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욕망 (12) >
- 당신은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하길 바라는 것 같군.
- 그래.
나는 말라붙이가 공화국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내 눈을 벗어난 곳에 있지 않기를 바랐다.
에사인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군체의식이 지금도 서쪽 숲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다지.
그런 일이 이곳에서도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멀리 떨어뜨려 놓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였다.
이네스처럼 울타리 안에 두고 같이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보는 수밖에.
- 당신이 강력한 에사인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우리를 제어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착각이다. 우리는 개체의 총합으로는 하나일 때보다 더욱 강해졌다.
- 제어하려 드는 게 아니라 상생하자는 거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대화.
진심을 알리기에 이보다 정확한 수단은 없다.
나는 내게 아무런 나쁜 의도가 없음을 마음을 열어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 우리는 이미 길을 정했다.
- 장담하는데 그 길은 상황을 더 나쁘게만 만들 뿐이야. 네 형제들이 모두 그런 재미없는 수도생활에 찬성해줄 거라는 착각을 버려.
- 당신은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희망이 없다면 반목할 이유도 존재치 않지.
- 왜 희망이 없다고 속단하지?
- 말했다시피 우리의 지식은 후대로 계승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게 너희들의 문제점이야. 너무 똑똑하다는 거.
나는 이 대목에서 이네스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멀뚱멀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이네스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 너희 군체의 파편들은 너무 머리에 든 게 많아서, 창의적인 사고를 할 여력이 없는 거 같더라고.
- 그게 무슨 소리냐?
- 쉽게 포기하지 말란 소리야. 네 눈앞에 버젓이 그런 종족이 있잖아. 지식을 일일이 가르치지 않아도 태생적으로 습득하는 종족이. 즈라즈가 고개를 돌려 크록 장군들을 쳐다보았다.
크르르......
크록 장군들은 마음으로 오가는 대화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인상만 쓸 뿐이었다.
- 우리는 크록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들을 거느렸지. 크록이 가진 선천적인 능력을 추출해서 상용화하는 데 힘을 쓰고 있어. 최근에는 죽을 사람도 되살려내는 만능 재생세포라는 놈을 만들어냈는데, 이게 또 기가 막히거든.
이네스가 동그랗게 눈을 치켜뜨며 날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 그런 생각까지 해뒀냐는 거겠지.
너무 그렇게 빤히 쳐다보진 않았으면 좋겠다.
껍데기가 비길 데 없이 아름답긴 하지만, 우리가 사귄다면 정신적으로는 게이 커플이 될 테니까.
- .......모르겠군. 크록에 관한 데이터는 전무하다시피 하니.
- 잘 모르면 받아써둬. 세상은 넓고 너희의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 당신과 함께함으로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가 합류해서 당신이 얻게 되는 이득은 무엇인가?
- 너희가 가진 힘과 지식.
나는 당연한 대답을 한 뒤 한 템포 쉬었다.
- 그리고 종의 다양성이 빚어낼 하모니. 군체의식과 정확히 반대되는 지향점이랄까.
3미터에 달하는 장수풍뎅이를 보고도 어떻게 사심을 품지 않을 수가 있겠어.
게다가 그 장수풍뎅이가 씨족사회를 이루어 살아가고, 종족의 미래를 진지하게 걱정하며, 정신세계에서 교장선생님 저리가라 할 만큼 근엄한 어조로 말을 걸어온다면?
대체 이걸 어떻게 참겠냐고.
- 당신이 말해주는 희망은 내 결심을 흐릴 정도로 유혹적이로군.
-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거라잖아. 모처럼 되찾은 자유의지니까 마음 가는 바를 추구하라고.
-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 그렇다면 어떤 문제인지 말해다오.
- .......일단 형제들에게로 돌아가 오늘 들은 이야기들을 전해주겠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그리는 희망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만은 말해두고 싶다.
즈라즈의 마지막 말이 석연찮았다. 그가 결정적인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촉이 강하게 왔다.
즈라즈가 거대한 동체를 돌려 대전을 떠났다. 그의 거체가 바닥을 울릴 때마다 크록 장군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어땠냐?”
"모르겠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이네스는 정신마법을 운용하면서 나보다 더 깊이 즈라즈의 정신세계에 닿아있었는데도, 회담에 대한 평가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감상이 그게 전부가 아닐 것 같은데.”
그녀의 표정이 석연치가 않았다. 실지로 그녀는 아까부터 바닥만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건 그냥.......새삼스럽지만 신기해서 그렇다. 우리가 이젠 정말로 나뉘어졌구나하고.”
"이젠 정말 새삼스럽지.”
"그가 의식을 전해올 때마다 마치 거울 속의 나 자신이 따로 움직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때 로이이자 이네스였다. 중국군의 장교이자 오데르의 검이었다. 인간이자 수생족이었으며, 말라붙이인 동시에 비익족이었다. 나는 심지어 즈라즈이기도 했다. 나는, 나는........”
이네스의 호흡이 급격히 거칠어졌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걸 보자, 나는 다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받쳐주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나는 그녀가 언젠가 군체의식의 잔재를 몰아내는 과정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떠올렸다.
서서히 미쳐가는 것만 같다고.
그녀는 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싸움을 벌이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내면세계에서만의 싸움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조차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람들 투성이였다. 그 사람들 중에서는 나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이네스.”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힘주어 이름을 불렀다.
빛을 잃은 검은 눈동자가 힘없이 나를 향했다.
"이네스.”
나는 그녀의 이름을 거듭해서 불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그녀가 이제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지 자각시켜주는 것밖에.
