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흘러간다 (3) >
아무래도 그녀는 머리털은 털에 넣지 않는 것 같다. 솜털까지 포함하면 인간도 얼마든지 단모종으로 쳐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식사를 마치자 병사들은 숙영을 할 준비에 들어갔다. 천막을 치고 참호를 파고, 군대에서 익히 본 광경이었다.
크록 전사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사냥을 나갔다. 그들은 가록을 몸의 일부처럼 애지중지했는데, 가록이 가장 좋아하는 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였기 때문이다.
야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강철의 자매단원들이 벌이는 대련을 구경했다. 그녀들은 주인인 카둔만큼이나 성실한 여성들이었다. 잠시라도 몸을 연마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 견딜 수 없는 것만 같다.
파드득.
하얀 깃털이 흩날리며, 금빛 갑옷을 입은 비익족 여전사가 내 앞에 착지했다.
"박이나 비서실장님께서 보내신 서류입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으며 내게 곱게 갈무리된 서류를 건넸다.
나는 서류를 지체하지 않고 열어보았다.
잠깐 사이 뭔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도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는 중이었다.
- 영환의 시판일이 이번달 말일로 잡혔습니다. 시중에는 소울필렛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될 예정입니다.
- 영환의 대량생산체제를 갖추려면 조단위의 설비투자가 필요합니다. 허락하신다면 한국에서 민간 투자자를 구해볼까 합니다.
- 영환의 광고모델은 진소미님입니다.
진소미가 소울필렛의 광고모델이 되는 건 중요했다. 소울필렛은 향후 인류의 건강하고 안락한 삶을 담보할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는 이 약으로 돈놀이를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이 약이 생계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의 손에도 들어가기를 원했다.
돈을 수조나 쏟아 붓고 왜 못 남기는 장사를 하느냐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건 아니다.
공화국의 브랜드이미지가 남는다.
앞으로는 소미가 대표하게 될 브랜드였다.
세계적인 스타로서 그녀가 쌓아온 명망과 공화국의 건강한 브랜드이미지를 일치시키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
신뢰는 돈보다 훨씬 값진 자원이니까.
에사인을 지망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 삼경그룹 회장 김오중이 계약을 갱신하기를 원합니다. 덧붙여 그는 공화국 내에서 유통사업이 가능할지 여부를 문의해왔습니다. 대통령님의 스케줄이 비는 날 사업설명회를 열고 싶다고 합니다.
- 한국제철 이원봉 회장은 다른 광산 후보지에 대한 투자의사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남는 광맥이야 많습니다만, 계약에 따라 기술이전을 받는다면 굳이 지분을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 성원목재 김상신 사장은 에신에서 직접 벌채사업을 벌여보고 싶다고 합니다. 크록을 인부로 고용하는 게 가능한지도 물어왔습니다.
투자설명회에 참여했던 기업인들도 돈 냄새를 맡고 바지런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김오중 회장의 행보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허접한 환생자들을 내세워서 나와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이다.
그 후로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유통사업을 위한 사업설명회를 열겠다니.
이건 희소식이라고 봐야겠다.
삼경그룹은 국내 최고의 경제전문가들을 거느린 기업이다. 그 양반이 우리 유통망을 넘본다는 소식은 우리 경제에 비전이 있다는 걸 공인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뭘 그렇게 실실거리면서 보나?”
정기호가 멀찍이서 내게로 걸어왔다.
"안 실실거렸다.”
"실실거렸다. 사진을 찍어뒀어야 하는데.”
정기호가 손에 쥔 꼬치구이를 내밀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난생 처음 보는 흉측한 곤충이 꼬치에 꿰여있었다.
생긴 건 지네와 흡사했다. 차이점이라면 사이즈가 좀 더 크고, 무척 강인해보이는 턱을 가졌다는 것 정도.
“....지금 날더러 이걸 먹으라고.”
"정글에서 제일가는 진미라는군. 고양이 처자가 네게 특별히 추천해준 음식이다.”
정기호가 고갯짓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하늘사제 나리가 먼발치에서 나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래, 까짓거.”
나는 꼬치구이를 받아 덥썩 베어 물었다.
"어떠냐?”
"...구려.”
마치 떫은 감에 설탕을 바른 듯한 맛이었다.
이로서 고양이 수인과 인간의 음식은 호환되지 않는다는 게 밝혀졌다.
그렇다고 내색을 할 순 없었다. 나는 나리에게 잘 먹었다는 의미로 손을 한 차례 흔들어주었다.
"정치인 다 됐구만.”
"잘 보여야지. 토착세력을 둘이나 적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정찰을 나갔던 대원들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군. 봉화에 불만 타오르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야 불만 붙이고 자리를 떴을 수도 있잖아.”
"그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사람 사는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상하지 않나? 제국이라 불릴 정도의 나라라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한두 군데는 있어야 할 텐데.”
"고양이들은 무리를 안 짓는가보지.”
나는 그의 말을 대수롭잖게 넘겼다. 종족에 따라 생활상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봉화는 낮에도 계속 타올랐다. 끝없이 피어오르는 검고 짙은 연기에서 마법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우리는 봉화를 이정표삼아 여정을 계속했다. 정글은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올가미처럼 우리를 죄어왔다.
손바닥만한 독충들, 곳곳에 도사린 늪, 수령을 짐작할 수 없는 아름드리나무와 그런 나무를 평범하게끔 보이게 만드는 거대한 짐승들.
정보국의 정예요원들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이 땅을 개척하는 건 아주 먼 훗날의 일이 될 것 같았다.
우리는 닷새 후 첫 번째 기착지에 도착했다. 하늘사제 나리는 이곳이 신성 파르마 제국 최북단의 주거지라고 소개했다.
