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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51화 (151/205)

151화. < 흘러간다 (6) >

.......구운 곤충을 내밀 때 눈치를 챘어야하는데.

말라붙이를 먹는다는 기호 자체엔 문제가 될 게 없다. 말라붙이는 게임으로 치면 몬스터와 비슷한 포지션이니. 난폭하고 공격적이지만, 지성이 없고 맛이 나쁘지 않아 식육용으로도 거래가 되곤 한다.

문제는 우리가 지성화된 말라붙이와 공존하고 있다는 거.

"아무래도 그 메뉴는 곤란하겠다.”

"무슨 의미지?”

"미안하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말라붙이가 식용이 아니라.......”

나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 머릿속을 정처 없이 헤맸다.

“......주민이다.”

"괴이한 소리를 하는군. 그것이 어떻게 주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냐.”

제후라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그는 진심으로 역정을 내고 있었다.

"어쩌다보니 사정이 그렇게 됐다. 주술의 여파로.”

"주술이라? 어떤 주술이기에 먹거리와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건가?”

"인간 못지않은 지능을 지니게 됐으니 더 이상 먹거리라고 부를 수가 없어. 어디까지나 우리 영역 안에 들어온 개체에 한해서만 해당되는 이야기다만.”

"납득할 수가 없군. 묘인족이 언제 어디서나 묘인족일 수밖에 없듯이, 말라붙이는 말라붙이여야만 한다.”

제후라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묘인족은 자기 취향이 아닌 것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지.

그렇다면 관건은 묘인족의 고집이 선지자 아바르의 명령보다 우선시될 수 있냐는 건데.

"진짜 어렵겠냐?”

제후라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살겠다. 눈에 띄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그가 마지못해 타협안을 내었다.

"고맙다.”

나는 마음속으로 단단히 기억해두었다.

묘인족과 말라붙이의 정착지를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려 놔야겠다고.

마침 동쪽 접경지대에 도시를 새로 지으려는 프로젝트가 추진중이다. 묘인족을 그곳으로 보내버리면 얼굴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다시 일주일을 걸어 네흘렘에 도착했다.

신성 파르마 제국의 첫 번째 도시.

하늘사제 나리는 이곳이 추방자들이 세운 도시라고 말했었다.

아마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친 이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겠지.

“…라힐,

정기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의 손은 이미 칼자루에 닿아있었다.

네흘렘으로 통하는 진입로에 회색 운무가 가득했다.

운무의 정체는 영체들이었다. 몇만, 어쩌면 몇십만이 넘을지도 모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의 영체들이 군집해있었다. 거리가 수십 미터는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뿜어내는 음기로 인해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다.

수행단이 행군을 멈췄다. 하늘사제 나리와 제후라가 대열 앞으로 걸어 나와 나의 앞으로 나섰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

나는 영체들을 경계하며 제후라에게 물었다.

영체는 오래 묵을수록 강해지는데다가,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암살자 시절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소리가 성가시고 돈 안 되는 것들과 싸우지 말라는 소리였다.

"나도 처음 겪는 일이다.”

제후라가 그의 장검을 비스듬히 내밀며 말했다.

“영체들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집단행동을 개시한 건...”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운무의 사이가 홍해처럼 좌우로 갈라지더니, 네흘렘을 가로지르는 길이 나타났다.

"마치 들어오라는 것 같군요.”

나리의 말대로였다. 그들에게 적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갑시다.”

나는 짧게 기합을 넣으며 가록을 앞으로 몰아갔다. 내가 앞장을 서니 수행단들도 내키지 않은 걸음을 떼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영체들의 기괴함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였다.

마치 삼류 호러영화를 촬영하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흐느끼는 소리, 아스라이 메아리치는 절규.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것의 으르렁거림.

때로는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쉿쉿 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우리는 끝없이 도열한 귀신의 무리를 지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영체들은 불안정해 보이면서도, 결코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 그들을 통제하는 강력한 존재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우리는 마침내 네흘렘을 빠져나왔다.

