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욕망 (13) >
위치가 참 오묘했다. 생긴 것도 일본 흡사한데, 거리도 딱 한국과 일본만큼 떨어져있었다. 바다가 숲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네가 식생을 자세히 묘사해준 덕에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다. 목생족이 도시를 짓고 살 만큼 큰 숲은 빤하니까.”
"동쪽으로도 진출을 해야겠군요.”
나는 마커를 들어 지도의 세 군데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었다.
"이 인근으로 실사를 나가보죠. 국경도시 후보지로 적합할지.”
한국인들은 주변국과 트러블이 생길 때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조상님이 터를 잘못 잡으셨다고.
변변찮은 천연자원도 없어,
땅덩이도 좁아,
삼면이 바다인데다 주변국가들 중에 정신 박힌 국가도 없다.
특히 땅덩이가 좁은 게 뼈아팠다.
다른 건 노력으로 어찌어찌 커버할 수 있다지만 영토는 전쟁을 하지 않는 이상 늘릴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 비좁은 시루 안에서 내가 잘났니 니가 잘났니 하며 아웅다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영토가 지금보다 두세 배만 더 넓었어도 훨씬 삶에 여유가 있었을 텐데.
땅덩이의 중요성은 에신이라고 다를 게 없다.
여긴 발길 닫는 곳마다 천연자원이 널렸다고?
제아무리 자원이 풍부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 후에는 결국 지구처럼 다른 나라 머리채를 붙들고 싸우게 되겠지.
그래서 아직 미개척지가 남아있을 때 한 뼘이라도 더 많은 땅을 확보해둬야만 한다.
박병철 장관의 말마따나 지금은 대항해시대인 것이다.
19세기에 형성된 국경선이 얼마나 오랫동안 세계질서를 좌우해왔는지를 안다면 어영부영 눌러앉을 틈이 없다.
“레오니드!”
우르술라가 누군가의 이름을 높이 불렀다. 머리를 덤불처럼 흐트러뜨린 사내가 덤블링을 하듯 데구르르 굴러서 등장했다.
"들었느냐?”
"예, 누님.”
"들었으면 나가야지 않을까.”
사내가 엉덩이에 불 붙은 망아지처럼 자리를 박찼다. 동작이 신속하기 그지없는 게 암살자 출신이 틀림없다.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들.
익숙한 광경이었다. 단지 배경만 그림자요새가 아닐 뿐.
나는 지도의 아래쪽도 훑어보았다. 공화국 수도 남방은 광활한 수해가 끝도 없이 펼쳐진 곳으로서, 인류에겐 전인미답의 영역이었다.
마그나크록을 도왔던 고양이 종족이 왔을 것이라 추정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아문 탁이라고 했던가.
위대한 선지자가 이끈다는 고양이들의 신성한 국가가 저 공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남쪽도 조금씩 밝혀지고 있긴 하군요.”
"남방을 탐사하는 건 쉽지 않다. 지도를 이만큼 밝혀낸 것도 다섯 형제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다섯 명이나 말입니까?”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형제들은 한 명 한 명이 고도로 숙련된 암살자였다. 평범한 인간들과는 신체능력과 내구력의 궤가 달랐다.
그런 형제들이 다섯이나 희생됐다는 건 정글 남쪽은 인간이 발을 디딜 수 없는 지옥이라는 의미였다.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더 늘어날 수도 있었다.”
"어떤 점이 발목을 잡고 있습니까?”
"숲이 우리를 성가시게 할 만한 모든 것. 야생동물, 독충, 야만족, 그리고 이름 없는 에사인 정도일까.”
"정 어렵다면 남쪽으로는 늦게 진출해도 괜찮습니다. 최대한 인명피해가 없는 선에서 추진해보도록 하죠.”
"참으로 관대하구나.”
