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 흘러간다 (7) >
“34번 화면을 확대해보세요.”
잠깐의 기술적인 조율을 거친 후, 엘리시아 쪽의 중계화면이 스크린 전체 크기로 확대되었다. 박이나 실장은 그녀와 그녀의 상대 후보에 대한 서류를 가져다주었다.
엘리시아의 상대는 김치우란 자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프로필을 확인해봤던 몇 안 되는 후보들 중 하나였다.
젊은 나이에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여러 고위직을 전전하다가, 부동산 특수를 노리고 에신 땅을 기웃거리는 사람.
머릿수가 많아지니 이런 불순한 목적으로 들어오는 인간들도 많아졌다.
뭐, 한몫 잡아보려는 걸 탓할 순 없겠지.
법을 어기지만 않는다면야.
김치우는 대한민국의 제도권이 낳은 최고의 엘리트였다. 나이도 많고, 세상물정에도 빠삭했다. 여러모로 상대하기 버거운 적수임엔 분명했다.
"후보자는 국회가 뭘 하는 곳인지는 압니까?”
김치우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가 엘리시아를 조롱하려는 의도는 굳이 통역을 거치지 않아도 뉘앙스만으로 전달되었다.
"봐요, 또 대답을 못하지 않습니까? 뭘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데 자꾸만 열심히 하겠다고 장담하면 뭐합니까.”
"국회는 몰라도 에신이 어떤 곳인가는 압니다.”
엘리시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리 도시는 황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스트리아령과 맞닿아있습니다. 지금은 외교적인 사정 때문에 왕래가 이루어지지 않지만, 저는 머지않은 미래에 두 나라가 다시 교류를 시작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두 나라를 잇는 교통로를 만들겠다고 한 이유입니다. 일단 무역길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제가 가진 연줄을 이용해 우리 도시를 중계 무역으로 번영시킬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조금 놀랐다.
그녀가 그린 구상은 에신 프로젝트가 초창기에 목표로 하던 것과 일치했다.
여전히 유효한 구상이기도 했다.
게다가 마르밀은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쥔 가문이다. 제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지만 장녀가 막대한 돈을 벌어주겠다는데 반대할 것 같진 않았다.
예전부터 나는 그녀가 왜 아직도 공화국에 남아있는지가 궁금했다. 가끔 오다가다 보는 그녀는 울적한 얼굴을 하고 조용히 서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 토론회가 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중계 무역을 하겠다고요? 나 원.”
김치우가 실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가 아까부터 묻잖습니까. 국회가 뭘 하는지부터 좀 공부하고 오시라고. 그런 외교적인 결정은 일개 국회의원의 권한을 까마득히 벗어나는 일입니다. 지역구 내에서 도로 좀 깔겠다는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니까. 아까부터 토론이 왜 자꾸 공회전을 하는지 좀 생각을 해보시라고요. 아, 공회전이 뭔지는 아시려나?”
통역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통역사는 김치우의 마지막 말을 빼고 전달했지만, 엘리시아는 그가 하는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교육을 잘 받은 지성인이라고 들었는데, 당신은 태도가 무척 무례하군요.”
"태도를 문제 삼는다면 당신이 더하지 않습니까?"
김치우가 손가락 끝으로 엘리시아의 날개를 가리켰다.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수소문을 해봤는데, 당신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이 드물더이다. 강철의 자매단 부단장에서 하루아침에 평단원으로 경질되고, 전장에서 도망친 끝에 저주를 받아서 박쥐 날개를 달게 되었고. 어느 모로 보나 국민의 대표가 될 만큼 행실이 바른 분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저걸 건드리네?
하기야 저게 선거라 불리는 전쟁의 전통적인 승부방식이긴 하다. 상대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물어뜯고 놓아주지 않는 거.
우리보다 먼저 민주화를 이룬 유럽조차 선거가 정책대결이 된 역사는 드물 것이다.
언제나 네거티브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관건이었지.
하지만 김치우도 간과한 사실이 있다. 에신의 귀족들은 사람 목숨 알기를 파리보다 더 하찮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녀는 대귀족 마르밀의 장녀였다. 설령 그녀가 당장 김치우의 모가지를 날려버린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황국으로 도망치기만 하면 그녀의 신변은 보호받을 것이다.
"개입해야 할까요?”
박이나 실장이 물었다. 그녀는 나만큼이나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여러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중이나, 피가 튀는 참극으로 선거가 막을 내린다면 오늘의 이벤트는 실패라고 불러야 옳았다.
"잠시.......”
나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말꼬리를 늘렸다. 화면상으로는 엘리시아의 살기를 읽을 수 없었다. 그녀 정도 되는 검사가 작정하고 손을 쓴다면, 지금 개입한다고 하여 적시에 말릴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정말 저에 대해 상세히도 알아보셨군요.”
엘리시아가 픽 웃었다.
나는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될 만큼 떠들썩하니 말입니다, 원.”
"저도 후보님께 대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 사실들이 있는데, 국민을 위해 일하신다는 분 치고는 부적절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그 무슨 당치도 않은!”
김치우가 얼굴을 붉히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나를 근거도 없이 그쪽과 같은 급으로 엮지 맙시다. 나는 공직생활 30년 하면서 그 흔한 봉투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가 대한민국일 것 같았으면 그런 무책임한 발언은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할 수도 있어요!”
"정말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오셨다고 자신하시나요?”
"저는 당신의 적격여부를 묻고 있었습니다. 물타기는 그만하세요!”
"그렇게 자신이 있으시다면 저와 함께 검증을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엘리시아가 물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라힐님의 사제분들은 거짓말을 훤히 꿰뚫어 보십니다. 마침 선거를 보조하기 위해 저쪽에 나와 계시죠.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우리의 발언이 진실일지 거짓일지 사제님께 같이 검증을 받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김치우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주술은 변수로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나는 토론을 하러 나온 거지 종교활동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의 수고를 들여서 본인의 진정성을 밝힐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일 텐데요.”
