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 흘러간다 (2) >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군.”
료헤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전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사토는 관료조직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지. 그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사토의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화면에 비치는 얼굴만으로는 마음까지 읽어낼 수 없으나,
유난히 생기가 없는 그의 거죽 색깔로 미루어 한 가지 소름끼치는 진실을 추측해낼 수 있었다.
“......꼭두각시는 맞는 것 같네. 저건 인간이 아니야, 부패의 전령이다.”
사토는 예전에 죽었다. 회견장에 나와 의회를 해산하겠다고 선언한 자는 킬데인의 권능으로 되살아난 시체였다.
한 가지 드는 의문은 그가 왜 킬데인을 부패의 에사인이 아니라 불변의 에사인이라고 소개했느냐는 점이었다.
부패와 불변.
둘은 완전히 대비되는 개념이다.
호칭의 변화는 킬데인의 신격이 변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는 이제 뭔가를 썩히는 것보다 보존하는 것에 더 주력하기로 한 모양이다.
생각이 바뀐 데에는 일본이라는 새로운 장난감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겠지.
"일리가 있군.”
료헤이가 내 가설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본의 관료조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보수적이다. 그들이 보이는 옛것에 대한 집착은 시체를 보존하려는 킬데인의 성향과 맞아 떨어진다.”
"상상 가능한 최악의 조합이네.”
"중국보다도 말인가?”
"굳이 우열을 나눠야 하는지도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누가 더 못났는지 겨루는 건 가급적 우리 옆에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만.”
머지않아 담화문 발표가 끝났다. 사토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했는데, 평범한 일본 국민 입장에서는 기가 찰 소리들이었다.
일왕에게 의회가 가지던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거나, 소요사태를 막기 위해 당분간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등이었다.
적잖은 일본인은 여태까지 자신들의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믿고 살아왔다.
국민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의회의 일방적인 폭거를 용납할 리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뉴스는 연이어 일본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도쿄 거리를 점령했다는 내용으로 옮겨갔다.
성명문이 발표된 지 불과 삼십 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조용하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올 정도면 이건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뜻이다.
정부가 미리 동원해두었던 경찰들이 시위를 막아서는 바람에 곳곳에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홍염이 붉게 타오르고, 경찰차가 뒤집어지고, 확성기를 통해 사토 총리를 비토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영국의 유명한 양반이 이런 말을 했다지.
역사는 진보한다나.
이 꼬락서니를 못 봐서 하는 소리다.
놀랍게도 21세기에 들어 인간은 눈부신 속도로 퇴보하는 중이었다.
"너 괜찮겠냐?”
나는 료헤이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의절했다고 해도 본인 고향이잖아.
"사태가 심각하군. 일본이 정치에 실패했을지는 몰라도, 민중은 죄가 없다.”
“그 정치인을 뽑은 게 일본인이긴 하다만.......저러라고 뽑지는 않았겠지.”
"네가 허락한다면 잠시 일본에 다녀오겠다. 부모와 형제를 에신으로 데려와야겠다.”
"일일이 나한테 허락 안 받아도 돼. 너 병장이잖아.”
직속상관으로 장군을 두고 있는 유일무이한 병장.
그가 움직이면 공화국 특수전단 전체가 움직인다.
료헤이는 지체하지 않고 호텔을 떠났다. 나는 남아서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았다.
일본은 확실히 중국보다는 의식이 깨어있는 편이었다. 의회는 킬데인에게 넘어간 모양이다만, 지방자치단체장을 중심으로 속속 반대 성명이 발표되었다.
인구 천만명 이상을 다스리는 도쿄도지사가 정부방침에 불복의사를 표하는 걸 보고 난 후에, 나는 보안라인으로 전화를 한 통 걸었다.
-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정보국 국장을 바꿔보세요.
-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교환원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이 라인은 한국과 공화국 양국을 가장 신속하게 잇는 채널이었다. 연락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누군가를 호출하면, 포탈 안으로 뛰어가서 그 사람을 데려온다. 아쉽게도 아직 차원간 소통방법은 개발되지 않았는지라.
- 불렀느냐.
약 오분여 후, 우르술라가 전화를 받았다.
- 누님, 정보국에서 시급히 처리해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 무엇일까?
- 일본이 킬데인에게 넘어가려는 것 같습니다. 바다를 건너가셔서, 반정부 성향의 시민단체와 정치인들을 지원하세요.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하셔도 좋습니다.
- 드디어 재밌는 일이 굴러들어왔구나. 지도 따위나 그리고 있으려니 좀이 쑤시지 않았겠느냐.
- 전 누님만 믿습니다.
빈말이 아니다. 그녀는 역대 최고의 암살자였다. 이런 종류의 일은 우리 진영 내에서 그녀보다 더 잘 해낼 사람이 없었다.
현지에 적응하는 문제는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겠지. 암살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낯선 환경에 스며드는 것이니까.
- 우선은 도쿄도지사와 접선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료헤이가 도움이 될 겁니다.
- 안 그래도 그 못생긴 상판을 떠올리고 있었다.
부패의 전령은 만만찮은 상대였다.
킬데인은 더욱 무서운 상대고.
놈은 신격을 바꾸며 한 차원 더 성장해낸 것 같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으나, 성장이라면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해냈으니까.
폭로전은 일본과 중국으로 그치지 않았다.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도 잇따라 성명을 발표했으나, 중국이나 일본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두 나라만큼 막장스러운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안습이었던 건 라틴아메리카였다.
멕시코가 욕망의 에사인 나브니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밝혔을 때는 누구 하나 놀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없다고 밝혔다면 그게 놀랄 일이었겠지.