우르술라가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용건이다. 곧 이 나라가 선거를 치른다고 들었다. 총리라는 늙은이가 날더러 입후보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조사해달라던데, 네가 온 김에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전해주도록 하마.”
그녀의 빈 손에서 서류철이 짠하고 나타났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거, 부럽기 그지없는 권능이란 말이지.
"공개적으로 출마의사를 밝힌 사람들의 명단이다.”
서류철이 생각보다 두꺼웠다. 끽해야 인구 이삼십만인 나라에 자리욕심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누님.”
"고생은 내가 아니라 이놈들이 다 하지 않았느냐.”
그녀가 발끝으로 나자빠진 크록의 꼬리를 툭툭 건드렸다.
파충류라는 특이점을 제외한다면 철야근무에 뻗어버린 직장인 그 자체인 자태였다.
나는 집무실로 돌아와 우르술라가 준 파일을 검토해보았다. 우르술라의 파일은 이름, 출신성분, 그 사람의 과거,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비고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름 : 김치우
출신 : 대한민국 서울
약력 : 제 19회 행정 고시 합격
재정경제부와 산업자원부를 오가며 실무경험을 쌓음.
박병철 총리의 제안을 받아 에신으로 건너오게 됨.
특이사항 : 음주운전 경력이 있음.
재산형성 과정이 불투명함.
에신에 넘어온 이후 운하 근처의 땅과 집을 확보하는 데 유난한 집착을 보임.
비고 : 진정성이 의심됨.
지속적인 관찰요망
대개의 정보가 이런 식이었다. 대한민국 출신의 사람들은 비교적 내용이 상세한 반면 에신 출신의 인물은 최근 행보나 주변 사람들의 평가 위주로 기술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파일도 쭉쭉 살피다가, 비고란에 그려진 기호가 암살의 추천여부라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 이 후보는 일곱 권능을 믿고 따르며, 추종자들에게 일곱 권능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설파함. 그 과정에서 라힐 님과 진소미 님에 대한 비하적인 발언을 다수 일삼음.
-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인신을 구속함. 두 발로 걷지 못할 때까지 교정을 실시했는데도 본인의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음.
- 후보를 지지하는 인간들이 교정국 앞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이는 중임.
- 자연사로 위장한 암살이 추천됨. 승인이 떨어지는 대로 착임하겠음.
...도대체 이건 뭐냐.
나는 어이가 없어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아무리 법률이 반포되기 전이라지만, 신앙이 다르다고 걷지 못할 때까지 두들겨 패는 일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을 줄이야.
암살을 추천한다는 문구에 도달했을 땐 게슈타포의 보고서를 읽는 줄로만 알았다.
물론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충심으로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겠지.
그 충심으로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해쳤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문서의 후반부에는 이미 저질러진 살행에 대한 적나라한 기록들도 나왔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공화국에 해를 끼친다는 자의적인 판단에 근거한 살행이었다.
“......교육.”
“네?”
박이나 실장이 의아한 투로 되물었다.
"우리가 지금 탱크나 살 때가 아니로군요. 교육이 무엇보다도 시급합니다.”
"저도 대통령님 말씀에 공감해요. 하지만 교육이라는 게 워낙 광범위해서...그건 어떤 내용의 문서인가요?”
나는 마력을 일으켜 문서를 증발시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서는 내게 공화국의 민낯을 직시하게끔 해주었다. 공화국은 맹목적인 신앙심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무법사회였다.
그리고 잔인함과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있는 게 바로 신앙심이라는 놈이다.
"실장님, 언제 한국으로 간다고 하셨죠?”
"주말에 약속을 잡아뒀어요. 가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교육전문가를 구해야하겠습니다.”
"어느 분야의...”
"사회과학.”
나는 잘라 말했다.
“유입된 난민이나 전사들은 민주적 시민의식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크록들도 현행 교과과정만으로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추는 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교육기간을 전체적으로 늘리고, 고등교육기관을 신설해야합니다. 국방예산을 돌려서라도 교육에 돈을 씁시다.”
