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58화 (158/205)

158화. < 흘러간다 (13) >

화이트모카, 차수진 박사의 역작.

하마터면 그를 잊을 뻔했다. 홀몸으로 국정 전반을 아우르다보니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새고 있던 건 김인재도 마찬가지였다. AI라는 게 혼자서 연구를 시도할 만큼 만만한 분야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더군다나 공화국은 그런 첨단산업에 관한 한 아무런 인프라도, 인재양성시설도 세워두지 않았다.

예산을 배정하기나 했던가?

"제 생각에 김인재 님은 좀 더 큰물에서 노셔야할 것 같습니다.”

"저, 저는 지금 이대로도 족합니다.”

김인재는 진심으로 당황한 것 같았다. 갑자기 이야기가 왜 자기를 향해 흐르나 싶겠지.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의 천재성을 받쳐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차수진 박사님의 연구팀이 기술의 한계를 주술로 넘기 위한 다양한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컴퓨터공학에 관한 한은 아무런 프로젝트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팀을 짜드린다면, 이 분야로 각 잡고 연구를 진행해보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저는........"

그가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연신 흘러내렸다.

- 머리 돌려라.

나는 구경하던 크록 장군들에게 사념을 보냈다. 그들은 흥미로울지 몰라도,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입장에서는 호러도 그런 호러가 없다.

크록 장군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김인재는 여전히 주변 눈치를 살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는 혼자 일하는 게 편하긴 하지만, 팀을 만들어 주신다면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박이나 실장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한국에 채용공고를 낼게요. 면접은 김인재 님이 보시면 될 것 같고요.”

"제, 제가요?”

"같이 손발을 맞출 동료를 뽑는 일이니, 직접 보시는 게 당연하겠죠.”

“저는.......그러면 좋겠지만.......”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박이나 실장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저렇게 자상한 어조로 말하는 건 오르기의 앞이 아니고서는 없었던 일이었는데.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김인재가 어렵사리 승낙했다.

나는 일부러 그에게 어떤 연구를 해보라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애드라이너 직원으로 일할 때 숱하게 느낀 바이다만,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안하느니만 못한 게 대부분이었다.

약은 약사에게, 업무는 전문가의 재량에.

내 역할이란 그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돈과 인력을 대주는 것뿐이다.

오르기는 명령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는 일개 사단, 약 2천여 명의 병력을 끌고 가서 건설중이던 목생족 접경도시를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이 과정에서 목생족의 반발도 만만치가 않았다.

주목할만한 강자들간의 대결이 보고되었다. 목생족의 주자로 나선 자들은 그들 세력의 미래를 책임질 신진이었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주장 오르기, 부주장 막시무스.

오르기와 막시무스는 목생족 장군의 수급을 세 개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잿가루만 남은 전장에 전승비를 세웠다.

그리고 그날 우리가 물리친 군대의 다섯 배가 넘는 목생족 군단이 동쪽 숲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장 국경을 넘지는 않았다. 주사위가 굴려지길 기다리던 로마 군단처럼, 진채를 차린 채 서쪽 숲만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사정이 그렇게 됐으니 양해 바란다.”

나는 UA 대사 모리스를 앉혀놓고 우리가 강공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저들이 먼저 도발을 해왔기에 자위권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는 오래 전부터 UA 회원국들의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위원장인 나브니는 욕망을 장려한다는 이유로 많은 종족들을 타락시켜 혼돈의 품으로 끌어들였죠. 목생족이 가장 큰 피해자입니다만, 이제는 가장 큰 가해자가 되고 말았군요.”

드디어 나브니가 세웠다는 욕망의 왕국의 정체가 밝혀졌다.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

그 이름은 과거 엘리시아의 입을 통해서도 들어본 바가 있었다. 일찍이 황국과 전쟁을 벌여왔다는 열세 개의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면 너희도 이제니오스와 전쟁중이라는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성 위원회는 현재 동부전선에서 황국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거슬리는 이웃이긴 하지만, 굳이 적의 적과 다툴 필요는 없다는 게 회원국 수장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렇다면 회원국 중 하나인 우리의 입장은 어떻게 정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우선 군대를 물려주시지요. 신성 위원회는 에신 공화국이 UA의 회원국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알았더라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불미스러운 일이지요.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중재에 나서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재가 가능하겠나? 이미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는데.”

