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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45화 (145/205)

145화. < 욕망 (15) >

나는 헤인스의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마력을 일절 연마하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면 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터.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무단으로 영토를 침해하는 행위는 협정 위반입니다.”

헤인스가 아무렇잖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는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는 듯했다. 결정적인 증거라기에는 어렵겠으나, 그의 반응은 뉴 텍사스가 미국과 한통속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군.”

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말했다.

"기자회견 건은 유감이다. 우리측 요원의 정체가 대한민국 기자에 의해 밝혀지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공세적인 언론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지. 이게 이렇게 민감할 일 같았으면 미리 상의라도 해볼 걸 그랬군.”

헤인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외교적인 업무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감정을 감추는 데 서툰 사람이었다.

"...모르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우리가 경쟁자가 아니라 같은 배를 탄 운명공동체라는 것만 기억해주십시오.”

"명심하지.”

"저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모쪼록 제 후임자와는 소통이 잘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벌써 돌아간다니 아쉽구나. 이제야 얼굴을 익혀가던 참인데.”

그는 내 립서비스에 애매모호한 웃음을 띄웠다.

"저는 어디까지나 전령일 뿐입니다. 돌아가서 다시 본연의 업무에 주력해야지요. 제 후임으로는 제대로 된 외교관이 올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내가 뉴 텍사스에 바라는 건 많지 않았다. 통역이 필요 없는 사람을 보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실장님.”

나는 박이나 실장을 불렀다.

“헤인스 보좌관에게 선물을 들려 보내도록 합시다. 마그나크록의 가죽조각 정도가 적당할 것 같군요.”

"곧바로 공방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마그나크록의 부산물 중에서 제일 만만한 게 가죽이다. 고기는 욕 먹기 딱 좋고, 뼈는 장비를 만드는 핵심 소재라 유출하면 안 되거든.

헤인스가 궁을 떠났다. 올 때 빈손이었던 그는 갈 때는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갔다.

뉴 텍사스는 에신에 진출해있는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다. 항공기를 띄울 정도면 우리보다도 몇 수는 앞서있다고 봐야지.

그래서 헤인스의 눈앞에서 마그나크록을 족친 게 주효했다. 자고로 외교는 첫째도 힘, 둘째도 힘이라잖아.

에사인의 머리뚜껑을 따는 모습을 보여주니 우리가 이렇게나 비협조적인데도 어떻게든 안고 가보려는 거지.

"실장님, 주말에 한국에 간다고 하셨죠?”

“네."

"저도 갑니다. 대통령께 시간을 비워달라고 전해주세요.”

"신성 파르마 제국과 선약이 잡혀있지 않으신가요?”

"거긴 좀 늦어도 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리 여유롭지 못할 겁니다.”

UA는 어떻게든 무마가 가능하다. 그러나 지구쪽 나라들은 우리에게 불만이 무척 많을 터였다. 특히 중국과 일본이 유난하겠지.

우리가 설득해야 할 최우선타겟은 다른 어디도 아닌 한국의 국민들이었다. 정체된 경제성장, 낮은 출생률과 저조한 실업율 등, 한국은 에신이 아니더라도 내외로 해결해야 할 이슈들이 산적해있었다.

에신에 관한 뉴스가 그 많은 이슈들을 덮어버려도 된다는 당위성을 가지려면, 한국인들에게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언론은 어떻게 할까요, 보도자료를 낼까요?”

"예. 대대적으로 소문을 내주시죠.”

기왕에 이슈메이커를 자처한 몸이다.

소문난 잔치를 만들어봐야겠다.

박이나 실장은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대한민국은 에신의 존재를 알게 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차원 국가지도자와의 정상회담이라는 뜨거운 화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뉴스는 전파를 타고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 공전의 히트를 터뜨렸다. 청와대 프레스룸 앞은 수천여 명의 기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론사란 언론사는 모조리 기자를 보낸 것만 같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방송사는 이 만남이 가지는 의의를 분석하기 위해 정규 프로그램 방영을 취소해버렸다.

여기도, 저기도,

채널을 돌리면 나오는 것이라고는 온통 내 얘기뿐이었다.

물론 긍정적인 반응만 있지는 않았다.

광화문에는 주말이 될 때까지 밤마다 시위대가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나를 사탄으로 규정한 종교단체의 교인들과, 마법이 열어줄 새로운 시대를 환영한다는 시위대들이 연일 격렬하게 부딪혔다.

이토록 격렬한 대립구도가 만들어진 건 성진기 기자 때문이다. 그는 마법이 단순히 편리하기만 힘이 아니라,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에너지원이라는 걸 명백히 밝혔다.

에사인이란 그 길의 끝에 다다른 초월자들이며, 그들 중 하나가 공화국 수반인 라힐이라고도.

"얼굴이 나날이 훤해지시네요.”

"허허, 그렇습니까.”

김의호가 내 두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참고로 얼굴이 훤해진다는 건 빈말이다. 그는 근래에 몰라볼 만큼 늙어버렸다. 내 축복이면 육신의 나이를 역행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으나, 그가 급격하게 노화한 건 육체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신적인 마모 때문이었다. 그는 임기 말에 터진 굵직굵직한 일들을 눈에 띄게 버거워하는 듯했다.

"영광입니다, 대통령 각하.”

이어서 박병철 외교부장관이 나와 악수를 나누었다.

김의호가 현안에 치여 마른 잎사귀처럼 시들어간다면, 박병철은 나날이 팔팔해져만 갔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은 저무는 해와 뜨는 달을 연상시킬 만큼 대비되었다.

실제로 정치권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안다.

