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흘러간다 (9) >
야만의 시대다.
대부분의 분쟁은 인간의 목숨을 대가로 치르는 것으로 맺음지어진다.
지구에서는 외교적인 노력이 실패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서나 고려되는 것이 에신에서는 일상처럼 비일비재하다.
대검을 들고 깊은 숲으로 서슴없이 들어선 나도 그런 해결 방식을 선호하는 야만인 중 하나였다.
무려 스물 다섯 명의 인부가 죽거나 실종되었다.
이쪽의 피가 흐른 만큼 저쪽도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아야만 할 것이다.
나는 나브니에게 죗값을 물을 수 없다면 최소한 주술을 시전한 주술사의 머리는 들고 돌아올 작정이었다.
스스스스........
바람이 저만치 돌아가는 게 느껴진다. 초목은 전방 십여 미터에서부터 바짝 엎드려 길을 터주었다.
공화국의 인구가 늘어날수록,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가 될수록 나는 강해진다.
공화국의 총인구는 어언 백만 명에 육박했다. 한국에서 물자를 끌어오게 된 후부터 크록의 수가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는 중이었다.
그에 따라 내 마력도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 마그나크록과 겨룰 때와는 격을 달리했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불가능이라고는 없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나는 과거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대부분의 일을 현실에서 구현해낼 수 있다.
가령 지금의 나는 이런 짓도 가능하다.
“나와라.”
털썩.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연쇄적으로 들려왔다. 나뭇잎 사이에 숨어있던 목생족 첩자들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크윽...!”
그들은 압도적인 주술의 무게에 짓눌려 바닥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들이 발신하는 신호,
저마다의 죄업에 자그만 무게추를 달아줬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점점 마른 오징어처럼 짜부가 되어갔다.
"가서 알려라, 무적의 라힐이 직접 나섰다고!”
첩자 한 명이 고개를 억지로 쳐들며 크게 외쳤다. 먼발치에서 목생족 스파이들이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줄곧 환영마법으로 모습을 숨긴 채 이쪽을 관찰중이었다.
굉장히 성의가 넘치는 위장이라고 하겠다. 목생족 특성상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선천적인 보호색만으로도 다른 종족에게 모습을 숨기는 게 가능할 텐데.
첩자들은 머지않아 내 가시거리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강인호 소장은 목생족 도시와의 거리가 오 킬로미터라고 했는데, 막상 숲에 들어와 보니 그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적지 않은 시간을 걸었는데도 목생족 빌딩 끄트머리가 아직 멀게만 보였다.
나는 조금 더 걷고 나서야 내가 일종의 진법 안에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진법이란 사람을 현혹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정교한 환영마법이다.
나는 아주 정밀하게 짜인 마법적인 함정 안에서 쳇바퀴를 도는 중이었다.
이토록 성대한 환영식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하긴, 정신계 술법으로 도발을 해왔을 때부터 선은 넘었다.
단지 이웃나라를 경계하기 위함이라기에는 스파이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우리는 아직 성벽에다가 대포도 못 달았는데, 이들은 전쟁 준비에 진심이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던전’에 침입해서 익스티아를 불태우고 학살극을 벌인 게 우리라는 걸 아는 것 같다.
이네스에게 환영마법을 방어하는 법을 배워두긴 했으나, 아쉽게도 진법을 파훼하는 법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흐르는 강물을 손바닥으로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스윽.
나는 오른손을 가만히 들어올렸다.
동시에 대기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환영의 장막은 마력이 가하는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노도와 같이 출렁였다.
널을 뛰듯 흔들리던 장막은 이윽고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찢어져 조각조각 비산했다.
환영의 장막이 박살나자, 일순간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나는 웬 음울한 공터 가장자리에 서있었다.
공터 가운데에는 자루 같은 로브를 뒤집어쓴 목생족 주술사와, 실종되었다고 보고된 인부들이 보였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주술사가 아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필생의 주술을 힘으로 깨뜨리다니, 당신은 대체...”
나는 인부들의 상태부터 살폈다.
썩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우선 그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숲 복판에서 나체인 채였다. 그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넋 나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익스티아의 작품이라면 그들은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유죄로군.”
나는 검을 어깨 높이까지 치켜 드며 짧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나는 당신에게 유용할 사람이오! 내 정보가 없으면 당신은 이 숲에서 절대로 살아 나가지 못해!”
나는 검을 그대로 든 채 바람결에 마력만을 실어 보냈다.
퍼억.
그의 몸뚱이가 붕 떠서 저만치 날아갔다. 꿰뚫린 가슴에선 하염없이 피가 새어나왔다.
나는 그의 주검에 아주 잠깐 눈길을 주었다.
그는 잠깐이나마 내 이목을 현혹할 정도로 상당한 실력자였으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방어주문조차 펼쳐보지 못하고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유용할 사람 같을 것 같았으면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나는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꺼내 본부와 교신을 시도했다.
- 여기는 브라보. 여기는 브라보. 들리면 응답하라, 오버.
한동안은 잡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에신은 전파방해라고는 있을 수가 없는 전파청정구역이다.
곧 무전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주군을 뵙습니다. 수석마법사 오르기입니다.
- 숲에서 실종자 열일곱 명을 발견했다. 좌표를 불러주겠다, 오버.
- 알겠습니다, 즉시 구조대를 편성해서 그리로 가겠습니다!
- 그럽시다.......
뭐냐, 나만 무전하는 분위기 내고 있네.
기껏 교신법을 가르쳐줬더니.