“그보다 더한 일도 중재해본 적이 있습니다.”

모니터에 비친 여성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처음으로 그쪽 덕을 보게 되겠군.”

“UA는 언제나 회원국의 최대한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대전 귀퉁이에 대기시켜둔 화이트모카에게 사념을 보냈다.

- 무엇이 보이나?

하얗고 깡마른 크록이 모리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후 나만큼이나 완숙한 슴씨로 사념파를 보내왔다.

- 창백한 영혼이 보입니다. 강렬한 집착,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갈망, 뒤틀린 기쁨이 느껴집니다.

역시 모리스는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영혼이 깃들어있었다.

마그나크록이나 오데르처럼 자신의 추종자를 직접 만들어내는 에사인도 존재한다.

하지만 나브니는 그런 류의 권능을 지닌 것 같진 않았다. 굳이 인간이나 목생족을 데려다 쓰는 걸 보면.

그렇다면 모리스에 깃든 영혼은 외부에서 추출한 것일 확률이 높다.

말해 무엇하겠냐만, 영혼을 다루는 술법은 황국에서조차 금기시된 금단의 기술이다.

"기분이 좋아보이시는군요.”

"그럴 수밖에. 전쟁 배상금으로 한몫 잡을 생각하니 웃음이 멈추질 않는걸.”

나는 말을 아꼈다.

아군적군 할 것 없이 미친놈들뿐이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으므로.

"외람되오나 배상금을 받아내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는 공화국보다 훨씬 큰 나라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먼저 도발해온 게 신성 위원회측이라지만, 피해는 공화국이 몇 배나 크게 입혔기 때문에...”

“아까는 회원국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 않았나.”

"실현가능한 이익의 경우에 한하여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실현가능한 이익이 발생하도록 부단히 경주해다오. 적어도 군대를 움직이는 데 들인 비용만큼은 회수를 해야 할 테니.”

"장담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UA 사무국에 라힐 대통령님의 확고한 뜻을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리스가 한 발 물러섰다.

고집을 피우는 이유는 UA의 역량을 떠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아직 서로가 가진 힘을 잘 모를 때인지라, 이때가 아니면 언제 배짱을 부려보나 싶기도 하고.

모리스가 대전을 뜨자, 우리의 대화를 들은 측근들이 한 마디씩 주워섬겼다.

크록 장군들은 대체로 중재에 찬성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언제나 피를 볼 기회에 달아올라 있었다.

반면 한국 출신의 영입인사들은 어떻게든 전쟁을 평화적으로 마무리하기를 원했다. 박이나 비서실장과 김형식 총리가 반전파를 이끌었다.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는 낯선 얼굴들도 있었다. 장차 이 나라를 함께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십이 되어줄 사람들이었다.

"라힐 대통령님께 삼가 인사 올립니다. 함께하는 시민당 대표를 맡은 홍정수라고 합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홍정수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외모를 가진, 30대 초반의 젊은 정치인이었다.

유난히 젊은 나이만큼이나 특이한 건 그의 이력이다.

그는 선거에 당선되고 당대표를 맡게 되기까지 단 한 번도 정치에 몸을 담아본 적이 없었다.

홍정수란 이름 석자가 세상에 알려진 건 삼경그룹의 노조 탄압 문제를 언론에 처음 폭로하고 나면서부터였다.

공익을 위한 용기있는 결단이라며 주목을 받은 것도 잠시, 언론의 관심은 금세 다른 이슈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잊힌 채 다니던 직장에서 짤렸고, 거대 로펌과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재판은 패소, 개인은 빚더미.

남은 건 한강물에 뛰어드는 일뿐이었다.

