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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41화 (141/205)

141화. < 욕망 (11) >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녀가 데려온 크록의 피부가 얼마나 새하얗던지 눈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으니까.

“화이트모카라고 합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흰 크록이 오른손을 가슴 위에 얹으며 허리를 숙였다.

암살형 크록들도 키만 작다뿐이지 근육이 없진 않은데, 그는 가죽과 뼈가 딱 붙었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깡말랐다.

광대 위로 깊이 자리 잡은 눈동자엔 현기가 넘쳐흘렀다. 마음을 읽히는 듯한 기분이 들 만큼 심원한 눈빛이었다.

"반갑다, 화이트.......모카.”

나만 신기해하는 게 아니었다. 장군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화이트모카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인류에게 있어 도시전설이 크록이라면, 크록의 도시전설은 주술형 크록이었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존재가 떡하니 나타났으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화이트모카는 뜨겁게 쏟아지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품격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 영적인 주인께서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지 궁금했습니다. 직접 뵈니 상상했던 것보다 영혼이 훨씬 크십니다.”

"영혼을 본다는 이야기는 비유가 아니에요.”

차수진 박사가 옆에서 거들었다.

"이 아이는 여러 가지 주술적인 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어요. 마그나크록의 피에 담긴 권능이라고 보아야겠죠. 마그나크록은 자식들 교육을 직접 시킬 타입은 아니었으니까요.”

크록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 여기까지는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종족은 크록 외에도 많으니까.

그러나 화이트모카는 개중에서도 남달랐다. 그는 갓 태어났을 텐데도 벌써부터 완숙한 주술사로서의 면모를 뿜어내었다.

그가 마그나크록의 피에 내재된 지식을 계승한 게 사실이라면, 주술에 한해서는 당해낼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대단한 재주는 아닙니다만, 허락해주신다면 위대하신 분의 궁정에서 소임을 다해보고 싶습니다.”

"안 그래도 마법청만 있는 게 허전했지. 너를 주축으로 주술을 연구할 기관을 만들어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분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화이트모카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탓에 크록들이 어려워하는 자세였다.

그는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몸 덕분에 무게중심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레 고난이도의 동작을 소화해냈다.

나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수진 박사에게 항의했다.

"너무 성의 없이 이름 지으신 거 아닙니까.”

"화이트모카가 뭐가 어때서요? 새하얗고 부드럽고, 달콤할 것 같고, 크롱크나 카룩카이보다 훨씬 낫잖아요.”

"그래도 먹을 걸로 이름을 짓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두고 보세요. 우리 화이트모카가 그 화이트모카보다 훨씬 유명해질 테니까.”

차수진이 이상한 승부욕을 활활 불태웠다. 사람이 한 가지 일에만 미치는 게 이래서 무섭다. 갈수록 상식과는 동떨어지거든.

“...여하간 고생하셨습니다. 박사님께는 여러모로 신세를 집니다.”

프로젝트 초창기에 차수진 박사의 팀은 크록을 배양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워했다.

지금 그녀의 팀은 인력과 자본을 수혈받아 살림살이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나아졌다.

다루는 연구범위도 휩씬 넓어져서, 이제는 내가 일일이 체크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연구들이 이뤄지고 있었다.

연구팀의 총괄책임자인 차수진 박사의 가장 큰 장점은 사고의 유연성이었다. 그녀는 과학에 초자연적인 힘을 접목하기를 전혀 꺼리지 않았다.

에사인의 피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내겠다니.

이런 주술적인 화두에 동기부여를 받을 과학자가 어디 흔하겠냐고.

"뭘요, 저야말로 신세를 지고 있는걸요. 그동안 대통령님 팔뚝에 꽂았던 주삿바늘 수를 생각하면 제 학자적인 양심에 없던 털이 돋을 지경이에요.”

"이미 수북하지 않습니까?”

"제 영혼의 깨끗함은 화이트모카가 보장한답니다.”

그녀가 팔을 벌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화이트모카가 제가 만들어낼 유일한 주술형 크록이 될 거라는 거예요. 실험을 하면서 마그나크록의 피를 다써버렸거든요.”

“...그 많은 피를 말입니까?”

