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흘러간다 (1) >
회담이 끝난 후 나는 한국에서 며칠 더 머물렀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 보다 가까이서 관찰해보고 싶어서.
우선 테일리시는 아이돌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그녀는 당분간 한국에 남아 소미의 사제단을 이끌기로 했다.
테일리시와 소미는 기자회견 때문에 언론이 바쁠 때, 힘을 합쳐 미군기지를 한 차례 더 습격했다.
그러나 기지는 시설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있었다. 던전으로 향하는 포탈은 폐쇄되었고, 모든 불법적인 실험의 흔적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내뺀 것까지는 예상했던 그대로라고 하겠다.
그만큼 호되게 당했으니까.
그러나 정기호의 경기가 화제가 될 줄은 정녕 몰랐다.
- UFC 헤비급 컨덴더 결정전, 초인적인 혈투가 벌어지다.
헤드라인이 이렇게 뽑혔다. 격투기 챔피언이라는 위상을 노린 세력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정기호의 상대는 러시아 출신의 이십대 사내였는데, 마력을 잔뜩 실은 주먹을 보고 피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였다.
두 선수는 옥타곤이 형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게 치고받았다. 시합은 정기호의 업어치기 한 판에 러시아 선수가 전봇대처럼 바닥에 박혀버리며 끝이 났다. 이 모든 과정이 여덟 개의 카메라를 통해 라이브로 송출되었다.
압권은 주최측의 발빠름이었다.
완전히 초토화된 경기장에서, 나비 넥타이를 맨 심판이 정기호의 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힘차게 외쳤다.
"승자는, 더 자이언트, 기호정!”
마치 처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듯이 뻔뻔한 진행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백스테이지 인터뷰도 정상적으로 실시했다. 정기호는 호기롭게 챔피언의 이름을 불렀고, UFC 대표라는 민머리 사내는 잔뜩 신이 나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내친 김에 사업을 아예 이쪽 노선으로 선회해볼 작정인 듯했다.
중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의호와 만난 지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공산당 정부로부터 중대한 발표가 있을 거라는 선언이 나왔다.
"예감이 좋지 않아.”
나는 찬 물을 연거푸 들이키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얌전히 앉아있지 못할 정도로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하필 이 타이밍에, 하필 중국이라니.
우리는 중국과 한 차례 대리전을 치르고도 그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본토에 첩자를 보낼만한 여유가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쪽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터무니없기 때문이었다.
군체의식부터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지.
그런 미친 짓거리를 당 차원에서 추진하는 나라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하는 게 불가능하다.
뉴스 화면은 공산당 정부의 텅 빈 프레스룸을 한 시간여째 비추고 있었다.
이네스가 맞은편에 앉아 목을 축였다. 그녀는 중국의 대응을 분석하기 위해 한국으로 긴급히 건너왔다.
“시작되었다.”
이네스가 컵을 내려놓으며 짤막하게 말했다.
어디서나 흔히 볼 법한, 살집이 있는 오십대 초반의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와 연단 위에 섰다. 동시에 카메라 플래시가 어마어마하게 터져대기 시작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다이쉬(載祖).”
이네스가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공산당 간부들은 군체의식에 합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에신을 무력으로 정벌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장본인이라는 것뿐이다.”
"욕심이 많아 보이는 관상인걸.”
욕심이라기보다는 야망이 가득한 얼굴이다. 박병철이 가진 게 긍정적이고 투쟁적인 야심이라면, 그에게서는 어둡고 음습한 욕망이 느껴졌다.
"사실이다. 본래 총서기 자리는 돌아가며 하는 게 원칙이었으나, 그가 일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독재체제가 굳혀지게 되었지. 소수민족을 잔인하게 탄압하는 것도, 언론을 강하게 통제하는 것도 그의 의중이 반영된 일이다.”
이네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는 지난번에 쓰러진 후로 인상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는 그녀를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해주는 게 그녀가 겪는 불안장애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안녕하십니까, 존경하는 인민 동지 여러분.”