그는 대신 에신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의 표층의식에 자리 잡은 불안함을 손쉽게 읽어냈다. 나도 여느 위정자들과 똑같은 인간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겠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두고 싶다. 다른 건 둘째 치는데, 나처럼 직접 손에 피를 많이 묻혀본 위정자는 드물다고 자부하거든.

"임기가 4년이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4년간 많이 바쁘실 겁니다. 같이 한 번 잘해봅시다.”

우리는 훈훈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함께하는 시민당은 주로 한국에서 건너온 이민자와 망명자로 이루어져있다. 크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구성원은 한국말을 쓰는 인간이라고 보면 된다.

경험이 많고 교육수준도 높으니만큼 이번 선거를 통해 만들어진 세 개의 당 중에서 가장 교섭력이 뛰어나리라 예측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잊힌 영광이라는 당을 이끄는 엘리시아 마르밀입니다.”

이 만남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엘리시아가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

그녀는 마치 조문을 온 상객처럼 위아래로 검은 정장을 빼입고 출석했다.

황금 갑옷을 걸쳤을 때는 추하게만 보이던 날개가, 검은색 의상과는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나를 처음 뵙는다고 말했다.

그간의 기억이 삭제됐을 리는 없을 테니, 이건 그녀의 정치적 의사표명이라고 봐야겠지.

정파의 당수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반갑습니다, 엘리시아 님. 토론하시는 모습을 보고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앞으로 많은 활약 부탁드립니다."

"공화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엘리시아가 검은 날개를 반듯하게 접으며 내게 허리를 굽혔다.

“........대단한 분이시네요.”

박이나 실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누구 들으라는 말은 아니었으나, 나는 똑똑히 들었다.

엘리시아는 방금 그 말, 신명을 다하겠다는 대사를 한국어로 말했다.

게다가 허리를 굽히는 인사법.

황국에는 없는 인사법이다.

그녀는 선거를 치른 것도 모자라, 한국의 문화에도 놀라운 속도로 적응을 해내는 중이었다.

그녀의 표층심리는 홍정수보다 훨씬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가 마음을 조금도 숨기려들지 않았기에, 나는 무리 없이 그녀의 내면에 접속할 수 있었다.

엘리시아의 마음속을 채운 건 강한 집념이었다. 그녀는 울토르의 죽음과 난데없는 좌천, 동료들로부터의 멸시 등 연이은 역경을 겪으며 훨씬 단단해졌다. 그녀는 쉽게 절망하지 않을 각오,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 무엇이건 감수할 각오를 마쳤다.

곧 투시즌의 새로운 앨범이 발표된다.

엘리시아가 바닥에서부터 아득바득 이를 악물고 기어 올라온 걸 소미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

엘리시아가 만든 조직, ‘잊힌 영광’은 짐작했듯이 난민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정당이다. 그녀의 정당은 180석 중에서 고작 15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홍정수의 함께하는 시민당이 72석을 확보하여 제 1야당이 되었고, 나머지 한 당이 남은 93석을 차지해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여당 당수는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은 듯했다. 아직까지도 인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는 걸 보면.

나는 박이나 실장을 가까이 불러 조용히 물어보았다.

"여당은 사람을 안 보냈습니까?”

"여당 당수께서도 자리에 와계십니다.”

그녀가 이름을 말해주기 전이었다.

쿵, 쿵, 쿵.

갑자기 크록 장군들이 가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숨길 수 없는 존경의 염이 가득했다.

여당은 크록을 주축으로 한 당이었다. 당수는 당연히 크록들에게 가장 존중을 받는 크록의 몫일 터였다.

하지만 내 눈엔 카룩카이도, 막시무스도, 크롱크도 보이지 않았다. 최초의 1세대라 불리는 다섯 장군들도.

대신 나선 건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진 크록이었다.

화이트모카.

"형제들을 대표하여 다시금 인사드립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그가 내게 미소와 함께 인사를 올렸다.

158화 < 흘러간다 (1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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