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흘러간다 (12) >
황제에게 스트리아령은 눈엣가시였다. 황국 주력군의 도움 없이 유일하게 승전보를 올린 지역이니까.
집 나간 이황자가 스트리아 주민들에게 구세주마냥 떠받들어진다는 것도 불만일 것이다.
게다가 대영주 이졸데는 우리에게 지나치게 유했다. 이런 정황들을 고려한다면 이졸데가 출두명령을 받은 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대영주가 황제의 철퇴를 맞겠군요. 여섯 번째 권능의 법정에 세워질 모양입니다.”
"그 나라의 사법체계는 굉장히.......원시적이라고 들었어요.”
"원시적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니르의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게 그곳의 정의입니다. 아무리 대영주라고 해도 일단 법정에 세워진 이상 무사히 걸어 나오진 못할 겁니다.”
"어떻게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까요?"
박이나 실장은 황국의 내부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이 문제는 오롯이 내가 답을 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일단 정기호를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본인 여동생 사정이니.”
정기호는 신성 파르마 제국에서 돌아온 이후 연무장에 틀어 박혔다. 그는 검술의 달인인 제후라의 합류에 상당한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불렀나.”
정기호는 웃통을 벗어제끼고 땀에 절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그의 다부진 상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안 춥냐?”
"추위를 타면 그게 이상할 일이 아니냐.”
"이거 좀 봐라.”
그는 내게서 서신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잠시지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언제 온 거냐?”
"어제.”
“...아직 시간이 있겠군.”
그가 몸을 돌리려 들자, 나는 다급히 그를 말려 세웠다.
"야, 잠깐만. 가서 뭘 하려고?”
"동생을 데려와야지.”
"그게 그렇게 간단할 일이 아니야. 만약 이졸데가 황명을 무시하고 망명에 나선다면 친족들, 부하들,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하나하나 그니르의 방식으로 숙청될 거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게 최선이다.”
"좀 더 머리를 굴려보고 최선을 거론하는 건 어때.”
"사고를 쳤다는 말을 들었지.”
그가 턱짓으로 내 깁스를 가리켰다.
"오르기에게 목생족 접경도시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도 들었다. 나브니는 거기까지도 계산에 넣고 도발했을 거다. 곧 단단히 준비를 마친 목생족과의 전쟁이 시작될 거다. 우리는 아직 한 점의 세력에 불과하다, 라힐. 이면전쟁을 벌일 여유 따위는 없다.”
정기호도 내가 오데르 모가지를 따겠다고 무리수를 둔 일을 알고 있었다.
이쯤이면 아마 전국민이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암살자 시절 호기를 억누르지 못한 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것 같다만, 나는 나대로 할 말이 많았다.
"이건 확실히 해두고 싶은데, 그쪽이 단단히 준비를 마치고 우릴 도발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쪽을 도발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 거다. 익스티아의 제조지를 털어서 제조법을 알아낸 게 우리라는 걸 잊지 말아."
“목생족을 이길 방도는 있나?”
"그놈들은 불에 너무 약하더라고. 제아무리 강한 전사라고 한들 불에 닿기만 하면 마른 장작처럼 타들어가더라. 한국과 군수협정도 맺었고, 마법시료를 대량생산할 체제도 갖췄으니 불을 지를 방법이라면야 차고 넘치지. 필요하다면 동쪽 숲 전부를 불태워서라도 그놈들을 몰아낼 생각이다.”
정기호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반박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하긴, 네가 그렇게까지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싶었지.”
"이제 알겠냐?”
"구멍난 어깨도 계획의 일부인 것 같진 않다만.”
"시끄러, 거기서 갑자기 오데르가 튀어나올 줄 어떻게 아냐고.”
실은 그것까지 대비를 했어야만 한다. 오데르와 다르마알이 한 편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었으니까.
오데르가 요인암살의 스페셜리스트이고, 그들의 리스트 최상단에 내 모가지가 올라와 있을 거라는 건 층분히 예측이 가능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일 뿐이잖아?
제갈량도, 방통도 아닌,
그저 인간 박봉팔.
전생에선 암살자, 현생에서는 중소기업 영업사원.