드디어 다이쉬가 연설을 시작했다. 중계방송에서는 동시통역이 지원되었다. 그는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무척 선동적인 어조로, 한 단어 한 단어를 씹어 먹듯이 강하게 발음했다.
연설 내용은 본인을 스스로 고무찬양하는 게 절반, 중국인의 자긍심을 추켜세우는 게 절반이었다.
그가 중화민족의 앞날을 고민하느라 밤잠을 못 이룬다는 말을 했을 때엔 취재단으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연설을 들으며 나는 불길한 예감이 점점 현실화되어감을 느꼈다. 이 회견은 정치지도자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종교인이나 할 법한 부흥회에 더 가까웠다.
머지않아 그의 입에서 ‘에신’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나는 여기서부터가 본론임을 직감했다.
"........우리는 오래 전에 에신으로 넘어가 거점을 세우고, 야만인들을 몰아내 인민들이 살아갈 터전을 확보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그 어떤 정부보다도 먼저 에신에 대해 인지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를 빌어 서구의 몇몇 국가들이 중국이 정당하게 확보한 영토를 넘보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합니다.”
나는 다이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네스를 쳐다보았다.
"나도 몰라.”
이네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저 남자가 뭘 원하는지는 알겠네.”
그녀의 말마따나 사실관계는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힘 센 늠이 우기면 그게 법이 되는 거겠지.
다이쉬는 향후 에신에서 벌어질 치킨게임을 위한 명분을 확보해두려 했다.
덤으로 중화민족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빨랐을 만큼 우수하다는 것도 자랑하고.
"또한 우리는 중화민족이 마법과 주술을 다루는 데 있어서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뛰어나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힘을 당 차원에서 깊게 연구해왔으며, 동지들의 숭고한 희생을 딛고 혁명적인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동지 여러분께 사랑과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다이쉬는 이 타이밍에서 한 호흡 쉬었다.
과연 어떤 말이 나올지.
나는 그의 입술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가 언급한 ‘혁명적인 성과’가 백만 명의 영혼을 하나로 합치는 광기라면, 나는 중국의 위험레벨을 미국보다 한 수 위로 상향할 작정이었다.
다이쉬가 왼 주먹을 위로 번쩍 들었다. 그의 뒤편에 시립한 공산당 간부들이 한 몸인 것처럼 동시에 팔을 쳐들었다.
"아무리 모진 바람이 불어오더라도 중화대륙이 둘로 갈라질 수는 없듯이, 모든 인민의 마음 또한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하나의 중국이란 단지 땅의 경계만을 가늠하는 개념이 아니라, 일치단결한 인민의 긍지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면 중화민국은 만세불변의 번영을 누릴 것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중계는 여기서 끊겼다.
“......끔찍하네.”
이네스가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말했다. 내 소감도 그녀와 같았다.
사람들은 방금 나온 저 선언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모를 것이다. 끽해야 중국이 또 중국했나보다 싶겠지.
그러나 군체의식을 겪어본 우리의 입장에서는 충격과 공포일 따름이었다.
다이쉬의 발표내용은 15억 인구를 하나로 합치겠다는 선포나 다름없었다.
더 무서운 건 그 계획이 현실화된다면, 정말로 중국을 아무도 못 막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긴 한가? 억단위의 인간을 하나로 합친다는 게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이냐?”
"불가능해.”
이네스가 잘라 말했다.
"마력이나 물리력은 무한히 늘릴 수 있지만, 정신력은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거든. 군체의식의 일부였을 때 나는 끔찍한 소음공해에 밤낮으로 노출된 기분이 들었어. 수많은 정신이 한데 뭉쳐서 만들어내는 소음이란 정말이지 어마어마해. 괜히 우리가 분가를 원했던 게 아니라고나 할까. 내 경험상 주술로 강제로 묶어둘 수 있는 숫자는 맥시멈 이삼백만이 한계라고 봐.”
“공산당이 그 약점을 보완했을 가능성은?”
“흐음........”
이네스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그것도 역시 불가능해.”
"그럼 방금 그 선언은 그저 내부선전용이라는 건가.”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르긴 하지만....모르겠네........ 데이터에도 없는 가설일 뿐이라.”