이윽고 그녀의 눈에 조금씩 생기가 되돌아왔다. 그녀는 내 손을 밀어내며 민망한 듯이 뺨을 붉게 물들였다.
“미안하다. 못 볼 꼴을 보였구나.”
“전혀 그렇지 않아. 힘든 게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얘기해. 혼자 떠안으면 속병밖에 더 나겠어.”
"나는.......지금은 휴식이 필요할 것 같다.”
이네스가 불안한 걸음걸이로 대전을 떠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불안했다.
그녀를 괴롭히는 정신적인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듯하여.
"아주 보기 좋구나.”
별안간 기둥 뒤편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나타났다. 우르술라였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한국에 들른 후로 줄곧 현대적인 의상을 고수해왔다.
"언제부터 보고 계셨던 겁니까?”
"그 불여시같은 계집애가 네 앞에서 약한 척을 할 때부터일까.”
우르술라가 재밌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날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미소였다.
"누님은 이네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네스는 한때 나의 동료이자 우르술라의 부하였다. 이네스가 겪은 정체성의 변화가 우르술라에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했다.
"쓸만한 계집이지.”
"그리고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우르술라가 외려 내게 물었다. 그녀는 이미 교통정리를 끝낸 지 오래였다. 이네스가 과거 로이였다는 것도, 성별이 바뀌었다는 것도 그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죠, 바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너도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그 계집애처럼.”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자, 손을 잡거라.”
그녀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으며 그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스스스......
순간 주변 풍경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포탈을 통과할 때 느끼곤 하는 간섭현상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어둡고 낯선 공간으로 이동해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제단처럼 꾸며진 장소였다. 제례에 쓰일 것 같은 그릇과 도구들, 짙은 향내음, 뼛조각을 실로 엮어 풍경처럼 매달아둔 모습.
그리고 펼쳐진 노트북 몇 개가 부조화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느낌상 옥좌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닌 것 같은데, 궁 안에 이런 장소가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다.
"네겐 여기가 처음이겠구나.”
"이곳이 어딥니까?”
"소개하마. 이곳이 바로 국가정보부의 본부다.”
파아앗.
그녀가 말을 맺는 타이밍에 맞춰 마법등에 불이 들어왔다.
제단일 것이라 생각했던 건 기다란 테이블이었는데, 신문 스크랩부터 해서 온갖 종류의 문서들이 테이블 위를 빼곡히 점령중이었다.
그릇과 도구들은 여기서 식사를 때운 흔적이었다. 개중에는 한국에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배달음식 포장지도 보였다.
그리고 뼛조각은 뼛조각이 맞았다.
암살형 크록들과 인간들이 이불을 덮은 채 초췌한 얼굴로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피곤에 찌든 탓인지, 아니면 이런 상황이 익숙한 건지 나나 우르술라에게 인사를 할 정신머리조차 없어보였다.
"네가 내게 국가정보부를 맡긴 건 탁월한 결정이었다. 보다시피 나는 이 일을 정말 즐기면서 하는 중이니라.”
그녀가 내게 손짓하며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바닥엔 배선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는데, 빈 커피캔이 걸을 때마다 발에 채였다.
나는 걷다 말고 노트북을 앞에 둔 채 장렬한 포즈로 쓰러져있는 크록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의 입가 주변엔 걸쭉한 커피액이 다잉메시지처럼 얼룩져있었다.
“...혹시 인력이 부족하진 않으십니까?”
"인력은 언제나 부족하지. 그보다 여길 보겠느냐.”
그녀가 화이트보드 상단에 붙여둔 지도를 가리켰다.
지도를 작성하는 일은 에신 프로젝트 초창기부터 계속되어온 작업이었다. 최근엔 바쁘다보니 지도의 업데이트 현황을 확인하지 못했다.
“...놀랍군요.”
내가 보고 있는 지도는 지금까지 접했던 그 어떤 지도보다 넓은 범위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공화국을 중심으로 해서 대륙 남부, 서부, 동부 등지가 세세히 표현되었는데, 눈에 띄는 건 각 세력의 영역한계를 표시해놓은 국경선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느냐?”
그녀가 대륙 동부의 한 영역권을 가리켰다. 축척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지구본을 상정하고 본다면 캐나다의 절반은 될 법한 거대한 나라였다.
“모르겠습니다. 위치상으로는 동부전선의 후방이긴 한데...”
“뉴 텍사스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뉴 텍사스가 이렇게까지 크다는 말입니까?”
"정확하다고 말하진 않으마. 견제가 워낙 심해서 요원을 침투시키기 어려운 지역이니. 그렇지만 견제가 심해지는 지점을 선으로 이으면 국경선 정도는 만들어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겠군요, 일리가 있습니다.”
뉴 텍사스가 자신만만한 이유에도 근거가 있겠고.
땅덩이가 이 정도가 되니까 비행기도 띄우는구만.
"여기는 어디인지 알겠느냐.”
그녀가 이번에는 우리의 동쪽 가까운 곳의 숲을 가리켰다. 우리의 동편에도 세력이 하나 자리를 틀었다. 지구본으로 치면 한국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일본과 세력권이 흡사했다.
"잘 모르겠군요. 동쪽에 뉴 텍사스 말고도 나라가 더 있었습니까?”
"힌트를 주도록 하마.”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네가 다녀갔던 곳이라고 하면 알아들을까.”
"아, 설마…!”
나는 짧게 탄성을 내었다. 우르술라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주었다.
"그래, 이곳이 목생족의 국가다. 나브니가 세운 욕망의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