한 물 간 현직 대통령.

여권의 실세, 외교부장관.

박병철의 주가는 그가 에신 프로젝트의 주역이었다는 정황이 밝혀지며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장관님.”

나는 박병철과 손을 맞잡으며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외교적 수사 뒤에 감춰둔 그의 야망이 눈동자 안에서 용광로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자, 앉으시죠. 좋아하시는 것들로 준비해뒀습니다.”

김의호가 나를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로 안내했다. 과연 내가 좋아하는 메뉴들이 즐비한 성찬이었다.

여기서는 좀 놀랐다. 고작 밥 두어 끼를 같이 먹었을 뿐인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간파당하다니.

잠시 동안 나는 음식을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간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한식이었다. 에신이라고 한식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청와대 전속요리사가 해준 요리만은 못했다.

나는 식사를 하며 창문 밖 까마득히 아래 장사진을 친 기자단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회담장소는 외교부청사 12층이었다. 여기까지 기자들이 따라왔다는 건 청사 포탈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지난번에 주신 파일을 당지도부와 함께 검토해봤습니다.”

김의호가 서두를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끔찍하고 무섭더군요.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는 건지.......”

김의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비극이죠. 저도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 반인륜적인 패악을 저지르고도 그들을 우리의 우방국이라 부를 순 없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렵습니다...미국도 미국이지만, 새로이 알려진 마법이라는 힘이 두렵습니다. 마법을 다루는 인간은 그렇지 못한

인간보다 훨씬 잔인해질 수 있더군요. 보내주신 영상을 보면서 저는 이 힘이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정하진 못하겠군요.”

나는 빙긋 웃었다.

역시 명석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투표는 제대로 했다.

뽑아놓은 사람을 끝까지 지지해주진 않는 것 같으나.

"그러나 모든 일에는 이면이 존재하기 마련이죠. 북한을 보세요, 총과 탱크 같은 과학기술의 산물이 없었더라면 진작 무너졌을 나라죠. 마냥 편리하기만 한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랄까요.”

"모든 일에 이면이 존재한다면, 마법은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양면적인 힘 중에서 가장 날이 날카로우리라 여겨집니다.”

"맞습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손잡이를 쥐셔야지 않겠습니까. 일찌감치 무기로 삼아둬야 손이 베일 일도 없고, 남이 휘두르는 날을 막을 수도 있으실 겁니다.”

김의호가 머뭇거렸다. 그는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미혹이 있는 듯했다.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허나 아쉽게도 제 임기 내에는 마법청을 짓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는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지금에야 다들 놀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지만, 머지않아 이 모든 게 당연시될 날이 찾아올 겁니다. 그때 사람들이 묻겠죠. 어떻게 에신 프로젝트를 숨길 수 있었는지, 돈은 어디서 났으며 사람은 몇 명이나 죽었는지. 그런 질문에 미리 대비해두지 않는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대통령께서는 정권이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박병철 장관이 곁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김의호의 지지율은 근래 가파르게 오르는 중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지자가 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수다쟁이 언론이 다른 이슈들을 밀어내며 만들어낸 착시효과지.

"다음 대선이 언제인가요?”

"일 년하고도 삼 개월 남았습니다.”

"한창 어려울 때로군요.”

임기 일 년 남짓이면 대통령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을 시기다.

"지난 사 년간 벌려놓은 일만 많습니다. 무엇 하나 시원하게 마무리한 게 없지요. 뿌린 일들이 결실을 맺으려면 정권의 연속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공감합니다.”

나도 정권이 넘어가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야당 쪽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그쪽도 내게 지켜야 할 아무런 의리가 없지.

그들이 집권한 뒤 혹여 다른 나라와 손을 잡는다면, 나와 김의호가 그린 그림이 크게 일그러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라힐 님께 제 후임자로 낙점한 인물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안 될 것 없지요.”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근래에 후임자를 보여주겠다는 사람이 유난히 많다는 생각을 하며.

"박병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박병철 장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라......."

나는 입을 벌리며 탄성을 흘렸다.

"설마 장관님이 출마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게 됐습니다.”

그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에신 프로젝트는 제가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권이 바뀌어서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겠다 싶었습니다.”

어쩐지, 이 양반 눈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이글거린다 싶었다.

그와 알게 된 후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 같았다.

그는 정말이지 대단한 권력욕을 가진 사내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권력욕이란 좋은 의미에서의 욕망이다.

김의호도 인물이긴 하나, 그는 성격이 너무 온화했다. 그는 이런 시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재상이었다.

격변의 시기에는 그에 걸맞은 혁신적인 리더가 필요했다.

박병철의 야망과 남다른 추진력이 좋은 쪽으로 발현된다면 대한민국은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 본다.

“...마침 잘 됐군요. 실은 오늘 제가 여러분을 뵙자고 한 이유도 정권 재창출과 무관하지 않은 일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인지요?”

나는 품에서 투명한 비닐막에 싸인 알약을 꺼내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김의호와 박병철이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알약을 살펴보았다.

"영환이라고 합니다. 익스티아의 대항마가 될 물건이죠.”

두 사람의 눈이 큼직하게 뜨였다.

만능재생세포의 힘이 담긴 약.

이 약은 차수진 박사와 조명래 원장의 콜라보가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만능재생세포는 거의 모든 중증외상과 내과적 질환에 효험이 있는 기적의 물질이었다.

미국이 익스티아로 세상을 지배하겠다면, 나는 이 땅에 나만의 보건혁명을 일궈내겠다.

인류공영의 꿈,

그것이 에사인으로서의 내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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