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 흘러간다 (5) >
에신 템.
황제라 불리는 자의 이력은 철저하게 불문에 부쳐졌다.
캐보려고 해도 알 도리가 없는 게, 그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죄다 늙어 죽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그런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면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지 못해서 안달이거든.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황제는 왜 당신을 살려두는 겁니까? 당신의 입이 열린다면 그의 위상이 많이 흔들릴 텐데요.”
황제는 그녀를 죽이기는커녕 일곱 권능 중 하나로 격상시켰다. 과거의 적에 대한 대우치고는 후하기 짝이 없다.
"긴 세월이 흘렀다.”
아바르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자는 아직 나 하나뿐이지. 그는 제국이 멸망한다는 미래가 바뀌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바뀌었습니까?”
"바뀌었다. 나는 이제 폐허가 된 도시만이 아니라 치솟는 화염과 강물처럼 흐르는 선혈을 본다. 죽음을 맞이하는 단말마와 운명을 비통해하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나는 광야에 망연자실하게 선 채, 장대에 꽂힌 에사인의 목과 한 시대의 종말을 바라본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황제가 아바르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황제였어도 이런 예언을 하는 예언자는 건드리지 못했을 것 같다.
황제가 무한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도 칩거에 들어간 이유도 이것 때문인가?
장대에 꽂힌 에사인의 목이 혹시 자기 것은 아닐까하고.
수많은 나라들이 황국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수백만의 군인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도 그는 예언이 드리운 그늘 속에서 허우적대는 중인 것이다.
"제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이유는 뭡니까? 당신은 제가 예언을 실현시킬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르겠다.”
그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운명이란 변덕스럽다. 어떨 때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손길을 벗어나지 못하는가하면, 때로는 너무나도 쉽게 우리를 놓아주곤 한다. 하여 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다. 네가 운명을 따를 자인지, 아니면 바꿀 자인지.”
"제가 변수라는 것만은 확실하군요.”
아바르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라,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
그녀는 제단에서 내려와 계단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피라미드를 다시 관찰해보았다.
번개와 폭풍을 부리는 마법사,
시신을 안아든 채 비탄에 잠긴 전사,
태양처럼 찬란한 후광을 내뿜는 에사인.
계단 좌우에 즐비한 조각들이 올라올 때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와 닿았다.
그들은 황제에 의해 지워진 역사의 증인이었다.
대륙을 아우르던 광대한 제국이 어떤 종말을 맞이했는지.
조각가는 사관의 입장에서 낱낱이 기록해두었다.
계단 아래에는 우리의 수행단 말고도 못 보던 사람들이 더 와있었다. 대부분은 고양이 수인들이었다.
나는 수인들의 앞으로 나서는 자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모를 수가 없지.
그는 에사인이 된 후 검을 맞대본 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전사였으니.
마그나크록을 지원했던 변경백,
제후라.
동수를 이룬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라던가.
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알은척을 했다.
그는 고양이 수인들 중에서 가장 멋진 자이기도 했다. 미간에서부터 콧등으로 떨어지는 저 번개 문신은 전격을 다루는 그의 권능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했다.
“이곳을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후라가 아바르를 향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아문 탁 님이 계시지 않는 파르마 제국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파르마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도 종의 미래를 도모할 때가 되었다.”
아바르의 분위기가 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날카롭고 위압적이었다. 이쪽이 그녀의 본래 모습라고 봐야겠지.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너희는 진력을 다해 라힐을 도우라. 그를 돕는 것은 제국을 재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고양이 수인들도 나만큼이나 놀라는 중이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후라는 그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고양이 수인들 사이에서 그녀의 권위는 절대적인 듯했다.
"이들은 묘인족이라고 한다.”
아바르가 내게 말했다.
“한때 제국의 주류였으나, 오랜 세월 이어진 숙청 때문에 이젠 여기 모인 천여 명이 남은 전부다. 지금까지는 투스라의 진노를 피해 몸을 사려야만 했으나, 네가 우리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꺼이.”
고양이와 흡사한 얼굴.
비단 같이 부드러운 털과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
이런 매력적인 종족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치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외적으로 매력적이어서 받아주자는 건 아니다. 그들은 일찍이 에신을 지배했던 통일제국의 후신이다.
지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인간 못지않은 잠재력이 있다고 봐야겠지.
오면서 보았던 묘인족들이 어딘가 맹해 보였던 건 어디까지나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그렇겠지?
나는 아바르가 내게 종의 미래를 맡겼다는 데에서 꽤 낙관적인 관측을 해볼 수도 있었다. 미래는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듯했다. 그녀는 최소한 내가 상황을 더 나쁘게 하진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돌아갈 때는 올 때보다 인원이 훨씬 늘었다. 묘인족들은 덩치가 크고 유순해 보이는 네발짐승 위에 가산을 바리바리 실었다. 현대인인 내 눈에는 차마 가재도구라 할 수조차 없을 만큼 초라한 물건들이었으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삶의 전부였다.
묘인족이 행장을 꾸리는 동안 아바르는 동족들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녀가 용무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왜 동족들과 함께 오시지 않습니까? 오시면 잘해드릴 텐데요.”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아바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켄이 매일 꿈에 나타나 말을 걸어온다. 황제가 내 복귀를 강력하게 요구한다는군. 안달이 났을만도 하다. 전쟁이 시작된 후 나는 한 번도 그를 위해 점을 치지 않았으니.”