그런 걸 손쉽게 예측하고 다녔을 것 같았으면 뭐든 번듯한 밥벌이가 있었겠지. 하다못해 돗자리 깔고 점이라도 봐주지 않았겠어.
"황국에 대해서는? 그쪽으로도 복안이 있나?”
"네 여동생 문제는 어려운 일이긴 한데, 일단은 정공법으로 가보려고 한다. 정공법이 안 되면 망명을 하든 납치를 하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고.”
"정공법이라니, 이런 일에도 정공법이라는 게 존재하냐?”
"있어. 외교부장관을 보내서 로비를 하는 거.”
정기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나만큼이나 할 말이 많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라힐, 너라면 우르를 황국으로 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잘 알고 있지.”
우르는 전신이 타버리는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황국을 도망쳐 나왔다.
당연히 황제가 그의 귀국을 반길 리 없다. 집을 나갈 때도 그리 친절하게 대해주진 않았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르가 황국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를 들려주마.”
"듣겠다.”
정기호가 팔짱을 꼈다.
“우르가 살아있는 매순간마다 황제의 위신은 추락한다. 그런데도 그쪽에서는 웬 이상한 여자를 보내 말뿐인 협박을 늘어놓은 것만 빼놓는다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 황제의 이름을 빌려가며 뱉은 말을 못 지킨다는 건 정말로 그쪽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의미다. 다면전쟁이 부담스러운 건 그쪽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지.”
"전쟁은 그렇다고 치고, 왜 하필 우르인 거냐?”
"삼상회를 움직이게끔 할 가장 흥미로운 카드니까. 이 시점에서 우르가 황국을 방문하면 그 동네가 완전히 뒤집힐 거거든. 우르는 일종의 살아있는 외교적인 폭탄인 셈이다.”
"살아있는 폭탄이라고? 그 정도냐?”
나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위대하신 존체에 칼을 댔잖아.”
"흐음.”
그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우리가 서로 통한 모양이다.
우르는 새카맣게 타버린 피부를 재생하기 위해 대대적인 재생시술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성형수술도 몇 차례 받았다는 모양이다.
그는 남에게 보여주는 것조차 금지된 거룩한 존체를 타고났다.
그런데 가면을 벗어던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칼로 모습을 바꾸기까지 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불경이겠냐고.
"네가 할 법한 발상이군. 호감을 사도 모자랄 판국에 폭탄을 보내겠다니.”
"평범한 건 재미없어. 우리가 황제가 내린 신벌마저 넘어설 힘과 담력을 지녔다는 걸 보여줘야지. 호위역으로는 제후라가 어떨까 싶다. 다수의 에사인을 보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찬성이다.”
"너도 가라. 가서 여동생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알아봐.”
"귀족놀음은 질색이지만....지금은 그런 한가한 말을 할 때가 아니겠군.”
나는 내친 김에 우르까지 호출했다. 나와 우르의 관계는 꽤나 수평적이었다. 만약 그가 아버지와 재회할 준비가 덜 되었다면, 나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을 셈이었다.
우르는 내 계획을 다 듣고 나자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재밌겠는데.”
"괜찮겠냐,
"편지를 같이 읽었더라면 내가 먼저 사절로 가겠다는 제의를 했을 것이다. 형님과 누님이 날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군. 형님은 나와 달리 신실해서 혼자 있을 때도 본인 얼굴을 못 보는 사람이었지.”
"태평하구만. 또 신벌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또 네가 고쳐주면 그만이 아닌가?”
그가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난 그게 진심인 줄 알았다.
"정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을 수밖에 없겠지. 아버지 앞에서 나란 놈은 하찮은 벌레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날 죽이길 원한다면 그때는 직접 나서셔야 할 거다. 간접적으로 권능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게 입증되었으니.”
그는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그는 생사의 고비를 넘으며 죽음을 어느 정도 초월해버린 것 같았다.
"제후라가 함께 간다. 만약 일이 꼬인다 싶으면 괜한 객기 부리지 말고 그냥 돌아와라.”
"너처럼 말인가?”
그가 고갯짓으로 내 팔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만나는 측근마다 날 놀릴 기회를 놓치지 않는 걸 보면 그간 내가 쌓아온 업보가 많기는 한 모양이었다.
