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욕망 (10)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침착한 투로 되물었다.
"이 일을 오래 해오며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세상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입국하자마자 매스게임을 보여주신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양국의 우호를 과시해야 할 타이밍에 군사적인 면모만을 강조한 건 저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저는 대한민국과 에신 공화국이 힘을 합쳐 상대해야만 하는 조직이 어디일까 고민하던 참입니다. 제 개인적인 정보통을 통해서나 추측으로나, 얼마 안 되는 나라만이 물망에 오를 수 있겠더군요.”
무척 신기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몸이 부서져라 뛰면서 만들어낸 결론이 한 평범한 인간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왔다는 게.
이제껏 내가 만나봤던 기자들은 이렇지 않았다. 특히 회사를 다니며 업무적으로 얽혔던 기자들은 저널리스트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족속들이었다. 용돈 좀 찔러주면 못 써줄 기사가 없었는데.
"외교적인 문제는 제가 섣불리 말씀드릴 주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방금 답을 주신 것이나 다름이 없으십니다만.”
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총리가 그에게 진절머리를 쳤던 이유를 알겠다. 저널리스트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자들을 일컬었다. 죄짓고 이런 사람에게 스토킹당하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닐 것이다.
나야 잘됐지.
기자들을 굳이 왜 본진으로 끌어들였겠어. 먹잇감을 던져줘서 여론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지.
이미 기자들이 심층취재에 나설 경우에 대한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다. 다만 미국 떡밥을 푸는 타이밍은 좀 더 나중이라고 봤는데, 성진기는 확실히 남달랐다. 마치 조기졸업을 노리는 장학생을 보는 것 같달까.
"날카로우시군요.”
나는 갑옷을 입은 채 부자연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대한민국 출신이 맞습니다. 오늘 같은 자리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죠. 국적이 바뀌어도 모국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여전하더군요.”
"맞습니다. 왜, 한국인은 해외 나가서 더 끈끈하게 뭉친다고 하잖습니까.”
"여기서도 한국 출신은 한국 출신끼리 다니곤 합니다.”
“그간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지 궁금합니다. 장군님의 성공담은 청춘드라마보다는 블록버스터에 더 가까울 것 같은데, 제가 제대로 봤을까요?”
"일단은 직함이 장군이니까요.”
"괜찮으시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혹시 인터뷰를 위한 시간을 따로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화의 흐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은근한 칭찬과 민족적인 공감대 사이에 단독인터뷰를 끼워 파는.
물론 이번 교류에는 개인적인 취재가 금지되어 있다. 이러다보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편의를 봐주곤 하는 거지.
"좋습니다. 자리를 마련해보죠.”
나는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르 님이 아신다면 분명 저를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저분은 이곳 태생이신 데다가 피도 눈물도 없는 원리원칙주의자이신지라. 모쪼록 인터뷰 사실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끔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졸지에 우르를 나쁜 놈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핸디캡이라도 줘야 잘생긴 사람에게 기울어진 세상이 좀 더 공평해지지 않겠어.
"당연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성진기 기자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성진기 기자와의 인터뷰는 취재일정의 마지막 날에 잡혔다. 귀국 당일이 되어 기자들이 똥줄 타듯 남은 배터리를 다 쏟아붓고 있을 때, 우리는 궁의 접객실 하나를 통째로 빌려 호화로운 만남을 가졌다.
"안녕하십니까, 성진기 기자님.”
"반갑습니다, 장군님. 시간이 촉박하니 곧장 인터뷰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나눌 여유가 있는 건 나뿐이었다. 출국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베테랑이라는 성진기 기자조차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기자 특유의 통찰력이 날 성가시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애간장을 태우다가 귀국이 임박해진 시점에 약속을 잡은 건 내 나름대로의 경의의 표현이었다.
터억.
나는 우선 투구와 장갑을 벗어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말하려다 말고 내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실례지만 머리카락 색깔이...”
"마법입니다.”
잿빛으로 변한 머리카락은 아직도 낯설었다. 단순히 색깔만 바뀐 게 아니라 어두울 땐 은은하게 빛도 낸단 말이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젊으십니다. 그 나이에 장군이 되는 게 공화국에서는 흔한 일인가요?”