“그러게요. 저도 믿기지가 않네요. 일단 실험에 쓸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은 피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저희 팀이 시행착오를 많이 겪은 것도 사실이고 혹시 마그나크록에게 형제나 자매는 없을까요?”

"없습니다.”

"아, 아쉬워라.”

그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한 명이라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게 어디냐는 생각이 듭니다만.”

"저는 만족스럽지 않아요. 좋은 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다행인 건 꼬리번식은 가능하다는 거예요. 꼬리번식을 하다 보면 막시무스 처럼 1세대를 뛰어넘는 돌연변이가 나올지도 모르죠.”

차수진 박사는 이후로도 내게 몇 가지 추진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하나가 과학계의 근간을 뒤집을 혁신적인 과제라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리 와 닿는 게 없었다.

“총리님.”

나는 그녀가 대전을 떠나자마자 김형식 총리를 불렀다.

"주술청 신설예산을 즉시 확보해두겠습니다.”

그는 내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뭘 해야 할 지 알고 있었다.

“마법청보다 크게 만드셔야 합니다. 주술은 마법과는 완전히 체계가 다른 분야입니다. 마법보다 문턱이 훨씬 낮기 때문에 대규모 교육시설이 필요해질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선거준비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

"이번 주말에 방한일정을 잡아두었습니다. 한국의 노하우를 전수받을 팀을 꾸려갈 예정입니다.”

"저도 총리님과 같이 한국으로 가요. 대통령님께서 셋업해두신 일이 어떻게 풀리는지 결과를 지켜봐야 할 테니까요.”

박이나 실장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내가 성진기 기자에게 파일을 넘겨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청와대 직원식당에 우티르가 있습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한국 생활에 적응한다면 장차 우리에게 유리한 여론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전에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믿음직한 분이셨죠. 같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나 살펴볼게요.”

그녀는 아버지인 박병철 외교부장관만큼이나 정치적인 센스를 타고났다. 그녀가 알아본다고 하면 믿고 손을 뗄 수 있다.

"총리께서는 말라붙이라는 종족에 대해 아십니까?”

"요새도시에 세 들어 사는 종족을 말씀하시는 게로군요. 머물 곳이 없는 떠돌이 신세이지만, 정식적으로 우리 국민이 되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듣자하니 그들에겐 대표자가 있다고 합니다.”

"예, 씨족장이라고 하더군요.”

“이곳으로 데려오세요. 대화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곤충종족에 대한 뒷말이 무성하다. 이제는 뒤에서 공화국을 전복하기 위한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놓아줘야 할지, 붙들어야 할지.

혹은 적대해야하는지.

직접 겪어보고 판단하는 게 좋겠지.

말라붙이와의 만남은 삼 일 후에 이뤄졌다. 말라붙이의 씨족장은 메뚜기도 사마귀도 아니었다. 굳이 지구의 곤충에 비유하자면 장수 풍맹이를 닮은, 아주 우람한 뿔과 강고한 껍질을 가진 곤충이었다.

키는 약 삼 미터.

곤충 사이즈가 이쯤이 되면 위풍당당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그는 하나의 중국의 영향을 받아 지성을 지니게 되었으나, 여느 지성종족들과는 달리 발성기관이 존재치 않았다.

별수 없이 우리의 대화는 이네스의 힘을 빌려 이뤄졌다.

내가 그의 마음에 직접 대화를 걸고, 주술을 통해 생각을 읽어내는.

- 반갑다, 라힐이라고 한다.

- 씨족장 즈라즈다. 당신이 이 나라의 대통령인가.

- 그렇다.

- 당신의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었을 때.......그때 당신은 이 정도로 강하지 않았었는데.

즈라즈의 마음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내 힘을 가늠해보려는 시도인 듯했다.

- 사정이 있었다고 해두지. 이 자리에서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다. 너희들이 정글 어딘가에 나라를 세울 계획이라던데.

- 오해다.

- 오해라고?

- 우리는 자손을 이을 수 없다. 알을 낳을 순 있겠지만, 알에서 태어나는 건 우리와는 다른 사고능력이 없는 말라붙이일 것이다. 자손을 잇는 게 무의미하니 자연히 나라를 세우는 것도 불가하다.