"들려다오. 듣고 판단할 테니.”
“개개인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소음공해가 통합에 방해가 된다면, 개개인의 정신을 최대한 비슷하게 조율하면 돼. 만약 중국인 전체의 사고방식을 한 사람인 것처럼 통일시킬 수만 있다면 아무리 거대한 군체를 만들더라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겠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이야.”
중국인 전체의 사고방식을 통일시키겠다니.
그야말로 미친놈이나 할 법한 발상이었다.
가만, 다이쉬의 관상이 어땠더라.
제정신인 게 확실했지?
나는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자칭 전문가라는 양반들이 전파를 낭비하고 있기에.
중국이 날뛰는 모습을 보자니 기습적으로 에신을 알린 건 잘한 일이라는 확신이 든다.
만약 계속 쉬쉬하고 덮어뒀다면 우리가 손 쓸 수 없는 타이밍에 손 쓸 수 없는 장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물론 아는 것과 대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그들의 폭주를 막으려면 앞으로도 골머리가 썩을 듯했다.
암막 뒤에서 미친 짓거리를 벌여온 게 중국이나 미국뿐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듯한 이 느낌.
다이쉬의 폭주를 지켜보는 내내 들었던 불안감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이런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더라고.
“본국의 술이 아직도 가끔 생각나곤 한다. 여기 술은 술이라고 하기엔 너무 밋밋한 것들뿐이라.”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의자 위에 정좌한채 말했다. 그의 무릎 위엔 휘어진 장검이 얌전히 놓여있었다.
야마모토 료헤이 병장.
거울처럼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칼집이 그의 빈틈없는 성격을 웅변해주었다.
그는 심지어 맥주를 담아온 비닐을 수거하기 쉽도록 삼각형으로 꾹꾹 접는 중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술부심이지.”
"부심이 아니다. 아오모리 현의 전통주에는 각별한 점이 있다.”
“각별한 걸 술에서 왜 찾어. 취하기 전엔 쓰기만 하고, 취한 후에는 물맛밖에 안 나는 것을.”
“아무리 너라도 그 발언은 받아들일 수 없군. 그건 술에 대한 모독이다.”
"말해두지만 알콜의 에사인은 없어. 날 화형대에 매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지.”
김의호를 만난 후 일주일이 지났다. 본래라면 신성 파르마 제국의 영토로 출발했어야만 했을 때였다.
내가 그러지 못하고 료헤이와 함께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나누고 앉은 이유는 일본 때문이었다.
다이쉬가 하나의 중국을 이루겠다며 선포한지 불과 하루 후, 일본에서도 총리대신이 중대발표를 하겠다고 나섰다.
왜 일왕이 아니라 총리대신이 나섰는지는 모르겠다. 지금껏 그들이 추진하던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일왕이 있었으니.
잠시 후, 화면에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사토(住廣) 총리는 일흔이 훌쩍 넘은 정치인이었다. 검버섯이 핀 얼굴엔 생기라고는 없어보였다.
다이쉬는 생각이 글러먹었을지언정 야망이 있는 인간이었다. 야망은 사람을 나이보다 어려보이도록 만든다.
그러나 사토는 흡사 말라비틀어진 콩나물 같았다. 기자회견 중에 고꾸라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정력이 고갈된 모습이었다.
사토는 비서의 도움을 받아 마이크를 찾은 뒤, 웅얼대는 목소리로 메모해둔 발표문을 읽어나갔다.
.......
약 삼십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익숙한 단어가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일깨웠다. 나는 하품을 하려다 자세를 벌떡 바로 세웠다.
"........이쪽도 만만치 않군.”
료헤이가 팔짱을 낀 채 신랄한 투로 말했다.
본질을 흐리기 위해 동원된 지루하고 현학적인 표현을 걷어내자면, 회견의 요지는 이랬다.
일왕은 불변의 에사인, 킬데인의 은총을 입어 불멸자가 되었으며, 일본 의회는 현시간부로 만장일치로 해산을 결의했다고.
대일본 제국의 부활을 알리는 일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