"공화국은 철저하게 능력본위 사회죠. 장군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전투능력이 개화하는 건 대개 젊을 때이고요.”
"마법사이신가요?”
"전사입니다.”
그의 표정이 혼란스러워졌다. 마법사나 주술사라고 하면 초능력을 접해본 적 없는 현대인들도 어떤 개념인지 재깍 알아듣는다.
그러나 전사란 지구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마력으로 신체능력을 극대화한 초인들.
나는 맛보기를 조금 보여주기로 했다.
찌익, 찌이익...
나는 티스푼을 쥐어 오징어채를 만들 듯 잘게 찢기 시작했다.
확실히 전사와 마법사는 결이 다르다. 에사인이 되고도 나는 우르처럼 화려한 불꽃쇼를 펼칠 순 없었다.
“...활영을 하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성진기 기자의 눈이 활영욕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럴까봐 나는 그에게 카메라를 들이지 말라고 사전에 단단히 일러두었다.
나는 잘게잘게 찢은 쇳조각을 한 움큼 쥐어 힘껏 쥐었다. 아귀힘을 풀자 울퉁불퉁한 쇠구슬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순수한 악력으로 빚어낸 쇠구슬이었다.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 공화국에서는 남다른 전투능력을 가진 사람이 장군이 됩니다.”
"정말로 엄청나군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장군님께서 전장에서 어떻게 활약하실지 잘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사실 이 의문은 공화국 군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기도 합니다. 장군님께서 허리에 차신 칼도 그렇고, 공화국 병사들은 대부분 창이나 망치 같은 냉병기로 무장하고 있더군요. 제 상식으로는 그런 무기로는 현대적인 화기를 상대하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대하던 질문이었다. 나는 깍지를 끼며 마음속으로 크록 장군의 전투력을 가늠해보았다.
잘 무장한 크록 전사는 120밀리 활강포에도 직격당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는 건 지난번 전투에서 확인했다.
크록 장군은 크록 전사보다 태생적으로 몇십 배나 강인한 데다가, 내 축복을 받아 훨씬 더 강해졌다.
"정확히 계량화할 순 없습니다만, 공화국 장군 한 명을 쓰러뜨리려면 기계화 보병사단 하나 정도는 필요할 겁니다.”
이제야 제대로 놀라는 표정이 나오네.
"혹시 궁성에서 봤던 그분들이 다...”
“예, 전부 저와 같은 장군들입니다.”
“...알겠군요. 이 수교가 가지는 의미가 드디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성진기 기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미리 대기하던 크록에게 신호를 보냈다.
체구가 작은 암살형 크록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쟁반에는 뚜껑에 덮인 접시가 둘 놓여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식사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습니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이건 드시고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뚜껑을 들어 요리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깃덩이였다.
요리의 비주얼은 한국에서도 흔히 접하는 갈비찜과 흡사했다.
“라진 님. 실은 저희 출국시간이...”
"이건 불사신의 고기입니다.”
성진기의 입이 다물렸다.
마그나크록의 세포는 부패의 에사인이 침습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히 썩지 않은 채로 창고에 남겨졌다.
그 처치곤란의 고깃덩이 중 그나마 조리가 가능한 속살을 잘라낸 게 바로 이것이었다.
“아쉽게도 먹은 사람을 불사신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한국에서 접하는 자양강장식품과는 격을 달리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지금 성진기 님께서는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기연을 접하신 겁니다.”
성진기가 결심한 듯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그는 두툼한 고기를 담대하게 잘라내 크게 베어 물었다. 곧이어 그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실은 마그나크록의 고기가 식용불가 판정을 받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정말이지 맛이 더럽게 없거든.
굳이 묘사를 하자면 겨자를 모래에 버무린 맛이랄까.
"게흑, 쿨럭...!”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헛기침을 했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격려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이죠.”
그래, 불사신의 고기라는데 안 먹고 배길 재주가 있겠어.