나는 이네스와 눈을 마주쳤다. 여기까지는 그녀가 예측했던 대로였다.

- 그럼 너희들이 원하는 건 뭐지?

- 세상으로부터 잊힐 권리.

- ...설명해 다오.

- 우리의 정신은 한때 하나였다. 하나인 마음으로 용서받지 못할 끔찍한 행위를 저질렀지. 정신이 다시 쪼개졌다고 해서 우리가 저질렀던 죄악이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우리는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할 얼룩이다. 죄악을 끌어안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일단 이네스의 표정이 굉장히 심란하다는 건 알겠다.

이네스는 오래 전부터 하나의 정신이 남긴 흔적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정신수양을 하는 중이었다.

씨족장 즈라즈는 그녀가 걷는 길에 해답을 제시했다.

군체의식의 파편은 결코 인간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점.

영원히 세상을 등지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점.

- 그건 너무 도피성 발언 같은데. 죄를 지었으면 죗값부터 치러야지.

- 죗값을 치르기 불가한 죄다.

- 그야 생각하기 나름이지. 내 친구는 자기 지식을 아낌없이 나눠서 세상에 기여하고 있어. 청승맞게 은둔하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이 된달까.

일단 나는 즈라즈의 판단에 태클을 걸기로 했다. 이네스가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랐기에.

- 우리가 무얼 아는지 아는가.

즈라즈가 역으로 되물었다.

- 모르는 거 빼고 다 안다는 사실은 알아.

- 우리는 어떻게 한 명의 인간에 불과했던 자가 ‘하나의 중국’으로 변모했는지를 알고 있다.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비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이네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져만 갔다.

- 비술의 비밀은 지켜져야만 한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우리의 정신은 여러 갈래로 나뉘고 말았다. 우리는 더 이상 형제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다. 당장 우리들 중에서 나쁜 마음을 먹은 형제가 있다 한들 모른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격리하기로 결심했다.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숨이 멎는 그날까지 서로를 감시하며 지내는 것.

즈라즈의 마음이 전해져왔다. 위풍당당한 외모와 달리 아주 섬세하고 양심적인 마인드를 가진 자였다.

- 네 의기는 높이 사마.

나는 그에게 진심을 담아 경의를 표했다.

- 하지만 공감해줄 순 없겠다. 고작해야 주술 때문에 세상을 등지겠다니, 어리석은 생각이야.

- 고작해야 주술이라니...!

나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허공에서 거대한 대검이 솟아나 손아귀 안에 쥐어졌다.

- 무슨 짓이냐?

즈라즈가 화급히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는 두터운 겹날개를 공작의 꼬리깃처럼 좌우로 활짝 펼치며, 우람한 뿔을 앞으로 내밀었다.

- 아무리 네가 에사인이라도 가만히 당하진 않겠다!

씨족장 자리를 고스톱으로 따낸 건 아닌 모양이다.

그의 마력이 매섭게 내게 부딪혀왔다.

장군들이 일제히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그들이 뿜어내는 살기로 대전의 공기가 터질 듯이 팽팽해졌다.

"나서지 마라."

나는 울토르의 대검 안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스산한 아우라가 대전 바닥을 먹물처럼 물들여가기 시작했다.

즈라즈와 내 정신은 여전히 연결된 채였다. 그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대검을 쥔 채 즈라즈에게 물었다.

- 너는 이 검이 세상을 파멸시키기에 부족해 보이나?

즈라즈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 ..묻는 말에 대답하자면, 그렇지 않다고 하겠다.

그가 침묵 끝에 어렵사리 대답했다.

- 너희의 비술만 위험한 게 아니야. 우리 모두는 위험한 힘을 다루고 있지. 하다못해 주방에 널린 식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찔러죽일 수 있다. 네 말은 식칼이 무서워서 요리를 못 하겠다는 소리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어.

- 하지만 이 주술은 실제로...

- 참고로 나는 칼을 눈에 띄는 곳에 두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잘 갈린 칼이 길바닥에서 뒹굴고 있으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라.

나는 검을 가로눕힌 채 검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즈라즈의 번민하는 정신이 느껴졌다. 그는 내가 가리킨 ‘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것이다.

하나의 중국이 누구에 의해 타도되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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