시간으로는 약 삼십 분 남짓에 불과했으나, 체감으로는 반나절은 지체한 것만 같았다.

지나오는 내내 내 자신보다 묘인족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다. 그들 중에서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이는 한 줌밖에 되지 않았으니.

마지막 묘인족까지 네흘렘을 통과하자, 운무의 틈새가 도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음산한 안개가 땅 아래에서부터 뭉게뭉게 피어올라 폐허를 완전히 집어삼켜버렸다.

"우리를 배웅해준 거로군요.”

나리가 말했다.

"저 길이 살아있는 자를 위해 열릴 일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제후라는 안개를 향해 몸을 돌리며 칼자루를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호의에 대한 그 나름의 응답인 것 같았다.

그는 묘인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아바르와 투스라의 시대를 겪어봤던 인물이었다. 그는 안개의 구성원 중 누군가와 안면이 있을 수도 있었다.

나도 마음속으로 그들의 안식을 빌어주었다. 황제가 타도되기 전에는 결코 영면에 들지 못하겠으나.

오늘 이후부터 네흘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땅을 나누는 경계가 될 것이다.

마그나크록이 신성 파르마 제국의 방패막이였듯, 공화국은 죽은 자들의 왕국을 지키는 파수꾼인 셈이다.

나는 공화국으로 돌아와 동쪽 접경도시의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총 세 개의 후보지가 선정되었는데, 그중 하나를 오직 묘인족만을 위한 도시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하루에 트럭 천여 대 분량의 건축자재가 포탈을 통해 들락거렸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수요를 다 충당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숙련된 크록 인부들을 동원해 현지에서 적극적으로 자원을 조달했다.

난민도 적극적으로 들였다. 마그나크록을 쓰러뜨린 뒤로 더 입소문이 난 것인지, 아니면 황국의 사정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탓인지 난민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난민이 많아질수록 범죄율도 기하급수로 증가했다.

범죄율의 증가만큼이나 심각한 건 법기술자의 머릿수였다.

법을 만든 것까지는 좋다 이거지.

문제는 누가 그걸 집행하느냐는 건데.

판사 검사, 변호사,

기초교육도 안 되고 있는 마당인지라 법기술자를 충당할 방법이 마땅치가 않았다.

나는 일단 머리가 좋은 암살형 크록들에게 법전을 달달 외우라고 지시했다. 미봉책에 불과할지라도 어떻게든 사람을 앉혀놓기는 해야겠으니.

도시를 만드는 일로 눈 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던 와중이었다.

"대통령님.”

박이나 실장이 꼭두새벽부터 비장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찾았다. 나는 밤을 새서 쌓인 서류를 처리하던 중이었다.

"서류 더 주겠다는 말만 하지마세요.”

"아닙니다.”

“다행이로군요.”

"직접 확인하셔야할 일이 있습니다.”

"전쟁이라도 났나요? 나브니입니까, 아니면 황국인가요?”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후보자 토론회가 있는 날입니다."

“아......."

그래, 선거가 있었지.

나는 일단 보던 서류를 덮어두었다.

국회를 구성하는 건은 현안 중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다.

최근 정보국에서 불법적으로 후보를 사찰하고 탄압한 것 때문에 민심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말았다.

뒤늦게야 그게 내 뜻이 아니라는 걸 밝히긴 했으나, 엎지른 물은 그리 쉽게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회의실로 가시죠. TV중계가 가능하도록 기술자들이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아직 가정까지 TV가 보급되진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네 7080년대처럼, 광장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재미난 건 에신 사람들이 과학기술에 적응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는 것.

본인의 이해력을 벗어난 현상과 마주치면 어련히 마법이나 술법이겠거니하고 살아온 탓이었다.

반대로 한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은 마법과 술법을 맞닥뜨릴 때마다 패닉에 빠졌다. 그치들은 뭐든 일단 이성으로 설명을 해보려는 습성이 있더라고.