그쪽은 포탈이 열리기도 전부터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었는지라.
나는 에신으로 돌아올 때는 정기호와 함께했다. 그는 료헤이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턱수염을 기르는 중이었다. 덥수룩한 턱수염에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니 헐리웃 스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시합 잘 봤다.”
"어떻더냐.”
"정말 찰지게 맞더라. 수신료가 아깝지 않았다.”
"즐겼다니 다행이로군.”
정기호가 담배연기를 뭉게뭉게 중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근위전사들에게 창문을 활짝 열도록 지시해 그가 대기오염에 기여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어필했다.
물론 그는 눈썹 한 번 끔뻑하지 않았다.
"곧 신성 파르마 제국으로 떠난다. 준비가 되면 너하고 아길리를 데려갈 생각이다.”
"그들을 믿나? 그 고양이 닮은 것들을?”
"믿지 않으니까 경호인력을 빵빵하게 데려가려는 거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라. 나는 이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의 존재가 조금도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라......”
신성 파르마 제국은 마그나크록과 협정을 맺었다.
누구도 숲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는 조건으로.
만약 마그나크록이 감당하기 힘든 상대가 나타나면, 제국의 변경백이 지원에 나선다. 누구도 마그나크록을 넘어서지 못했으니, 신성 파르마 제국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정기호의 지적이 께름칙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게 아문 탁이 판 함정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기로 했다.
하늘사제 나리는 삼일 후, 남행 준비가 끝나자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이번에는 수행원들도 대동했는데, 그들은 그녀와 털 빛깔도, 흐르는 윤기도 달랐다.
고양이 수인 내에서도 묘종이 여러 가지로 나뉘는 듯했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보기에 아름다운 종일수록 신분도 높고 마력보유량도 많았다.
게다가 그녀는 고양이 탈것도 소유했다.
아니, 고양잇과 탈것이라고 해야 하려나.
퓨마와 흡사하게 생긴 거대한 짐승이 그녀의 발치에 얌전히 엎드려있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탈것을 준비했다. 안장을 올리고 고삐를 씌운 가록들이 궁궐 앞마당에 즐비했다.
고양이는 고양이를 타고, 악어는 악어를 타고.
성진기가 이걸 취재해갔어야 하는데.
"길은 저희들이 열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정글을 걷는 게 익숙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나는 길을 연다는 그녀의 표현의 의미를 정글에 진입한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주술사였다. 나무를 굽히고 덤불을 젖혀 길을 내는 게 그녀의 힘이었다.
우리는 그녀가 앞장서서 길을 열어준 덕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마냥 편하게 정글을 가로질렀다.
"아문 탁은 어떤 분입니까?”
나는 나란히 걷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천공의 지배자이자 위대한 선지자이십니다. 끝없는 숲을 거니는 모든 에사인의 정점에 서신 분입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아문 탁은 여러 에사인을 지배하는 절대자로서, 북반구의 황제와 포지션이 비슷하다는 것 같다.
“그도 수인입니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선지자라면 미래를 내다본다는 건가요?”
"저는 그저 안내자일 뿐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위대한 선지자께서는 모든 답을 알고 계신다는 것뿐입니다. 왕께서 품으신 대부분의 의문은 그 분을 직접 만나보시면 해소되리라 여깁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내 질문을 에둘러갔다. 고양이의 표정을 읽는 건 크록보다도 훨씬 쉬웠다. 그녀는 내 질문에 난감해하는 중이었다.
곤란한 질문이라면 하지 말아야겠지.
하지만 여정이 계속될수록 의문이 새록새록 샘솟았다.
에사인의 정점이라는 자가 선지자를 자처한다고?
운명을 내다보는 힘은 두 번째 권능, 아바르가 독점하고 있을 텐데.
아바르는 내가 에사인이 될 것이라고 걸 예언했다.
그녀가 미래시의 주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문 탁은 그저 정글 안에 틀어 박혀 있을 따름이었지.
귀여운 고양이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설마 선지자 흉내를 내는 사짜인가.
아리는 날이 저물도록 내 의문을 해소시켜 주지 않았다.
우리는 곧 정글의 한복판에서 첫 번째 야영을 실시했다.
모닥불이 자글자글 타오르는 가운데, 비익족 여전사 몇 명이 활개를 치며 저녁노을을 향해 날아갔다.
그녀들은 내 위치를 왕궁에 전달하고, 박이나 실장으로부터 빽빽한 보고서를 받아 돌아왔다. 전결이 필요한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나면, 다시 날아가 그걸 또 갖다 주었다.
여러모로 고생이었다.
나는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뜨거운 스튜를 후후 불어가며 먹었다.
아리는 내 맞은편에서 말린 육포 비스무리한 걸 야금야금 베어 물었다. 나는 그녀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다가, 문득 그녀의 머리 뒤편으로 붉은 빛이 치솟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정글 곳곳에서 붉고 거대한 화염이 하늘 위로 드세게 치솟았다.
화염기둥들이 수없이 치솟아 시야가 닿지 않는 지평선 끝까지 평행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불이다!”
야영지가 시끌벅적해졌다. 병사들은 밥을 먹다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치솟는 화염을 쳐다보았다.
“저건 대체......."
"봉화입니다.”
아리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놀란 나머지 그녀가 오늘 중 내 의문에 처음으로 대답했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그녀의 길쭉한 동공에 모닥불이 비쳐 일렁였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숲 저편을 쳐다보았다.
"털 없는 자들의 왕이 당도했음을 알리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