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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49화 (149/205)

149화. < 흘러간다 (4) >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먼 길을 떠나 마침내 만나게 된 게 아바르, 황제의 두 번째 권능이라니.

하지만 어째서 아바르가 신성 파르마 제국의 수좌를 맡고 있는 것일까?

자기 부하가 이 먼 나라에 외따로 나와있는 걸 황제는 알고 있나?

왜 신성 파르마 제국은 멸망해가는 것이며, 폐허가 된 도시를 서성이던 영체들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너무 묻고 싶은 게 많아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제가 여기 올 것이라는 것도 당신이 예언했던 대로입니까?”

안다, 형편없는 질문이라는 거. 더 중요한 질문이 산적해있다는 거.

그래도 알고 싶었다.

그녀가 어디까지 내다봤는지를.

"저는 언제나 제 의지를 따라 판단하고 행동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당신 앞에서 서게 된 걸 보니, 자유의지는 착각일 뿐이고 저는 그저 운명에 놀아나고 있었던 것 같군요.”

아바르가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우리 모두가 운명의 꼭두각시다, 라힐. 그건 운명의 에사인이라고 불리는 나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야. 나는 그저 인연의 한 타래를 잠시 들여다볼 뿐이다. 손끝만 스쳐도 흐트러지고 마는 민감한 이야기들이지. 내가 알았던 건 언젠가 우리가 만나리라는 것, 그 사실이 결코 내 입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저는 당신 부하와 생사결을 펼쳤습니다.”

제국의 변경백이라던 고양이 검사가 떠오른다. 그는 날 죽일 기세로, 전심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때 티끌만한 실수를 하나라도 저질렀다면 지금 이 자리에 팔다리 하나 없는 몸뚱이가 와있을 테지.

"제후라는 우리 민족의 긍지다. 그와 겨뤄서 동수를 이뤘다는 데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아바르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미래를 아는 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여유였다.

"우리 민족이라 함은 고양이 수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때 이 땅을 지배했던 위대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다.”

"듣고 싶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나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자, 올라오려무나.”

그녀가 털이 보송보송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손을 잡아달라는 것 같다.

정기호는 이 모든 것이 함정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지금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의도를 걱정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아바르였다.

그녀는 내 간격 안으로 한참이나 들어와 있었다. 아무런 방비태세도 갖추지 않은 채.

그녀는 심지어 마력조차 끌어올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내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 것이다.

나는 손은 잡지 않았다.

대신 제단 위로 훌쩍 올라섰다.

서늘한 냉기가 갑옷 틈바구니를 매섭게 비집고 들어왔다. 제단 부근은 산소가 희박하다는 게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고도가 높았다.

"무엇이 보이나?”

그녀가 아래를 굽어보며 물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닿는 방향으로 눈길을 주었다.

광대한 영역에 걸친 폐허가 한 눈에 들여다보였다. 구획을 가르는 벽과 어마어마한 건축물들이 한때 이곳이 누렸던 영화를 짐작게 해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한 끝에 짤막하게 말했다.

“...과거의 영광입니다.”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파르마 제국은 수많은 종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문화와 예술의 도가니였다. 사람들은 검을 손질하는 방법을 잊을 정도로 기나긴 평화에 젖어 살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화에 만족하는 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다른 사람의 삶을 쥐고 흔드는 데에 몰두했다.”

화르륵.

네 귀퉁이의 화로가 갑자기 푸른 불꽃을 거세게 내뿜었다. 제단 한가운데에서 홀로그램을 연상시키는 희미한 환영이 나타났다.

환영은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곧 한 소년의 형상을 이루었다.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듯한 어린아이였다. 길쭉한 팔다리와 마른 체형을 지녔고, 머리는 새둥지처럼 부스스했다.

"이름은 투스라.”

아바르가 환영을 감싸듯 두 팔을 넓게 벌리며 말했다.

"나는 아직도 그의 어린 시절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는 마법에 뜻을 품은 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였다. 그는 열 살이 되는 해에 내게 직접 가르침을 청해왔다. 당시에 나는 최고사제로서 제국의 모든 제례를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의 당돌함이 마음에 들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빛나는 재능에 이끌렸다. 마치 모닥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환영이 모습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건장하고 당당한 체격을 가진 사내였다.

나는 사내가 소년의 성장한 모습이라는 걸 쉽게 알아보았다. 체구는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특유의 눈매만큼은 그대로였다.

매처럼 형형한 저 눈매.

"투스라는 머지않아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황실마법사의 필두로서 수억에 달하는 제국민의 위에 우뚝 섰지. 황제는 그의 능력과 두뇌를 탐났다. 황제는 그를 가문원으로 들이기 위해 어린 딸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환영은 투스라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파노라마처럼 비춰보였다.

황녀가 낳은 갓난아이와, 투스라가 아이가 잠든 침대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도 보였다.

"어느 날 투스라는 내게 찾아와 제국의 미래에 대한 점을 쳐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사후에도 자식이 순탄한 삶을 살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이유였다. 원칙적으로 국가의 중대사가 아닌 일에는 능력을 발휘하는 게 금지되어 있으나, 나는 황실에 관한 일은 국가의 중대사가 맞지 않느냐는 말에 설득되었다.”

아바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회한이 담긴 한숨이었다.

