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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44화 (144/205)

144화. < 욕망 (14) >

하늘사제 나리는 남행 준비가 될 때까지 당분간 이 나라에 머물기로 했다. 국가수반으로서 공식적으로 내방하는 것이니만큼 예전처럼 달랑 몸만 가지고 떠날 수는 없었다. 에사인으로서 위엄을 보일 수행단과 적절한 예물이 필요했다.

천공의 지배자를 흡족하게 할 만한 선물.

내 솔루션은 강철의 지배자였다.

깡, 깡, 깡.

해머가 붉게 달귀진 쇳덩이를 힘차게 내리쳤다. 건장한 크록 도제들은 시뻘건 쇳물이 담긴 거푸집을 두 손으로 들고 태연하게 걸어 다녔다.

이곳은 김송화 장인의 공방이었다. 공장을 방불게 할 정도로 넓게 확장된 공방이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여긴 웬일이냐, 라힐."

작고 단단한 체구를 가진 중년 여성이 내게 알은척을 했다. 그녀가 어깨에 멘 해머는 떡메를 연상시킬 만큼 크고 길었다.

"특별한 물건을 하나 의뢰 드리려고 합니다.”

"신성 파르마 제국에게 선보일 물건 말이냐?”

"알고 계시는군요. 사절이 걸치고 온 장신구를 보아하니 그쪽의 눈에 들려면 상당히 뛰어난 물건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힐.”

"그야 강철의 지배자이시죠.”

카둔이 배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너무 컸던 탓에 공방의 망치질이 잠깐 동안 멎고 말았다.

"아직 영광의 용광로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도 쓸 만한 검 한두 자루 정도는 만들어볼 수 있을 거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둔의 기준으로 쓸 만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우리가 보기엔 신물이나 다름없다.

나는 공방을 빠져 나와 궁으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황금빛 갑주를 걸친 비익족 여전사가 공방 귀퉁이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김송화 장인의 공방은 카둔의 거점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에, 그녀의 하수인인 비익족 전사들이 경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시선을 훔친 여전사는 평범한 비익족이 아니었다. 그녀의 날개는 박쥐처럼 검은 피막에 덮여있었다.

엘리시아 마르밀.

강철의 자매단 전임 부단장이자 전생의 소미를 죽였던 여자.

그녀가 소미의 미움을 샀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녀가 얼마나 경멸을 받고 있는지는 동료들이 보내는 눈빛만 봐도 알았다.

왜 엘리시아는 남아서 수모를 자처하고 있을까?

그녀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명문귀족가 출신이다. 언제든지 황도로 돌아가기면 하면 부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차마 카둔의 힘을 포기할 순 없어서일까?

아니면 검은 날개를 가지고는 가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가.

엘리시아에 대한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전적으로 소미의 소관이었다.

나는 궁으로 돌아와 박이나 실장의 업무보고를 받았다. 박이나 실장은 나를 위해 뉴스를 한 아름이나 준비해두었다. 전부 지구에서 하루 이틀 사이 보도된 뉴스들이었다.

"한국 공중파로 나간 뉴스입니다.”

그녀가 빔 프로젝터에 커다란 화면을 띄웠다.

"다음은 외신 보도입니다.”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등으로 작성된 기사가 순차적으로 표시되었다. 중무장한 크록 전사, 비익족 비행전단, 독특한 양식의 크록 도시가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었다.

- 이세계의 실체가 드러나다.

- 촉망받던 케이팝 아이돌의 충격적인 정체

-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표한 이차원 국가의 모습

- 미치광이로 치부되었던 전생자의 증언이 모두 사실로 밝혀지다.

“...난리가 났군요.”

"예상보다 반향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날씨를 제외한 모든 꼭지가 에신 이야기로 채워질 정도니까요.”

나는 박이나 실장이 내온 홍차를 후룩 들이켰다.

빔 프로젝트는 우리가 던진 화두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미국, 일본, 중국, 영국 등지에서는 환생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폭로전이 잇따랐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도 대한민국의 것과 같은 포탈이 존재하며, 정부가 비밀리에 이차원을 개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만.”

나는 뉴스를 보다 말고 손을 들었다.

"거기서 멈춰보세요.”

프로젝터가 영어뉴스에서 멈췄다. 독일 정부의 대국민성명 발표장면이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김의호 대통령이 얼마 전에 가졌던 기자회견과 흡사했다.

아무리 내가 영알못이라도 뉴스 헤드라인 정도는 해석할 수 있다. 연쇄적인 폭로, 숨겨진 프로젝트 등의 문구가 선명하게 보였다.

"역시 독일에도 포탈이 있었군요.”

"독일뿐만이 아닙니다. 프랑스와 인도네시아 정부도 잇따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거점별 주요국에는 포탈이 하나씩 다 열려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뉴 텍사스, 일본, 중국, 영국, 멕시코, 러시아, 베트남.

우리는 지금껏 에신에서 만날 수 있는 나라가 이들뿐일 것이라 철썩같이 믿어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황국과 전쟁을 벌이는 중인 국가의 명단일 뿐이었다.

나브니가 세운 욕망의 왕국처럼 황국과 직접적인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던가, 혹은 신성 파르마 제국처럼 오지 구석에 박혀있다면 그들이 먼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은 모른다는 것이다.

“......다들 참 어지간하네요.”

수많은 나라들이 비슷한 시기에 다르마알의 간택을 받았다.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접촉 날짜나 방법은 제각각이었겠으나, 그들이 취한 행동은 하나같았다. 신세계의 젖과 꿀을 독점하기 위해 입을 다물기로 한 것이다.

