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 흘러간다 (10) >
숨이 턱 막혀온다. 다르마알을 봤을 때는 이러지는 않았다.
그는 나의 창조자였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던 건 채 형체를 갖추지도 못한 핏덩이들을 짓밟으며 어둡고 축축한 구덩이를 기어 올라왔을 때였다.
난생처음 접하는 햇빛이 눈을 강렬히 찌를 때, 한 사내의 그림자가 얼굴 위로 드리웠다.
"형제가 된 걸 환영한다.”
단단한 팔이 내 손목을 잡고 몸을 위로 끌어 올렸다. 그가 오데르였다는 걸 안 건 나중의 일이었다.
그는 그림자의 에사인이라는 별칭에 걸맞듯 결코 세상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형제들을 직접 이끌지도 않았다.
모든 결정은 가장 짙은 그림자, 우르술라의 입을 거쳐서 내려졌다.
우리는 그를 쉽게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었으나, 언제나 우리의 발밑엔 그가 있을 거라 믿었다.
"라힐."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두 번째로 듣는 그의 음성.
그의 손바닥에서 뭉게뭉게 그림자가 스며 나왔다. 응어리진 그림자는 이윽고 기다란 장검의 형체를 갖추었다. 그의 독문무기인 그림자 검이었다.
"너는 다르마알의 제의를 받았어야 한다.”
그의 죄업이 느껴졌다. 장담컨대 그가 짊어진 죄의 무게는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그 어떤 이보다도 더 무거웠다. 악귀나찰이 존재한다면 눈앞의 사내를 두고 하는 말일 것만 같았다.
"그러는 당신은 다르마알의 제의를 받았나 본데.”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귀족들의 하수인 노릇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 이젠 청부살인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에사인을 종주로 삼는 건가?"
"라힐, 네가 하는 일들이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이유를 알려주마. 갈 곳 없는 부랑자를 받아주고,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 전사라 불리는 찌꺼기들을 규합하고.......그런 것들은 이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네가 애써 지키려는 모든 것이 강자의 변덕 한 번이면 무너질 모래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성 파르마 제국처럼 말인가.”
"그보다 전에는 유라홀 왕국이 있었고, 더 예전에는 지룬 부족연합이 있었지. 그들이 너만 한 강자가 없어서 저물었다고는 생각하지 말거라.”
그는 내가 황제의 변덕 때문에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다.
황제는 지고무상의 지위에 오르고는 세상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황국이 수많은 나라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고 있는 지금에도.
오데르의 말마따나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이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쌓아온 모든 게 강자의 변덕에 무너질 모래성에 불과하다면, 당신은 왜 최강의 에사인과 적대하려는 거지?”
"최강의 에사인이 에신 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설마 다르마알이 최강이라고?”
"질서는 결코 혼돈을 이길 수 없다. 질서란 자연계 본연의 모습에 반하려는 인간의 망상에 불과하니.”
오데르가 그림자 검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이만하면 피조물에 대한 예의는 충분히 차린 것 같군. 내가 만든 것이니 목숨을 거두는 것도 내 재량이겠지.”
그의 살기가 매섭게 뻗어왔다. 나는 일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우르술라가 사상 최강의 암살자라면, 오데르는 암살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는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시대에서부터 그림자 속에서 검을 휘둘러왔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살행을 거듭해왔건만, 그에게 표적이 된 자치고 여태껏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파앗.
그가 단숨에 내게 돌진해왔다. 그림자의 검이 꽃잎이 벌어지듯 수백 갈래로 갈라졌다.
오데르의 창.
우르술라조차 단 두 갈래로 나뉘는 것에 그친 기술이다.
나는 평생 찌르기 일변도로밖에 쓰지 못했다. 오데르 본인이 쓰는 오데르의 창은 상상을 뛰어넘는 변칙적인 기술이었다.
나는 크게 한 발 내디디며 대검을 힘껏 횡으로 휘둘렀다.
막거나 피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뼈를 내줄 각오로 펼친 맞불 작전이었다.
그는 검이 부딪힌다 싶은 순간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동시에 발밑에서 칼날이 불쑥 올라왔다. 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검이었다.
"큭...!"
발목이 불에 데인 듯이 화끈해졌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한때 장기로 삼던 기술이었으니.
그러나 공격을 미리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는 못했다. 오리지널이 다루는 그림자병사 소환술은 내가 기억하는 술법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그는 기세를 올려 더욱 거세게 공세를 퍼부었다. 나는 전력을 기울여 그의 검격을 받아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순식간에 십여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 누구도 그림자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
그의 사념이 귓전에 날아들었다.
그는 심지어 사물의 그림자조차 자기 수족처럼 부렸다. 나무 그림자 속에서 칼날이 튀어나왔을 때는 식은땀마저 흘렀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의 그림자와 싸워 이길 수는 없다. 그를 상대하려면 나도 에사인으로서의 권능을 써야만 했다.
나는 그의 검을 옆으로 강하게 쳐내며 응보의 족쇄를 시전했다.
마력을 사용하는 기술이라면 무엇이건 막아버리는 궁극의 봉인술.
그가 그림자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순간, 나는 그의 동체에 응징의 일격을 통렬하게 적중시켰다.
쩌어엉.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폭음.
팔의 근섬유가 빨랫감처럼 비틀렸다.
응징의 일격은 상대의 죄과에 따라 위력이 늘어난다. 이 일격은 감히 역대 최강의 참격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나는 공격을 적중시키는 순간 용수철처럼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엄청난 반탄력 때문에 도저히 땅에 두 발을 딛고 설 수가 없었다.
텅, 텅, 텅.
몇 바퀴를 데굴데굴 구르고 나서야 간신히 중심이 잡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오데르의 상태부터 확인해보았다.