나는 오르기에게 좌표를 불러준 뒤, 자리에 남아 넋을 잃은 인부들을 지켰다.
아직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쯤이면 첩자들이 내 등장을 알렸을 테니까.
예상되는 대응으로는 손을 떼거나, 나를 요격할만한 강자를 불러오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후자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나브니도 일국을 이끄는 귀한 몸이시거든.
달린 식구가 많아지면 운신의 폭도 좁아진다. 오르기도 날더러 직접 나서는 건 위험하다며 얼마나 반대했는지 모르겠다.
만에 하나 나브니가 직접 나선다면, 그때는 기꺼이 응대해줘야지.
정신마법에 대한 대응책은 확실하게 세워왔으니.
나는 오르기를 기다리며 인부들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말로 구제가 불가능한 것인지 궁금해서.
미군기지 지하벙커에 갇혀있었던 익스티아 중독자들은 혼돈의 마력에 완전히 침식되어 신체변형까지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겉보기로는 멀쩡했다. 정확한 건 이네스가 감별을 해봐야겠으나, 최소한 내 눈으로는 하자가 없는 듯했다.
"으으........"
그들은 코앞에 서있는 나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반개한 채 맥없는 신음소리를 흘릴 뿐.
“.......팔.”
나는 돌아서려다가, 이상한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인부들 중 한 명, 중년의 한국인 남성이 초점 잃은 눈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입술이 만들어내는 모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박
봉.
“...팔.”
일순간 그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그는 자세를 바로 세우며, 내게 악의로 가득 찬 미소를 지어보였다.
“...넌 뭐냐?”
그는 대답 대신 마력을 노골적으로 방출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지독한 농도의 혼돈의 마력이었다.
"너는 알파 원이로군.”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침묵이 곧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알파 원,
미군기지에서 탈취한 파일로 공인된 개념이다.
혼돈의 마력이 만들어낸 최강의 생명체로서, 겉보기로는 평범한 인간과 구분이 가지 않는다고.
"박봉팔.”
그가 허리를 쭉 펴며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실로 오랜만이 아닌가?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난것이.”
나는 그의 눈동자 안에 그의 존재를 초월하는 강대한 힘이 깃들었음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지금 다르마알과 접신중이었다.
"반갑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나는 그의 인사를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혼돈의 다르마알 앞에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다니.
그가 아약이란 껍질을 뒤집어쓴 채 인간 행세를 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 또한 그런 내가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몰라보게 늠름해졌구나. 네 운명을 미리 알았더라면 한국에 공을 더 들이는 건데.”
"후회가 들 때가 정말로 늦은 때라고 하더라고.”
그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웃음소리와 달리 한껏 일그러진 얼굴표정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여전히 내 부하가 될 생각은 없겠지?”
"그런 한심한 말이나 나불댈 것 같으면 그만 대화를 끝내자고.”
나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검을 다시 어깨 높이로 들어올렸다.
알파 원이 강하다고 한들 본질은 마력에 뒤틀린 돌연변이에 지나지 않는다.
에사인을 상대하려면 에사인이 나서야하는 법.
"듣던 대로 호쾌하군. 내 제일가는 혼돈의 기수로서 모자람이 없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나를 직접 상대할 용기도 없는 것이.”
"서두르진 마라. 오늘 네 상대는 내가 아니니까.”
"또 도망칠 셈이냐? 언제까지 비겁하게 남의 껍데기 뒤에 숨어서 음모나 짜고 다닐 작정이냐?”
그가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동안 네 활약은 잘 지켜보았다. 나와 달리 그야말로 거침이 없더군. 실로 아바르가 기대를 걸어블 만하다.”
"........"
나는 대꾸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아바르와 손을 잡은 게 벌써 그의 귀에 들어갔을 줄은 몰랐다.
"입 싼 쥐새끼들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혼돈 속에서 떠도는 이야기들을 즐겨 듣지. 정해지지 않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운명의 변주들. 듣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거든. 하지만 근래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밋밋하기 그지없더군. 위대한 에사인의 죽음이나 거대한 제국의 파멸, 뭐 그런 뻔한 레파토리가 근 백년 동안이나 변하질 않고 있어서.”
에사인의 죽음과 제국의 파멸.
아바르가 언급했던 예언이다. 그녀는 미래를 내다보는 자가 자신뿐이라고 말했으나, 다르마알도 같은 미래를 보고 있었다.
"아바르는 네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만, 글쎄다. 나는 이번만큼은 그녀의 안목을 의심하고 있다.”
사내의 눈에서 총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의 목소리도 작아지더니, 이윽고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조그마해졌다. 사내는 마지막 숨을 쥐어짜듯 기운을 모아 내게 말했다.
“나는 네게 닥쳐온 운명의 변주를 헤쳐 나갈 힘이 있을지조차.......”
사내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변의 공기가 완전히 변했음을 깨달았다.
서늘한 냉기가 발목을 휘감아 돌았다.
고향에 돌아온 듯이 익숙한 기운이었다.
문득 흐르는 안개를 뚫고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허름한 잿빛 넝마를 걸치고 있었다.
걸음걸이는 마치 유령 같았다. 허공을 부유하는 듯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넝마 자락이 바람결에 펄럭였다. 안에는 생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옷 안에 존재하는 건 일렁이는 오로지 그림자의 잔재 뿐이었다.
나는 그의 기이한 모습에서 기억 속에 묻어뒀던 이름 하나를 끄집어냈다.
"........오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