을 깔아뒀을 리는 없을 텐데요.”
“....얘기나 들어보죠. 들어오라고 하세요.”
잠시 후 UA 직원 두 명이 바퀴가 달린 철제의자를 밀며 나타났다. 모리스 대사는 언제나처럼 모니터 안에서 웃는 모습인 채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라힐 대통령님.”
“글쎄, 기계에게 좋은 아침이란 어떤 의미일지.”
“대통령님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뜻한 햇살과 좋은 차가 함께하는 때죠.”
모리스 대사의 손에 찻잔이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마주 보며 찻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나는 그녀의 제스처가 조롱인지 진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중재 건은 며칠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저희는 저희 나름의 연락수단이 있답니다. 헤인스 보좌관도 저희와 실시간으로 대화를 주고받곤 했었죠.”
“그렇다고 치고, 용건은?”
“우선 대화에 응해주신 라힐 님의 결단에 깊은 감사의 말씀부터 전하고자 합니다. 사무국은 늦어도 일주일 내로 공화국과 신성 위원회 양국 정상이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드릴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