“네흘렘이라고 합니다. 추방자들이 세운 최초의 도시죠.”
나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크르르르......
가록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그르렁거렸다. 나는 고삐를 강하게 당겨 녀석을 진정시켰다.
네흘렘은 도시가 아니라 폐허였다.
분명 이곳이 융성했을 때가 있었을 것 같다. 규모만 따질 것 같으면 공화국 수도보다도 넓었으니까.
그러나 흙먼지로 뒤덮인 길과 풍화작용으로 바스러진 건물들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 시기가 최소한 일이백년 전의 일은 아닐 것 같다. 삼국시대에 쌓았다는 남한산성도 이 정도로 세월이 느껴지진 않았다.
폐허는 옛 영광을 완전히 잃은 채 숲에 잠식되어 있었다. 무너진 건물 사이사이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의지를 가진 마력의 집합체.
영체였다.
가록은 그들에게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영체의 음기를 혐오할 수밖에 없으니까.
“주민들이.......보이지 않는군요.”
나는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박병철 장관이라면 이런 광경 앞에서도 외교적 수사가 술술 나왔겠으나, 아쉽게도 나는 아직 그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일부는 소천하지 못하고 아직도 땅에 매여있지만요.”
"도시가 왜 버려진 거죠?”
나는 질문을 하자마자 아차 싶었다.
"모든 답은 아문 탁 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녀가 익숙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암, 그렇겠지.
위대한 아문 탁 님은 모르는 게 없으시지.
그런데 자기가 세운 도시가 망할 줄은 몰랐나보다.
슬슬 정기호가 말한 특이점을 고려해볼 때가 된 것 같다.
봉화에 사람이 없었다는 소리.
도시라고 부를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는 정찰병.
나리를 수행하는 수행단의 규모도 제국에서 온 것 치고는 지나치게 단출하다.
결정적인 단서는 마그나크록과 벌였던 전쟁이었다. 신성 파르마 제국은 마그나크록을 돕기 위해 변경백을 급파했다.
그러나 군대는 오지 않았다. 변경백 정도면 휘하에 족히 수만의 병사를 거느렸을 텐데, 그 높으신 양반이 달랑 몸만 왔다고.
물론 몸만 왔다는 그는 에사인이었다.
에사인쯤 되면 능히 일인군단이라고 칭할 만하다만,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모든 단서가 한 가지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 파르마 제국은 이미 멸망한 나라가 아닌가하는.
우리는 영체의 환대 속에서 폐허를 지나쳤다. 길은 울창한 정글 속으로 끝도 없이 이어졌다.
닷새 후, 마침내 우리는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다.
제도는 네흘렘보다 휠씬 잘 보존되어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만한 거대한 건축물들도 보였다.
그러나 이쪽도 스러져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외곽지대에 접어들며 허름한 처마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수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이 거대한 도시의 주인이라기에는 수가 너무 적었고, 문명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듯했다.
하늘사제 나리는 피라미드와 흡사한 삼각형의 거대한 건축물 앞까지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이 위대한 선지자 아문 탁님의 처소입니다.”
피라미드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크록이 몸을 바쳐가며 만든 궁궐을 능가하는 역사였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셔야 합니다.”
무심코 앞으로 나서려는데, 나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나는 정기호에게 눈짓으로 대기명령을 내렸다.
정기호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것이 함정일 것이라는 가정을 아직도 배제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아문 탁이 나 정도 되는 에사인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다면 정글 속에서 쇠락해가지도 않았겠지.
"계단을 따라가면 됩니까?”
"예. 아문 탁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피라미드 위 까마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기호의 걱정과 달리 나쁜 의도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나는 나리와 동행하며 그녀의 마음 일부분을 권능으로 들여다보았다.
일부러 읽는 게 아니라 숨 쉬듯 자연스레 그녀의 의도가 읽혀졌다.
그녀에게서 나는 아문 탁이 최소한 흉신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다녀오마.”
나는 수행단을 일별한 뒤 피라미드의 계단을 향해 발을 힘차게 내딛었다.
이 피라미드의 용도는 이집트의 것과 달리 무덤이 아니라 사원이었다.
내부로 들어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고, 계단은 꼭대기를 향해 일자형으로 뻗어있었다.
나는 수천 개에 달하는 계단을 인내심 있게 올라갔다.
계단 중간중간에는 순례객이 심심하지 않도록 조각상과 비문들이 세워져 있었다. 비문은 제국의 찬란했던 역사에 대한 기록인 듯했다.
그러나 글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문자로 새겨진 탓에.
꼭대기가 가까워지자 기온이 급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서슬 퍼렇게 몰아쳤고, 눅눅한 안개가 발밑에서 일렁였다.
나는 지금 등산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산보다도 더 큰 구조물이었다.
나는 짙은 구름을 뚫고 꼭대기에 도달했다.
꼭대기에는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제단 네 귀퉁이에 둔 화로에서 파란 불꽃이 일렁였다. 제단 앞에는 사람이 한 명 서있었는데, 뒤를 돌아보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진 못 했다.
뚜벅뚜벅.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제단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구나.”
아문 탁.
위대한 선지자이자 천공의 지배자.
그녀는 나리와 마찬가지로 고양이 수인이었다. 그녀는 맹세코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고양이보다도 고귀한 형상을 지녔다.
기다란 털은 은빛이었고, 눈은 호수처럼 푸른 색이었다.
장식이 치렁치렁 달린 사제복을 입었는데, 장신구가 바람결에 흔들릴 때마다 꼬리가 따라 흔들렸다.
별안간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런 일을 언젠가 한 번 겪어보았던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는 충동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구면입니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아참, 저는 라힐이라고 합니다.”
“아문 탁이다.”
그녀가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네겐 아바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