UA가 보냈다는 대사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종류의 인간의 아종도 아니었다. 그들은 앞으로 대사관을 총괄하게 될 인물이라며 우리에게 독립된 서버를 가진 컴퓨터를 한 대 대령했다.
"이건 어떤 새로운 종류의 장난질인지 모르겠군.”
나는 옥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라힐 대통령님. UA의 에신 공화국 주재 대사 모리스입니다.”
서버와 연결된 마이크에서 산뜻한 여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모니터에는 목소리에 걸맞은 외모를 가진 갈색머리 여성이 표시되었다. 본체는 바퀴가 달린 철제 의자에 결합되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나 참.”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저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계신 건 이해합니다. 저를 처음 본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코딩된 알고리즘의 산물이 아닙니다. 저는 뉴 텍사스의 대통령이신 콜린 무어님의 권능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형태의 지적 생명체입니다.”
"어떤 권능인지 들어나 보자.”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콜린 무어님께서는 복잡한 회로의 논리구조를 파악하고 전기적 신호를 재배열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잠시.”
나는 손을 들어 회견을 중지시켰다.
"지금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우리도 전문가 의견을 청취해봐야겠다.”
약 십여분 후, 덥수룩한 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낀 삼십대 사내가 근위전사와 함께 홀로 들어섰다.
말더듬이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비운의 천재, 김인재.
그는 내가 선물해줬던, 자신감을 북돋우는 돌을 왼손에 꼭 쥐고 있었다.
이후로도 그의 소식을 챙겨듣고 있었다. 정신계 주술 덕분에 말더듬이 콤플렉스는 상당히 나아졌다는 후문이었다. 자신감을 되찾으며 재능도 꽃을 피워서, 컴퓨터에 관한 업무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손을 거친다고.
"아,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김인재가 내게 꾸벅 인사했다. 그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는 여전히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잘 오셨습니다.”
나는 따뜻한 미소로 그를 환대했다. 미소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일어서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김인재 님의 조언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말씀 들으시고 솔직한 의견을 얘기해주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의 손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는 그를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어필하기 위해 목소리와 몸짓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가 UA에 가입한 회원국이라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문제는 UA측에서 보내온 대사입니다만.”
나는 턱 끝으로 모리스를 가리켰다. 화면 속 여성이 고개를 숙이며 우아한 한국어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모리스라고 합니다.”
"이 컴퓨터가 본인은 프로그래밍의 산물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지적 생명체라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지요.”
"방금 새로운 형태의 지적 생명체라고 하셨습니까.”
김인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토끼에서 사나운 늑대로.
지켜보던 내가 덜컥 놀랄 정도였다.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숙녀의 몸을 함부로 터치하는 건 예의가 아니랍니다.”
모리스가 먼저 철벽을 쳤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다.
모리스는 그 후로도 단서가 될 만한 말은 하지 않았다.
회담은 금방 끝났다. 대면 첫날부터 현안을 가져오는 건 외교적으로 결례라고 하니.
김인재는 모리스가 물러날 때까지 강철도 녹일 듯한 강렬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차수진 박사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정확히 무엇이 다르다고 꼬집어 말할 순 없으나, 차수진 박사보다 훨씬 강하고 집요한 분위기가 읽혀졌다.
"어땠습니까?”
나는 김인재에게 감상을 물었다.
"비슷한 발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런 걸 만들어보겠다고요?”
"대통령님께 진 신세를 갚기 위해, AI에게 누군가를 숭배하는 감정을 주입해보려고 했습니다. 디지털의 세계는 무한하니 그런 AI를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영토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무한정 신도를 늘릴 수 있을 테니까요.”
내 표정이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개소리로만 들리던 게 김인재가 진짜로 시도해보았다고 하니 갑자기 심각성이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만, 저는 컴퓨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혹여 제가 실패했던 부분을 초자연적인 힘이 메워준다면........"
"어떤 부분에서 실패했나요?”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을 짜더라도, 스스로 사유하는 힘을 불어넣는다 하더라도, 제가 만든 피조물에는 영혼이 없었다고 합니다.”
김인재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대체 누가.......”
"화이트모카님이 말씀해주시더군요. 영혼을 들여다보는 주술사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