회의실은 선거 중계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거대한 스크린이 수십 개로 분할되어 여러 선거구의 실황을 띄워두었다.

송출되는 화면은 별 거 없었다. 텅 빈 책상과 마이크, 의자 뿐.

"오분 뒤에 시작됩니다.”

박이나 실장이 시간을 다시 한 번 체크했다. 기술자들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뒤에서 대기중이었다.

긴장하고 있나?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책으로 읽기만 할 때는 몰랐다.

직접 지도자가 되어보고 나니 나라를 세우는 게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절감한다.

오늘 치를 후보자 토론회는 그간 벌여온 교육정책의 성과가 시험대에 오르는 무대였다.

선거가 무엇이고 민주주의는 무엇인지,

국가가 나아가야할 방향성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이 되었는지.

"시작합니다.”

수십 개의 스크린에서 거의 동시에 사람의 모습이 잡혔다. 후보자들이 책상에 앉아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나는 그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정보국으로부터 서면보고를 받긴 했으나, 근래 너무 바쁜 통에 수백 명이나 되는 후보자 면면을 확인할 새가 없었다.

“.......크록 숫자가 너무 적은데.”

크록이 다른 종족보다 출마자가 두드러지게 적었다. 인구비로 따질 것 같으면 후보 중에서 절반 이상이 크록이어야만 했다.

그러면 어느 계층이 많았느냐.

수트를 입은 중년 남성들.

대한민국에서 건너온 이민자 출신의 출마자가 제일 많았다.

그들은 권력을 거머쥔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다른 계층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교육수준부터 넘사벽이니까.

이걸 바람직하다고 해야 하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야 하려나.

어쨌건 나는 관망만 할 뿐이다. 공화국을 표방하는 국가가 정치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만약 선거 결과로 인해 다른 종족이 손해를 보는 일이 발생한다면, 앞으로는 그쪽도 후보를 제대로 내지 않겠어.

선거의 소중함은 권력에 한 번 데여봐야 안다. 민주주의라는 게 떠먹인다고 배워지진 않는다더라고.

이윽고 토론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언제든지 스크린 하나를 지목해 그쪽으로 중계를 돌릴 수 있었다.

한동안은 순조로운 듯했다. 흥분한 크록이 토론상대인 인간 남성의 멱살을 쥐고 땅에 패대기치기 전까지는.

난동을 부리는 후보자를 제압하기 위해 무장한 자경단이 긴급히 투입되었으나, 놈은 자경단마저 하나하나 때려눕히는 패기를 보였다.

황당한 건 청중의 반응이었다.

크록이 대다수인 지역구였는데, 그들은 후보자의 호쾌함에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놈은 자경단을 모조리 때려눕힌 후 의기양양하게 주먹을 치켜들어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끼는 있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러고만 말았다.

난장판이 된 건 그 지역구뿐만이 아니었다. 난민 출신의 후보만 둘이 나온 지역구에서는 출신가문을 들먹이며 삿대질을 하다가 결국 주먹다짐을 벌였다.

약 십 퍼센트 가량의 토론회가 자경단 출동으로 엔딩을 맺었다.

“제 생각보다는 경과가 좋아요. 처음 치르는 선거이지만 후보들이 굉장히 열정적입니다.”

박이나 실장이 날 달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 난장판에서도 긍정적인 면모를 찾아낼 줄 아는 여성이었다.

더 볼 건 없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중계화면이 전체적으로 물갈이가 되었다. 모든 지역구를 한번에 다 담아낼 수 없어 로테이션으로 돌리겠다는 기술진의 고육지책이었다.

“........어라?”

나는 새로이 바뀐 화면에서 뜻하지 않은 인물을 발견했다.

여성 후보자가 있었다.

여성이 정치에 진출하는 것이야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에겐 검은 피막에 뒤덮인 커다란 날개가 달려있었다. 그 날개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더 눈에 띄었다.

강철의 자매단 전임 부단장, 엘리시아.

마르밀 가문의 장녀가 토론회장에 앉아 열변을 펼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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