"알겠습니다. 묘인족은 제가 책임지고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빚이 있다.
아바르는 내가 중요한 기로에 설 때마다 추종자의 입을 빌어 지원을 해주었다.
이제는 자신의 세력 전체와 제후라라는 강력한 에사인까지 얹어줬으니, 카둔처럼 그녀 또한 내게 올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아바르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혹시 제 미래도 읽어보셨습니까?”
"내가 과거의 실수에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예언이란 모르고 살 때 더 속이 편한 법이다.”
"그건.......그렇겠네요. 이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해주시죠.”
어차피 아바르도 대답해줄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녀는 짐을 잔뜩 올려둔 네 발짐승 위로 훌쩍 뛰어 올라탔다. 나는 고삐를 쥐어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또 물어볼 게 남았나?”
"마지막입니다. 묘인족이 떠나면 이제 이곳은 어떻게 됩니까?”
제도는 폐허가 된 다른 도시들과 달리 일부나마 주거지로서 기능을 하는 중이었다.
그걸 가능게하는 게 묘인족인데, 묘인족마저 떠나면 간신히 남아있는 유적들이 완전히 소실되지 않겠냐는 거지.
“그 점은 걱정하지 말거라. 이 영락한 땅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아바르가 손을 뻗어 먼 발치에서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영체들을 가리켰다.
"저들이 이곳의 주인이다. 한때 제국의 백성들이었으나, 이젠 그리 부르기 힘들게 되었다.”
영체들은 가능한 한 생전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기억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바래는 법이다.
때문에 모습이 뒤틀린 정도가 심할수록 오래 묵은 영체일 확률이 높다.
폐허를 돌아다니는 영체들은 생전의 모습과 크게 동떨어져 있었다.
멀대같이 긴 것, 여러 개의 팔이 달린 것, 구름처럼 공중을 부유하는 것 등.
인간은 고사하고 생물이라고 부르기조차 힘든 형상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제국민이 아닌 영계의 주민으로서 영원히 이승을 떠돌 것이다.
우리는 아바르를 남겨 두고 귀국길에 나섰다.
묘인족은 크록보다도 정글을 더 잘 쏘다녔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활달하고 밝은 종족인 것 같았다.
나는 숙영지를 짓자마자 제후라를 막사로 불러들였다.
아무래도 그들에 대해 더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우리에 대해 말해달라고?”
제후라가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까. 너희에 대해 알아야 어디에 어떤 집을 마련해줄지, 어떤 일을 함께 해볼 수 있을지 알지 않겠냐.”
"우리는 보다시피 인간보다 훨씬 강하고 아름답지. 우리는 반짝이는 걸 좋아하고, 남녀노소 장신구를 만들거나 모으기를 즐긴다.”
아름답다는 건 인정한다.
그래도 저렇게까지 자부심을 담아 말하니 이상하게 들리기는 하네.
장신구에 대한 확고한 기호는 그의 귀에 치렁치렁 달린 보석 귀걸이를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에게는 썩 잘 어울렸으나, 남자가 저렇게 본격적으로 치장을 하는 풍습은 이쪽 정서로는 낯설다.
"혹시 주거지에 관한 요구사항이 있나? 볕이 잘 들어야한다든지, 강물을 끼고 있어야 한다든지.”
"집은 비만 막아줄 수 있다면 족하다 불행히도 제도의 건물들은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몇 안 되는 멀쩡한 집에서 모여 살아야만 했다.”
“빗물이 새면 지붕을 덧대면 되잖아.”
"아무리 궁하더라도 그런 누추한 일에 백성들을 내몰고 싶진 않다.”
"누추하다니, 뭐가?”
"지붕을 덧대는 일 말이다.”
그가 역겹다는 듯이 내뱉는 통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빗물이 줄줄 새는 집에 사는 건 괜찮은 일이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이건 대화로 설득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묘인족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아름답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있다면 더한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참고 사는 모양이다. 마치 곧 죽어도 머리는 못 자르겠다던 구한말 양반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먹을 거는 어떠냐? 가리는 음식, 선호하는 음식이 있을까?”
정기호가 권했던 꼬치구이가 생각났다. 그 징그러운 곤충이 주식이라면 같이 사는 걸 재고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먹을 것은 가리지 않는다. 애초에 먹을 것 자체에 큰 의의를 두지 않지.”
이 점은 다른 아종들과 흡사한 모양이다. 요리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발전시킨 건 인간이 거의 유일했다.
"하지만 사냥하는 건 좋아한다. 먹는 것보다 사냥의 과정을 더 즐긴다고 말해야겠군.”
어째 고양이랑 비슷하네. 고양이도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사냥을 즐긴다고 하니.
"가장 좋아하는 건 곤충 사냥이다. 사냥감은 크고 강할수록 좋다. 정글에는 작심하고 사냥할만한 강한 곤충이 많다.”
"특별히 선호하는 사냥감이 있나?”
"글쎄.......”
그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기다가,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딱 하나를 꼽자면, 말라붙이다. 육질이 기가 막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