국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내린 셈이지.

뜻하지도 않던 나라들의 추가적인 커밍아웃으로 인해 세상은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바티칸에서는 종교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포탈을 악마의 산물이라고 규정했다.

교황청의 정식 입장까지는 아니지만, 종교인들이 이세계의 존재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데엔 성진기 기자가 쓴 기사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 에신을 지배하는 불가사의한 신적인 존재에 관하여.

성진기 기자는 타이틀을 이렇게 뽑았다. 다른 기자들이 자극적인 사진으로 지면을 뒤덮기 바쁠 때 그는 에사인에 관한 심층기사를 송고했다.

기사의 들어가는 부분은 이랬다.

- 먼저 밝혀두건대 나는 어떠한 종교도, 종교적인 선입견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나, 문명의 빛이 찬란히 밝아오는 21세기에도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런 나의 얄팍한 소신은 에신이 세상에 첫 고성을 울릴 때부터 산산이 박살 났다.

나는 그 현장에서 마법을 직접 겪어보았다. 나의 졸필로 마법의 신묘함을 담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대한 간략히 표현해보자면, 그 힘은 우리의 정신을 쉽사리 농락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지금까지 그런 힘은 신화 속에 기거하는 존재들에게만 허용되어 왔다.

기사는 관찰자적 입장에서 에신 사회의 모습을 늘어놓다가, 어느 순간 에사인의 개념을 끄집어냈다.

- 에신으로 넘어와서 내가 처음 들은 말은 에사인이라는 단어였다. 그 단어는 우리말의 ‘신’과 쉬이 매치가 되나, 완벽하게 뜻이 일치하지는 않았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에사인은 보고, 듣고, 만져볼 수 있다는 점이겠다. 놀랍게도 그들은 천지조화를 부리는 힘을 지닌 채 현실세계에 머무른다.

에신 공화국을 지배하는 건 라힐이라는 에사인이었다. 취재일정 중 그와의 만남이 허락된 건 단 하루, 십 분 남짓한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인터뷰는커녕 그에게 입도 뻥긋해보지 못했으나, 단지 그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신적 존재를 응접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가 마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내 영혼이 그의 아우라가 일으킨 파장을 견디지 못해 바스러질 듯이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거인을 마주친 생쥐, 격랑 위를 표류하는 한 장의 낙엽이었다.

.......

이 글을 기고하기까지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나는 아직도 그와의 만남을 떠올릴 때마다 전율을 금치 못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에신에서 보고 겪었던 모든 것이 나 자신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지 절감케 한다.

드라마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겨우 신세계의 초입에 다다랐을 뿐이다. 그러나 감히 말해두건대, 나는 이 새로운 세계가 갈피를 잃은 현대인의 메마른 영혼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으리라 예견한다.

성진기 기자는 내가 건네준 폭탄은 터뜨리지 않았다.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대신 그는 나에 대한 썰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두었다. 읽어보니 과연 종교계가 발칵할 내용들이 가득했다.

뭐, 어쩌겠어. 이 또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보이는 신이 보이지 않는 신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필연이지.

향후에는 국경선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도 향후 크게 변화할 것이다.

이젠 흉신들도 지구를 무대로 거침없이 세력을 넓히리라 예상된다. 남미 일대와 동쪽 숲 일부를 장악한 나브니가 대표적이겠다.

이윽고 기사의 검토가 끝났다. 몇몇 알지 못하던 나라가 포탈의 보유국으로 밝혀진 것 말고는 예상했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대통령님, 콜턴 헤인스 국가안보 보좌관이 면담을 청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박이나 실장이 물었다.

이것도 예상했던 범주 내라고 해둬야겠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허여멀건한 백인 사내가 보무도 당당히 대전에 들어섰다. 그는 백인 특유의 투명한 피부가 시뻘겋게 보일 만큼 흥분한 채였다.

"대통령 각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신지.”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도대체 그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내 태평한 반응은 통역을 통해 한 번 더 딜레이가 되어 그를 더욱 복장 터지도록 만들었다.

“각하께서도 뉴스 정도는 보실 거 아닙니까? 대한민국과 에신 공화국이 우방국 관계라는 뉴스가 전 세계에 파다합니다!”

그가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거칠게 소리쳤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꽤나 무례한 제스처였다.

“UA는 회원국의 독자적인 외교권을 인정하지 않던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실 텐데요. 에신의 존재가 공표됐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녕 모른다고 발뺌하시겠습니 까? UA는 회원국의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금껏 전쟁도 마다하지 않으며 숱한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런 행동에는 에신의 존재에 대한 비밀을 엄수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각하께서 취하신 행동은 회원국 전체의 이득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입니다!”

헤인스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나는 턱을 괸 채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어이."

아길리가 헤인스를 향해 서릿발 같은 살기를 내뿜었다.

"네가 누구 앞에 섰는지 자각해라.”

그녀의 금빛 갈기가 마력을 머금어 허리 위로 올올이 떠올랐다. 헤인스는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헤인스 보좌관.”

나는 당황하는 그를 위해 입술 끝만 슬쩍 올려 미소를 지어주었다.

“UA가 회원국의 이득을 위해 그렇게 노력을 기울여왔다니,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군.”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언제나 당사국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변명조로 말했다. 이미 대전의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졌기 때문에.

크록 장군들은 허락만 떨어진다면 당장 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였다.

"그렇다면 혹시나 해서 말이다만.”

나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남의 나라 지하에 포탈을 열고 두더쥐처럼 돌아다니는 행위는 누구의 이득에 포함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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