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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53화 (153/205)

153화. < 흘러간다 (8) >

토론회는 나름 성황리에 끝났다. 텔레비전, 인터넷, 스포츠, 무엇 하나 즐길 게 없는 사회라 그런지 정치에 대한 관심도가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

덕분에 선거 당일 집계된 투표율은 무려 90%가 넘었다.

공산권 국가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수치였다.

급히 충원한 선거관리위원들이 수개표에 여념이 없을 때, 나는 대한민국으로부터 건너온 또 다른 선거 소식을 접했다.

박병철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경선에서 앞서나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제나 국방, 대북정책 등 대통령 후보자에겐 선거마다 집중해야 할 테마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번 선거의 핵심은 에신이었다. 그리고 박병철은 여야를 통틀어 그 어떤 후보보다 에신의 사정에 밝았다.

그는 나와의 인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상대를 제압했다. 그는 심지어 경선상대에게 에신어로 질문을 하는 쇼맨십을 보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상대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개표결과는 저녁 무렵이 되어 뚜렷해졌다.

나는 비서실장 박이나와 함께 개표방송을 시청했다. 개표방송을 주관하는 건 총리의 주도하에 설립된 국영방송사 ESS였다.

"다음 소식입니다. 현재까지 총 193개 지역구에서.......결과가 나왔습니다. 음, 개표율은 오후 10시를 기준으로 56 퍼센트이며......."

금발머리를 수더분하게 흐트러뜨린 여성 아나운서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더듬더듬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아무리 프롬프트가 없다고 해도, 방송 내내 고개 한 번 들지 못하는 건 프로로서 보일 자세가 아니었다.

"처음이라 어색하신가 봅니다.”

박이나가 아나운서를 변호해주었다. 나도 나무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프로도, 아나운서도 아니었기에.

경호책임자 아길리.

다가트의 챔피언이 바로 아나운서의 정체였다.

아길리가 데스크에 앉게 된 건 내 강요 아닌 강요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어둘 정도로 독보적인 외모를 지닌 데다가, 내 경호책임자로 널리 알려져 있어 많은 전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국영방송국 ESS의 얼굴마담으로 그녀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에겐 미안한 말이다만, 경호책임자라는 위치가 할 일이 그리 많은 자리가 아닌지라.

"결과가 대부분 나왔군요. 아직까지 집계가 되지 않은 지역구는 후보자간에 다툼이 벌어진 곳들입니다.”

후보자들끼리 주먹다짐을 벌인 지역구가 몇 군데 있었다. 그런 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지자까지 합세해 대규모 패싸움으로 번졌다. 투표함까지 엎어지는 통에 재선거가 치러진 곳도 존재했다.

"엘리시아는 어떻게 됐습니까?”

카메라가 엘리시아의 지역구를 비추었다. 얼떨떨해하는 그녀의 머리 위에 지지자들이 꽃관을 씌우는 중이었다.

여기서 정말 신기한 건 권력에 대한 인간의 집요함이다.

엘리시아를 둘러싼 지지자들은 그녀를 보필해온 황국민도 아니고, 마르밀 가문의 은혜를 입은 난민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건너온 선거전문가들이었다.

유망한 후보측에 붙어 선거를 설계하는 디자이너들.

일개 공무원으로 시작해 국가원수 자리까지 오른 놈이 할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어떻게 저렇게 권력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건지.

"엘리시아 님의 행보는 유의하셔야겠습니다. 이민자 출신들을 모아 당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힌 모양입니다.”

그건 조금 성가시겠는데.

평범한 국회의원과 당수는 무게감이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그녀는 소미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 소미가 그녀의 약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리시아가 마이크를 쥐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당선자 대표로서 당선소감이 짤막하게 나갈 모양이었다.

"저를 믿어주고 지지해주신 모든 분들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고마움을 느낍니다. 저는 단상을 내려오는 순간부터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겠습니다.”

미리 준비해뒀던 듯 멘트가 술술 나온다.

갑옷을 입지 않은 그녀의 모습이 낯설다.

나는 계속되는 소감발표를 들으며 그녀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때도 매사에 지나치게 진지했고, 책임감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울토르와 나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사이가 이렇게 틀어질지 몰랐었지.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이 힘을 가진 자에 의해 부당한 일을 겪는 일이 없도록 눈을 크게 뜨고 있겠습니다.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시아 마르밀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하다.

...설마?

그녀는 소미에 의해 부단장 자리에서 경질당한 게 부당한 처사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손에 넣으려는 거지.

“...이만하면 됐습니다. 스튜디오로 가죠.”

나는 이쯤에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거결과를 끝까지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아직은 누가 누군지조차 모르니까. 한 번이라도 같이 일을 해보면 그때부터는 누굴 주목해야할지 윤곽이 잡히겠지.

드디어 국회가 정식으로 개원했다. 의원들은 등원하자마자 산더미처럼 쌓인 법안을 검토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 사이 나는 동쪽 접경도시로 시찰을 나섰다.

이 시찰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오십 대의 차량과 정찰헬기 한 대.

최신예 갑옷으로 무장한 이백 명의 근위전사단와 함께 나는 도시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방문했다.

"현장소장 강인호입니다. 대통령님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뵈실 줄은 몰랐습니다.”

흰머리가 지긋한 오십대 남자가 허리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게 숙였다. 나는 그가 허리를 펼 때까지 기다린 후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시면 됩니다.”

그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확장되었다.

"어찌 제가 감히.......”