"그리고 내가 점친 건 온통 숲에 뒤덮인, 폐허로 변해버린 제국이었다. 번성하던 성읍은 유령도시가 되었고, 황손은 잊혀 누구에게도 회자되지 않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렵사리 그에게 전해주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나도 어리석었다. 영원이란 무상한 꿈일 뿐, 산천에 가득한 초목도 겨울이 오면 영락하게 된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한데 사람이라고 해서 다르겠나.

하지만 당시에 나는 그걸 몰랐다. 나는 그에게 동조하여 제국에 큰 위기가 닥쳤음을 황제에게 간언하게 된다.”

"전쟁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투스라는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근원을 뿌리부터 뽑고자했다. 그는 황제에게 때가 늦기 전에 이웃나라를 침공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농기구나 만들던 대장간에 온종일 망치질이 끊이지 않았다. 사내들은 펜을 내려놓고 검과 창을 쥐었다. 온 국민이 투스라가 불러일으킨 열기에 기꺼이 동참했다. 우리는 머지않아 거대한 군세를 일으켜 대륙을 전화로 뒤덮고 만다.”

환영이 바뀌었다. 수십만이 넘는 군대가 평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바글바글한 전장에서 한 마법사의 존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는 강력하기 짝이 없는 대단위 마법으로 평야를 문자 그대로 갈아엎는 중이었다.

"적들은 우리만큼이나 평화라는 타성에 젖어있었다. 우리는 어린아이 손목을 비틀 듯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우리는 산맥을 넘고 바다를 건너, 기어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고 만다.”

환영은 이제 축제의 장으로 바뀌었다.

오랜 원정에서 귀국하는 병사들의 행렬이 보였다.

병사들은 피곤에 쩔어 있었으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수많은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개선하는 군대의 발치에 꽃을 뿌렸다.

환영은 곧이어 나이가 든 투스라가 장성한 자녀들을 품에 안아드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동안 우리가 세운 위업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는 한 나라가 망국의 길을 걷는 이유에는 내부의 문제가 작용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관심사는 이제 전쟁이 아니라 정치로 옮겨갔다. 그는 정적을 용의주도하게 한 명씩 제거해 나가다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금기에 도달하고 만다.”

"당신이었나요?”

아바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슬픈 눈빛을 하고서.

"오직 단 한 명의 인간만이 그의 위에 서있지.”

“.......황제로군요.”

"황제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그릇된 판단으로 하루아침에 제국을 멸망시킬 수도 있지. 투스라는 한갓 인간이 그런 강력한 권한을 쥐고 있는 이상은 예언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황제의 딸과 결혼했다지 않습니까?”

"황제의 수많은 딸 중 하나와 결혼했을 뿐이다. 황위 계승은 첫째 황자가 유력했지. 투스라는 첫째 황자의 자질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표했다. 그는 황자야말로 예언을 실현하게 될 원흉이라고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그의 집착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광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제일가는 공신이었으며, 역사가 쓰인 이래 가장 강력한 마법사였다. 그에게 맞선다는 건 쉽지 않았다.”

환영이 꺼질 듯이 희미해졌다. 이제 환영이 비춘 것은 투스라가 아니라 아바르 자신이었다.

넓은 방 안에 여러 종족이 뒤섞여있었다. 귀족들로 추정되는 자들이 아바르에게 뭔가를 간청하는 중이었다.

"투스라는 이제 제국 전체를 뒤흔드는 암적인 존재로 자라났다. 황자가 머지않아 그에게 살해당하고 말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삔했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내게 몰려와 그를 단죄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에겐 오직 나만이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는 밤새도록 고민을 거듭했으나, 차마 그를 내 손으로 내칠 수가 없었다. 나의 우유부단함은 폐하께서 직접 찾아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제도가 불에 타고 있었다.

무너지는 건물, 죽어가는 사람들.

잿더미로 화하는 거리에서 투스라와 아바르의 환영이 대치했다. 과거의 잔영에 불과할진대 두 존재가 뿜어내는 기세에 숨이 조여 오는 듯했다.

"내 두 번째 실착이 여기서 벌어진다. 나는 성장한 그를 막을 만큼 강하지 못했고, 그에게 당할 만큼 약하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살아 남아 그가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제국을 둘로 쪼개고, 쪼갠 것을 다시 하나로 합치고, 대대손손 쌓아온 영화를 잿가루로 만드는 것을 보았다.”

아바르가 손을 뻗어 환영을 거두었다.

그녀는 다시 발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는 어떻게 보이나?”

나는 피라미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글 전역에 걸친 광활한 폐허.

끝없는 수해 곳곳에 랜드마크처럼 튀어나온 구조물들.

그리고 구조물 곳곳에 남아있는 전란의 흔적들.

“.......비극이로군요.”

나는 아바르가 겪었을 고통을 감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여길 지켜온 걸까?

"신성 파르마 제국.”

그녀가 노래를 부르듯 조용히 읊조렸다.

"그게 황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이름이다.”

“예?”

나는 벙 쪄서 되물었다.

"황국인들은 자기 나라에 이름이 없다고 생각하더군. 자신들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도. 하지만 본디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황국이 역사를 잊어버린 건 투스라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묻어버리기로 결심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면........설마 투스라는......”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해준 이야기들을 곱씹어보았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 사이에 엄청난 진실이 숨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렵게 숨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래, 나는 황국의 황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녀가 확신에 찬 어조로 내 추측을 확인시켜주었다.

"에신 템이 투스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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