“됐습니다, 말로는 이길 수 없으니 이상한 술수를 동원하는데, 그런 편법이 통할 만큼 국민들이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방금 후보자께서는 공화국의 수장이신 라힐님의 권능을 이상한 술수라고 표현하신 것 같군요. 저는 후보자께서 가진 그러한 인식에 우려가 됩니다. 단지 에신을 이해하지 못하실 뿐만이 아니라, 낮게 깥아보고 계신 것 같아서.”
토론장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대부분의 지역구가 그러하듯, 그녀가 출마한 곳도 크록 유권자가 대다수였다.
김치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듯했다.
"잠시, 오해, 오해입니다! 제가 그런 의도로 말씀을 드린 게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런 변명이 통할 만큼 국민들이 어수룩하실지.”
엘리시아가 김치우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과연 그녀는 마르밀 가문의 장녀가 맞았다.
황국의 귀족들은 삼상회에서 치열한 정략다툼을 벌여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카둔의 전사가 되었다고 하여 그 가락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었다.
이로서 한 가지 사실이 더 밝혀졌다. 엘리시아는 내 사제 앞에 서는 걸 자처할 만큼 공직을 맡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거.
엘리시아는 여러모로 미묘한 입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더러 왜 자기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느냐며 손가락질하지만, 그녀는 이곳을 떠나야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것 같다. 그녀는 공화국을 발판으로 삼아 본인의 꺾인 날개를 다시 한 번 펼쳐보려는 듯했다.
아마 엘리시아는 본인이 진소미에게 왜 미움을 샀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희망을 놓지 못한 것이겠지.
"화면을 원래대로 돌리셔도 됩니다.”
이제 확인해볼 사람이 딱 한 명 남았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교정국으로 끌려가서 두들겨 맞았던 사람.”
나를 비하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초를 겪은 후보가 있었다. 정보국에서는 암살을 추천했던 인물이다.
박이나 실장이 기술팀을 돌아보았다.
“56번 화면 비춰주세요.”
그 고초를 겪고도 출마를 하긴 했나보네.
포기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곧 56번 카메라가 토론회장을 비추었다.
한 남루한 의복을 입은 사내가 회장 가운데에 서있었다.
그는 몇 안 되는 난민 출신의 후보였다. 행색이 지저분했고, 대단한 경력이 있어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진짜였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눈.
저런 눈을 가진 자 치고 만만한 인간은 없었다.
그의 상대는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토론무대를 향해 오물이 쉼 없이 던져지고 있었기에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꺼져라! 가짜 에사인이나 믿는 쓰레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군중들은 사내의 발언에 크게 화가 난 것 같았다. 자경단이 아무리 뜯어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당당하게 선 채 분뇨를 몸으로 받아내었다. 작지만 그를 옹호하는 외침도 존재했다. 토론장 일각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들끼리 몸싸움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발언 때문에 저 난리가 난 겁니까?”
박이나 실장이 정보국이 건넨 프로필을 확인해보았다.
"공화국은 황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군비확장을 멈춰야만 하며, 라힐 님께서는 조속히 질서의 궁으로 찾아가 황제에게 군신의 예를 올려야한다고 합니다.”
"그리고요?”
"이황자님을 즉시 황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며, 진소미 님을 일황자의 첩으로 들여서 양국간의 우호를 도모해야 한다고도...”
그녀가 민망한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주장은 굉장히 급진적인 데다가 황국과 궤를 같이한다.
"신성모독입니다.”
아길리가 과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자들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도록 목을 쳐 본보기를 보이심이 옳습니다.”
나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공화국은 신법이라는 명목으로 내게 무제한적인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동시에 공화국은 민주정을 표방하고 있기도 하다.
저 자가 소신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엔 필요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필요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서, 공동체의 결속을 해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암적인 존재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그런 거 우리 헌법에도 넣어뒀잖아.
이 사람은 이게 마음에 안 들어서, 저 사람은 저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둘 내치기 시작한다면, 과연 내 판단은 언제까지나 옳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나는 휘날리는 분뇨를 보며 오랫동안 생각했다.
“.......놔둡시다.”
나는 장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억압한다면 중국과 다를 바가 없겠죠. 현장에 연락을 넣어서 소요사태를 멈추라고 전하세요. 내 이름을 댄다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박이나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내심으로 내가 이런 말을 해주길 바랬던 것 같다.
고압적으로 굴어서 반발심만 키우느니, 저런 사람도 포용한다는 배포를 보여주는 게 더 낫다.
게다가 어차피 저래서는 낙선한다. 정치도 예술과 똑같다. 대중의 감성에서 너무 동떨어지면 인디씬을 못 벗어난다고.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아길리가 우려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저는 저런 자의 습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자는 라힐 님께서 소요를 멈추기 위해 나섰다는 것조차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소재로 쓸 겁니다. 계속 거짓말을 떠벌려 무리를 불려나가겠죠.”
"정말로 괜찮습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가볍게 웃어주었다.
"당장은 저 사람 말이 솔깃할 수도 있어요. 아직 집이 지어지지 않아 텐트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하루하루 배급을 받아가며 불안 속에서 떨고 있는 거죠. 하지만 그런 생활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진 않을 겁니다. 우리가 세워둔 계획들이 있잖습니까. 등 따시고 배가 부르면 황제 따위는 금방 잊을 거예요.”
"하지만....”
아길리는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황국민들이 황제에 대해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어서 그럴 테지.
“못 살겠다고 황제를 버리고 뛰쳐나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
"한 번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두 번째부터는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