그가 몸 둘 바 모르겠다는 듯이 주저하며 말했다.

나도 안다.

마그나크록을 살해한 후 내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졌다는 걸.

최소한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에사인을 왜 신에 비견하는지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어려워하면 나도 사람 대하기가 부담스러워진다고. 현장 스킨십을 자주 다녀야할 입장인지라.

“어서요.”

그가 결국 내 손을 맞잡았다. 나는 손을 흔든 뒤 그의 어깨도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고생하시는 분들을 위해 선물도 가져왔습니다.”

근위전사 두 명이 통나무 같은 커다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상자 안에는 작은 유리병이 잔뜩 들어있었다.

"야심차게 준비중인 에너지 드링크 시제품입니다. 몸이 고단할 때 한 병씩 드시면 됩니다.”

음료는 몸달래풀을 농축한 것으로, 소울필렛과 더불어 우리의 주력 수출상품이 될 물건이었다.

원료가 원료이니만큼 제품엔 마력이 잔뜩 함유되어 있다. 신체의 회복력을 높이는 건 당연하고, 장복할 경우 익스티아와 마찬가지로 복용자에게 소량의 마력을 축적케하는 효과도 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더럽게 쓰다는 거.

맛까지 낼 정도로 개발기간이 길지가 않았거든.

"너무 감사합니다, 아껴서 먹겠습니다.”

"아낄 필요 없습니다. 물처럼 드시라고 많이 가져온 겁니다.”

나는 그가 보란 듯이 뒤에 늘어선 근위전사들을 가리켰다. 이백 명의 전사들이 저마다 상자를 하나씩 들쳐 메고 있었다.

"현장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잘 되어가나요?”

"실은 그것이.......”

소장이 안절부절해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왜요? 상황이 좋지 않나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런 일은 처음 겪는지라.......”

“처음 겪는 일이 있는 건 당연합니다. 여긴 대한민국이 아니니까요. 뭐든 편히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일단 가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강인호 소장이 나를 동쪽 성벽으로 안내했다. 나는 성벽 위에 올라서자마자 그가 말한 곤란한 일이 무엇인가 깨달았다.

멀찍이 고층 건물의 뼈대가 불쑥 솟아있었다.

그러나 여긴 정글의 한복판이다. 고층 건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소장에게 망원경을 넘겨받아 좀 더 자세히 관측을 해보았다.

주변 풍경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그런 건물이 한두 채가 아니었다.

건물 안은 투광유리가 온통 푸르게 보일 지경으로 녹음이 우거졌다.

흡사 거대한 온실 같은 구조물.

“.......목생족 도시로군요.”

"예,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오 킬로미터 바깥에 다른 나라의 도시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맑은 날에는 공사 소음이 뚜렷하게 들릴 정도입니다.”

"우선 방위태세를 갖춥시다. 우리 성벽은 단순한 성벽이어선 안 됩니다. 유사시에는 포진지로 기능해야합니다. 정기호 장군에게 자문을 구하세요. 한 번 작업을 해본 경험이 있으니 조언을 잘 해줄 겁니다.”

정기호는 요새도시를 지을 때 성벽 안에 대포를 탑재하는 프로젝트를 주도한 적이 있다.

프로젝트는 대한민국 포방부의 협찬 하에 성공리에 끝났다.

그나저나 공무원들이 도시를 세울 후보지 선정을 적절하게 잘해준 것 같다. 적절한 타이밍에 목생족의 서진을 저지하게 되었으니.

"더 시급한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만, 이 분야는 제 전문이 아닌지라 직접 말씀을 들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군을 뵙습니다.”

조각상처럼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내게 무릎을 꿇었다.

수석마법사 오르기.

“안녕하세요, 라힐 님.”

그리고 이 솜털 같이 하얀 소년은 그의 제자가 된 아르세니오다.

아르세니오는 그 사이 키가 조금 자랐다. 광대가 도드라지고 볼우물도 안으로 들어가는 게, 점점 소년의 티를 벗고 사내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두 분이 오신 걸 보니 마법적인 문제인가 보군요.”

"예, 그렇습니다. 숲 안쪽에서 자꾸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합니다. 목소리에 홀린 인부는 다시 돌아오지 않거나, 시체가 되어 발견됩니다. 시체에서는 정신계 마법의 흔적이 감지되었습니다.”

“목생족은 우리가 도시를 짓는 걸 반기지 않는군요.”

당연하겠지.

우리도 그들을 반기지 않으니까.

"숲 안쪽에서 강력한 마력이 느껴져요. 나브니가 보낸 욕망의 하수인이겠죠. 대마법 방호진을 만들기 전까지는 계속 피해가 날 거에요."

아르세니오는 대부분의 힘을 잃은 지금도 마력을 감지하는 감각만큼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완성까지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걸립니다.”

“길군요.”

“예, 한 달이면 너무 깁니다. 하루에 예닐곱 명 꼴로 피해자가 나옵니다. 감시를 아무리 철저하게 해도 잠깐 눈 돌린 사이에 귀신 같이 사라지고 맙니다. 어렵사리 모셔온 기술공들이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성화입니다 .이대로라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라힐 님께 진정을 내었습니다.”

강인호 소장이 하소연했다.

인명피해가 나고 있으니만큼 이 일은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숲 안쪽으로 가서 정신계 마법을 흩뿌리고 있을 주술사의 머리통을 따야만 했다.

마침 나는 이 일에 적임을 알고 있었다.

전직 암살자이자, 이 나라 최강의 전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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