말을 하다말고 추가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참, 직급이 높을수록 더 고등한 교육과정을 이수하도록 커리큘럼을 짜는 게 좋겠습니다. 국가정보부장이나 외교부장관, 마법청장, 장군, 누구하나 빠지지 말고 없이 교육을 이수하라고 하세요.”
박이나 실장은 내가 하는 말들을 부지런히 메모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매장시키는 일은 지구에서도 흔히 벌어지곤 했다.
한국에서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도 그런 나라가 쌔고 쌨다.
우르술라의 재능은 그런 나라에서는 빛을 발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나라가 아니다.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진 않았는데 어느 틈인가 그런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내 모든 말과 행동에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내 말과 행동에 수십만 명의 인생이 변한다.
이 위치에 올라보니 비로소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젠 쇼 엔터테이너로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만인을 이끌만한 자격을 갖춰야만 한다.
행보는 거인처럼 대담하게,
배려는 돋보기처럼 섬세하게.
그렇지 않으면 또 억울한 피해자들이 나오고 말겠지.
갑자기 궁궐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근위전사 한 명이 대전 안으로 들어와 내게 보고를 올렸다.
"위대한분이시여, 신성 파르마제국에서 사절이 찾아왔습니다.”
"신성 파르마 제국?”
나는 그런 나라가 있었나 싶어서 실장을 쳐다보았다. 실장도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들라고 해라.”
모르면 일단 들여놓고 판단하자.
잠시 후 황금빛 의상을 입구 보석 장신구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늘씬한 고양이 수인이 등장했다.
수인은 마치 물 위를 걷는 듯이 대전을 사뿐사뿐 가로질렀다. 걷는 내내 꼬리가 위쪽으로 곧게 뻗어있었는데,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반갑습니다, 털 없는 자들의 왕이시여. 저는 아문 탁 님을 모시는 하늘사제, 나리라고 합니다.”
수인은 여성이었다. 목소리가 깜짝 놀랄 만큼 나긋나긋했다.
이런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으나, 고양이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얼굴이 굉장한 미형이라고 할 만했다.
고양의 특유의 가느다란 수염이 장식으로 보일 만큼 몸매가 여렸고, 하얗고 짧은 털은 비단처럼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하늘사제라고?”
"아문 탁님은 천공의 지배자이십니다. 그분을 모시는 종복들에겐 하늘사제라는 관명이 붙지요.”
막힘없는 대답.
어휘의 선택도 고급지다.
마침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던 터라, 신성 파르마 제국이란 나라가 고등교육을 실시할 만큼 체계가 잘 잡혀있다는 게 피부로 와 닿는다.
“제국에서 여긴 어쩐 일이라지.”
"저희 변경백이신 제후라 님께서 이르시길, 털 없는 자들의 왕이 마그나크록의 목을 취하는 대가로 제국으로 가는 길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번개를 부리던 그 만만찮던 에사인이 변경백이었나.
에사인을 장군으로 거느릴 정도라면 과연 제국을 자처할 만하다.
"털 없는 자들의 왕께서는 맹세를 공인받기 위해 아문 탁님과 독대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약속을 하긴 했었지.
구도가 마치 고려나 조선시대와 흡사하다.
중국의 천자에게 왕이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사절을 보내야만 했던 시절.
물론 내 나라는 고려나 조선보다도 작다. 반대로 신성 파르마 제국은 갖출 거 다 갖춘 어마어마한 대국인 것 같고.
"좋다, 만나보도록 하겠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사람이 모름지기 신의가 있어야지. 급할 때 한 약속이라고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야 되겠냐고.
신성 파르마 제국이란 곳에 대한 흥미도 한몫했다.
절대적이고 신성한 권위에 의존하는, 다수의 에사인에 의한 통치체제.
어쩌면 그 나라는 내가 구상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이 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