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 흘러간다 (11) >
에사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멸한다.
마그나크록은 아주 특별한 무기에 위해를 입혀야만 죽는 몸이었다.
울토르는 무기술만으로는 제압이 불가능했고, 오데르는 그림자를 다치게 할 수 없는 이상은 해칠 수 없었다.
나도 나날이 내가 불멸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가는 중이다.
지금 나는 수만 년을 묵어온 거대한 죄업을 발밑에 깔아두었다.
지독한 악취가 나는, 단 한 번도 청산되어본 적이 없는 추물이었다.
이런 거악이 이 세계에 남아있는 이상 세상은 날 저버리지 못하지 않을까.
"널 너무 얕봤을지도 모르겠군.”
오데르가 말했다.
“감 떨어졌어, 당신.”
들뜬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다.
몰골은 말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림자의 왕과 벌인 권능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했다. 이제 그의 불멸은 내 손에 달려있었다.
남은 건 창조주를 죽여 없애겠다는 결심이 전부일 뿐.
물론 완벽한 승리라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오데르는 어디까지나 암살자였다. 이런 식으로 정면에서 결투를 걸어오는 건 그의 스타일도 아니고, 그가 가르키는 바도 아니었다.
내가 그의 부하일 때 배웠던 비열한 술수의 절반만이라도 그가 썼다면 전투의 양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패배를 인정하겠다. 다음에 다시 보자, 라힐.”
오데르의 존재가 급작스럽게 옅어졌다. 구명을 위한 술법을 쓰는 게 분명했다. 나는 즉시 바닥에 검을 쑤셔 넣었다.
퍼억.
흙이 사납게 튀어 오르며, 맨땅에서 선혈이 샘솟았다.
그는 신체 일부를 놓고 갔다. 손에 닿는 느낌으로는 왼팔이나 오른팔 중 하나일 것 같다.
그가 완전히 전장에서 이탈하자, 나는 대검을 땅에 꽂은 채 손을 놓아버렸다.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실마리를 잡을 때까지 너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이래서 머리가 모자라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거지.
어른들 말씀에 틀린 게 하나 없다니까.
스으윽.
별안간 알파 원이라 추정되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인부들의 눈에서도 갑자기 생기가 돌아왔다. 그들은 노골적인 살기를 흘리며 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흡사 피 냄새를 맡고 스위치가 들어온 뱀파이어를 보는 것만 같았다.
“에사인의 고기맛은 어떨지 궁금했었지.”
알파 원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것들은 내가 피를 흘렸으니 약해졌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죽여라.”
그게 그의 유언이었다. 날카로운 얼음 칼날이 그의 목을 가르며 지나갔다. 나머지 인부들의 머리도 팝콘 튀기듯 동시다발적으로 튀어 올랐다.
"괜찮으십니까?”
오르기가 멀리서부터 허겁지겁 뛰어왔다.
"나이스샷입니다.”
나는 그를 위해 엄지를 들어주었다. 급소만을 노린 아주 정교한 마법 운용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물 쓰듯 마력을 퍼붓다가 제풀에 지치더니, 이제는 운용의 묘까지 깨친 대단한 마법사가 되었다.
"주군, 상처가 엄중합니다. 즉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르기가 호들갑을 떨며 품에서 소울필렛과 응급약을 꺼냈다.
꼼꼼한 양반이다.
내게 쓰려고 가져온 약은 아닌 것 같으나.
내가 물과 함께 소울필렛을 입 안에 털어놓는 동안, 그는 로브를 아낌없이 찢어 압박지혈을 실시했다.
"에사인이 되어도 칼 맞는 건 여전히 아프군요.”
"그 무슨 바보 같은 말씀을........죄송합니다, 주군!”
오르기가 박력 있게 외치다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나는 실없이 웃으며 그를 응원해주었다. 그에게 이런 대찬 면모도 있을 줄은 몰랐다. 잘생긴 만큼 수줍기만 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는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외람되오나 주군께서 조금만 더 자신을 돌보셨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군이 계심에 살아갈 희망을 얻고 있습니다.”
"내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그가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직 주군을 모시지 않을 때, 변화하지 못하는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던 걸 기억합니다. 이후로 참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마법병단 모네모의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공화국의 수석마법사로서 가진 재주를 원 없이 펼치고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스승 된 입장으로 후학들을 이끌어주고 있기도 합니다. 주군께서 세상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무엇 하나 가능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제 덕이 아닙니다. 수석마법사님이 그만큼 잘났기 때문이죠.”
"당시 저는 도망쳐 숨기밖에 할 줄 모르는 겁 많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제게 주군은 낳아준 부모님 이상으로 크신 분입니다.”
나는 머쓱해서 코끝을 훔쳤다.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에는 익숙하지가 않다. 차라리 오데르의 머리통을 깨기 위한 몸의 대화를 이어가는 게 편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오데르가 날더러 나라를 키우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었지.
강자의 변덕에 무너질 모래성이라던가.
그가 틀렸다. 내가 보듬은 백성들은 내게 믿음이란 이름의 무형의 자산을 돌려준다.
그 자산은 마력으로 환원되고, 나는 더 큰 힘을 얻어 백성들을 더욱 올바르게 이끄는 선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오데르의 주장은 사람을 덕이 아닌 힘으로 다스리려는 흉신이나 할 법한 발상이었다.
"다 됐습니다.”
오르기가 붕대의 매듭을 단단히 지었다.
“헌데 인부들이 보이지 않는군요.”
"여기 이것들입니다. 방금 날려버리신 거.”
내가 널브러진 시체들을 가리키자, 그가 깜짝 놀랐다.