몸에 좋다면 바퀴벌레도 먹는다는 민족인데.
그래서 특별히 준비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요리를.
이건 테일리시 폭로기사를 쓴 그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물론 다 먹으면 체질개선에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정력도 좋아질 테고, 조금이나마 마력이 깃들 수도.
그는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어이 그걸 꾸역꾸역 다 먹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비위를 위해 성대한 박수를 쳐주었다.
참고로 난 못 한다.
시험 삼아 이네스가 한 입 먹였을 땐 그녀가 날 암살하려는 줄 알았다고.
"슬슬 가실 시간이 되었겠군요. 제가 하고픈 말은 여기 전부 정리해두었습니다. 돌아가셔서 찬찬히 보시길.”
나는 정신 못 차리는 성진기의 앞에 usb를 올려두었다. 그는 눈물콧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습기가 뿌옇게 찬 안경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이 usb는 김의호 대통령에게 건넨 것과 동일했다.
미국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담긴.
미안하지만 나는 대한민국 정부만 믿고 갈 마음이 없다.
그 미국에게 등을 돌려야 하는 일이었다.
김의호의 낮은 지지율을 감안하자면 탑다운 방식으로는 여론이 잘 형성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나는 투트랙으로 이 일을 끌고 가기로 결심했다. 우리에겐 언론이 ‘유출된 정보’를 먼저 터뜨린다는 구도가 필요했다.
대한민국 최고라는 저널리스트의 펜 끝에서 탄생할 사상 최대의 스캔들이 되겠지.
“그러면 포탈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진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폭로 타이밍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영리한 사람이니 알아서 잘 정하겠지.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밀려오면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당분간 한국은 에신에 관한 소식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것이다.
기자들을 떠나보낸 뒤 나는 다시 왕성으로 돌아왔다.
마그나크록을 쓰러뜨린 뒤 왕좌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마그나크록의 거죽, 피, 뼈, 무엇 하나 쓰임새가 없는 게 없었으나, 나는 이 위업을 자손만대에 남기기 위해 놈의 두개골은 남겨서 왕좌를 장식하는 데 쓰기로 했다.
거대한 신수의 뼈로 왕좌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에 관한 여러 아이디어가 올라왔다.
최종적으로는 두 쪽으로 갈라진 두개골 사이에 왕좌를 두는 안이 채택되었다.
박이나 실장은 두개골로 자리를 장식한다는 컨셉이 너무 야만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나는 오히려 그 야만성이 마음에 들었다.
“라힐님, 차수진 님께서 드십니다.”
크록 근위전사가 조심스럽게 차수진의 내방을 알렸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존경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크록 사이에서 그녀는 거의 대모 정도로 신성시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럴만도 하지, 기실 크록을 위해 해준 것은 나보다 그녀가 훨씬 많으니.
잠시 후 흰 가운을 입은 자그만 여성이 종종걸음으로 등장했다. 잔뜩 흥분한 걸음걸이로 미루어보아 내게 자랑할만한 성과를 만들어 온 게 틀림없었다.
"안녕하세요, 대통령님!”
"오늘은 어떤 일이십니까?”
"어떤 일일지 맞춰보실래요?”
“아시잖습니까, 저는 박사님 하시는 일에 완전히 무지하다는 거.”
"제가 이렇게 신이 난 걸 보고도 모르시겠나요?”
"글쎄요.......재생세포에 관련된 일입니까?”
"에이, 그런 거 가지고는 굳이 찾아오지도 않았죠.”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상상력이 부족하시다니까요.”
차수진 박사가 생글생글 웃더니, 뒤로 돌아서며 손짓했다.
"자, 나오렴.”
멀찍이 기둥 뒤에서 웬 크록이 걸어 나왔다.
키가 백팔십 정도 되는, 허리가 곧게 뻗은 크록이었다.
전당에 도열한 장군들이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옥좌에서 일어나있었다.
크록이 뚜벅뚜벅 걸어와 내 앞에 당당히 섰다. 차수진 박사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펴며 소개했다.
"소개할게요, 화이트모카라고 해요. 최초의 주술형 크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