역대 최강이라 자부한 참격에 직격당한 숲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태곳적부터 뿌리를 내려온 삼림이 융단폭격을 맞은 듯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다.
오데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나 그가 뿜어내는 마력만큼은 여전했다.
잠시 후 참사의 현장 속에서 짙고 기다란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그림자는 위로 솟아올라 인간과 흡사한 형체를 갖추었다.
"인상적인 일격이었다.”
그림자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힘만 넘칠 뿐 기교가 없군.”
그가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오데르의 창.
빛살 같은 일섬이 내 심장으로 빨려들어왔다. 나는 대검을 들어 그의 검을 막았으나, 일순간 흐릿해진 그림자 검이 대검을 통과해 가슴에 적중했다.
“크헉!”
둔탁한 충격이 몸 전체를 뒤흔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심정을 저몄다.
그림자가 짐승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팔을 뻗으면 닿을 것만 거리에서 보는 그의 이목구비는 도저히 인간 같지가 않았다.
그는 잠시 동안 칼자루를 쥔 채 서있었다.
“...왜 죽지 않은 거지?”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게 장비빨이라는 거다.”
강철의 카둔이 마그나크록의 가죽을 박피해 만든 갑옷.
아직 영광의 용광로가 지어지기 전이라 그녀가 만들 수 있는 건 가죽갑옷뿐이었다.
나는 대답과 동시에 그의 얼굴을 냅다 후려쳤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을 그림자로 바꿔 일격을 피해냈다.
그러나 나도 이번만큼은 그를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를 베겠다는 일념을 담아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그림자를 베야만 그를 벨 수 있다.
실존하지 않는,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베는 기술.
조금만 더, 이 상태가 조금만 더 계속된다면 알 것도 같았다. 지평선 너머 신기루처럼, 새로운 기술의 윤곽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러나 오데르는 내게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집요한 공격은 마침내 갑옷으로 수비가 가능한 범위를 넘어 내 장기에까지 침범했다.
나는 그에게 난도질당하건 말건 손이 부르트도록 거듭하여 참격을 시도했다. 바닥에 질척한 것들이 전부 내가 흘린 피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당한 양의 생명력이 빠져나간 후였다.
“허억.......허억........”
숨이 거칠다.
그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마력의 절대량만으로는 내가 그를 압도했다. 단 한 번이라도 공격을 맞출 수만 있다면 승부는 뒤집어진다.
그렇기에 그는 결코 무리하지 않으며, 마치 개미가 커다란 곤충을 사냥하듯이 방어가 취약한 부위부터 야금야금 나를 무너뜨렸다.
"네 목을 베면 공화국의 모든 인간이 볼 수 있도록 장대에 꿰어 높이 매달아두도록 하마.”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흐......."
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 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일이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됐는데도 나는 도저히 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 내 안에는 나조차 모를 힘이 깃들어 있었다. 울토르의 힘을 흡수해 무적의 에사인이라 불리게 되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가져간 건 울토르의 마력만일 뿐이었다. 나는 아직 울토르를 무적의 존재로 만들었던 권능을 깨닫지 못했다.
"잘 가라.”
그가 다시 검을 찔러왔다.
이번에는 눈 뜨고도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하지 않았다.
검극이 오른쪽 어깨를 완전히 꿰뚫었다.
나는 어깨가 꿰인 채 눈을 크게 부릅떴다. 손을 쭉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의기양양하게 웃던 그는 내게 목줄기를 잡히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건.......대체?”
"그림자를 어떻게 잡았냐고?”
나는 대답 대신 그의 턱주가리를 올려쳤다. 그의 몸이 붕 떴다가 한참 뒤에야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핏방울을 털어내었다. 머리를 흔들 때마다 선혈이 낙엽 위에 후두둑 흩뿌려졌다.
미칠 것만 같다.
방금 일격으로 오른쪽 어깨가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 하지만 기분은 째졌다.
창조주의 턱에 어퍼컷을 먹인다는 거, 아무나 해볼 수 있는 경험은 아니거든.
뭐, 박살 난 어깨는 현대과학을 믿어보자고.
그러라고 연구비를 대고 있는 거니까.
오데르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동시에 발밑에서 검이 불쑥 올라왔다.
그림자병사 소환술.
그러나 이번만큼은 양상이 달랐다. 나는 발을 내디더 검면을 콱 밟아버렸다.
"큭......."
놀랍게도 이 처량한 신음은 내가 아닌 오데르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앞서 짜부로 만들었던 첩자들처럼, 내게 검이 밟힌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이제는 알겠다.
에사인끼리의 싸움이라는 게 어떤 양상으로 흘러가는지.
그림자의 에사인은 그림자를 부려 싸운다.
그림자의 영역에서는 그가 바로 무적이다.
마찬가지로 욕망의 에사인은 상대의 욕망을 조종하려 들겠지.
욕망이란 영역에서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력하다.
그의 강점을 공략하려고 한 게 패배의 원인이었다.
그림자를 베는 참격이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죄업을 베는 참격이라면 가능하겠지.
그는 내게 맞은 게 아니다, 그 무엇도 그림자를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마찬가지로 나도 그를 때린 게 아니다. 그저 그의 죄를 단죄했을 뿐.
이렇듯 서로의 영역으로 부딪히는 게 에사인끼리의 대결이란 것이다.
"이번에는 찔러보이도록 하마.”
나는 대검을 두 손으로 쥐며, 검극을 땅으로 향해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내가 찌르려는 건 내 그림자였다.
하지만 그의 정수가 깃들어있는 이상 그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그림자를 밟힌 채,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히죽이며 말했다.
"죽기 싫다면 네 피조물의 변덕에 걸어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