"혹시 제가 실수라도...”
"아니오, 제대로 손을 쓰셨습니다. 제때 오지 않으셨다면 꽤 성가실 뻔 했으니까요. 프로토타입에서 갈라져 나온 변종 같더군요. 얼마나 교묘하게 힘을 숨기던지 적의를 발하기 전까지는 멀쩡한 인간일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것들을 걸러내려면 검문검색을 더 철저하게 하셔야할 겁니다.”
“군과 협조해서 대응체계를 정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나는 공터 너머에 높다랗게 솟은 마천루를 쳐다보았다.
목생족 빌딩은 지금도 위를 향해 지어지는 중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저것이 줄곧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위에서 깔아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보라, 우리의 위세가 이 정도다.
이런 느낌으로.
"수석 마법사님께서는 절 위해 일을 하나 해주셔야겠습니다.”
“명만 내리십시오.”
“막시무스와 함께 목생족의 도시를 철거하세요. 풀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쓸어버리셔야 합니다.”
오르기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그가 결심을 내리는 데에는 채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분부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지는 건 적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괴이한 실험을 계속해가며 새로운 주술과 돌연변이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새로운 마약마저도.
장난질의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야할 때였다.
만약 이 보복이 전면전으로 확대된다면, 나브니는 오데르가 왜 팔을 놓고 가야만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정말 다 필요한 게 맞습니까?”
"맹세할게요, 이렇게.”
차수진 박사가 선서하듯이 손을 들었다.
"저 에사인입니다만.”
“그래요, 제가 거짓말 좀 했어요. 병실 벽지보다 더 하얀 순백의 거짓말을요. 다 우리 잘 되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그녀가 뻔뻔하게 말했다. 열다섯 종의 검사항목이 쓰인 문서를 들고서.
"그래요, 그럽시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화이트모카를 만든 후로 그녀의 탐구욕이 조금은 줄어들까 기대했건만, 굉장히 무른 생각이었다.
결국 나는 병실에서 이런저런 테스트에 시달리다 저녁 무렵에야 해방될 수 있었다.
이제는 귀찮은 일이 없으려나 싶었는데, 그것도 오판이었다.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박이나 실장의 방문을 받았다.
“접경도시에서 벌어진 일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무표정일 때가 제일 무섭다. 평소에도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는 여자이지만, 그냥 조용한 것과 조용한 사람이 화가 나서 톤을 낮추는 건 다르거든.
"차박사님이 올린 진단서도 읽었습니다. 다행히 팔은 떨어져나가지 않으셨다고요.”
"하하......”
"다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말 않았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이 필요한 건 국민들뿐만이 아니다. 나도 한창 적응기였다.
"대통령님께서 평범한 정치지도자와는 다른 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위엄을 몸소 보이셔야 할 때가 있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는 적진으로 홀몸으로 들어가는 게 무모하다는 것쯤은 전술에 무지한 저도 인지하는 사실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차라리 에사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쇼였다면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일전을 치렀겠지.
이건 그저 객기였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누구라도 내 입장이 된다면 나보다 간덩이가 더 부으면 부었지 덜 붓지는 않을 거라고.
무엇이건 가능한 마력이 한계를 모르고 무한히 샘솟는데 어떻게 힘에 도취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다른 에사인의 정신상태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패배에 직면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자기가 패배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거든.
그래서 울토르가 죽었다.
아무런 전략전술도 없이, 무적의 힘만 믿고 싸우다가.
울토르의 최후를 떠올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얼마든지 남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거. 가슴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으나, 억지로라도 납득을 해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이번만 해도 오데르가 처음부터 날 암살할 작정으로 칼을 갈고 나왔다면 결과가 판이하게 달랐을 테니.
“맹세하죠. 내가 다시 홀로 전장에 나서게 된다면 그건 충분한 승산이 담보되었을 때일 겁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곧장 병원으로 가셨다고 하셨을 때 너무 놀라서 밥도 못 먹었어요. 저 같은 사람이 이 나라에 많다는 걸 알아두셨으면 해요.”
그녀의 어조가 다소 부드러워졌다.
"사인은 하실 수 있겠죠?”
"예, 왼손으로.”
나는 왼손으로 펜을 쥐었다. 오른손은 팔꿈치도 굽히기 힘들 만큼 깁스를 두텁게 달아두었다.
"외교부장관께서 올리신 서류에요. 마법시료를 생산하기 위한 공정이 준비되었다고, 확인만 해주시면 바로 작업에 착수한다고 하네요.”
문서에는 내가 알아볼 수 없는 마법적인 물질과, 그 물질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 목록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서명란에 이름을 기입해서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우르 황자는 두 가지 마법에 달통했다.
정신계와 화염계.
그가 만들어낼 수 있는 시약도 그 두 가지 종류에 한정되었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마법사 구색은 하고도 남는다고 들었다.
“그리고 어제 UA 신임대사가 도착했어요. 접견을 요청하고 대통령님을 만나 뵙기를 기다리는 중이죠. 스트리아령으로부터도 전령이 와있는데, 이쪽은 대통령님께 서신만 전해드리면 된다고 하네요.”
그녀가 내게 봉인된 서신을 건넸다. 대족장 이졸데의 이름으로 보내진 문서였다.
문서의 내용은 아주 짧았다.
그녀는 귀족들간에 으레 오가는 고루한 표현을 모두 절제하고, 긴박한 사정을 몇 마디 문장에 담았다.
- 엊그제 그니르의 법정으로 출두하라는 소환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곧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납니다. 제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야즈 오라버니가 영지를 받아 관리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