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욕망 (9) >
기자들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그들이 두려움에 짓눌려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고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신에 대해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왔다. 지금에 와서는 전능신이 신의 기본형일 것이라 널리 여겨지게 되었다.
에사인은 전능하지 않다.
그러나 에사인 앞에 서보면 누구나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며, 자신의 목숨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 머무는 동안 불편함이 없었으면 좋겠군. 내 수하들이 잘 안내를 해주리라 믿는다.
우르가 예를 표하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가 기자단을 인솔해 궁을 떠나자, 박이나 실장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짓궂으시네요.”
"필요악이죠.”
"대통령께서는 대한민국이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려는 겝니다.”
김형식 총리가 옆에서 나를 거들었다. 그는 최근 들어 신수가 상당히 훤해졌다. 내게 귀의해 축복을 받으며 그는 실지로 신체나이를 스무 살은 거꾸로 되돌렸다.
"기자들을 예의주시하세요. 압박은 하되 불편한 경험은 겪지 않도록 편의를 봐주시고요. 특히 성진기라는 사람을 잘 지켜봐야 할 겁니다.”
“아, 그자도 명단에 있었군요.”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요. 아주 거머리 같은 인간입니다. 제 제자가 공직생활 말년에 그 작자에게 물려서 고생을 좀 했었지요.”
김형식이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의 제자 중에 성진기 기자에게 물릴만한 사람이라면 아마 장관급 인사일 것이다.
스캔들로 낙마했던 전임 장관 몇 명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갔다. 물렸다는 표현은 팔이 안으로 굽은 표현이라 생각되었다. 성진기는 이유 없이 펜을 휘두르는 부류의 기자는 아니었다.
“잘 아신다니 설명이 필요 없겠군요. 가급적 그 사람에게 빌미를 줄만한 일을 만들지 않도록 합시다.”
"유념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한번 보아주시겠습니까?”
김형식이 두꺼운 책 한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갓 제본하여 표지가 아주 빳빳한 책이었다. 표지에는 ‘법전’이라는 두 글씨가 굵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나는 책을 한 손으로 쥐고 페이지를 휘리릭 넘겨보았다. 법률편찬위원회가 만들어낸 법들이 부문별로 총망라된 책이었다.
“...드디어 완성됐군요.”
"예, 드디어.”
김형식이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만 임시국회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법률을 반포할 것인가 하는 절차상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제대로 된 국회가 필요하겠군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허나 대통령께서는 신법을 쥐고 계신 분입니다. 대통령께서 명하신다면 절차상의 문제는 생략될 수 있다고 봅니다.”
"선거를 합시다.”
“...예?”
김형식이 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법전을 그에게 돌려주며 싱긋 웃었다.
“주춧돌을 다져야할 나라가 원리원칙을 뭉갤 순 없죠. 선거를 합시다. 그 정도는 할 때가 됐지 않을까요? 우리 수도 인구가 이십만이 넘었죠?”
"정확히는 이십육만입니다. 최근 정착한 인간 용병까지 합산한 수치입니다.”
박이나가 칼같이 대답했다.
"그 정도라면 충분하군요. 십만도 안 되는 도시에서도 시장 뽑고 시의원 뽑지 않습니까? 적당한 날을 잡아서 후보를 받고 선거를 치러 봅시다.”
"그러려면 선거를 관리하는 조직부터 만들어야합니다. 대한민국 선거관리위원회의 자문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건 실장님께서 잘 해주시리라 믿고.......너무 크록 위주의 국회가 되지 않도록 종족 비례석을 늘려봅시다.”
모든 종족이 선거를 치를 준비가 되어있진 않았다.
크록은 조기교육으로 개념만이라도 잡아줬으나, 난민 출신의 인간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전무했다.
때문에 초기에는 대한민국에서 건너온 지식인들이 인간을 대표하여 비례의원이 되리라 예상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난민 중에서 국회의원이 배출되려면 한 세대는 흘러야 하지 않을까.
"다른 안건도 있습니까?”
"말라붙이라는 종족에 관한 것입니다.”
박이나 실장이 흐린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하세요.”
"말라붙이는 우리와 섞이는 걸 거부합니다. 그들은 씨족을 중심으로 단단히 뭉쳐서 방위도시 안에 사실상의 자치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대표는 우리에게 자신들은 잠시 망명을 왔을 뿐이고, 곧 자기 땅을 찾아 떠나겠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료헤이가 경고했었지. 말라붙이가 트러블메이커가 될 거라고.
"갈 곳은 있다고 합니까?”
"정글이 넓으니 갈 곳이야 많겠지요. 인간보다 억센 종족이라 어디서든 잘 살리라 생각됩니다.”
“흐음.......”
난감한 안건이었다. 우리는 말라붙이를 붙잡아둘 명분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놓아주기도 애매했다.
그들은 인간보다 육체적으로 우월하고, 군체의식의 파편을 이어 받아 정신적인 능력마저 개화했다.
차후 우리에게 골치 아픈 상대가 될 수도 있는 종족이었다.
"이 문제는 이네스와 상담해봐야겠군요.”
마찬가지로 군체의식의 파편을 이은 이네스라면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지도 모른다.
회의를 마친 후 나는 이네스를 찾아 북쪽 성벽으로 향했다. 그녀는 연구실에 있지 않을 때는 종종 성벽 위에 오르곤 했다.
나는 울창한 수해를 배경 삼아 선 아름다운 소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수생족을 위해 특별히 고안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아가미를 가리지 않도록 가슴께를 깊게 파낸 원피스였다.
사고는 시각에 지배된다더니.
저 섬세한 용모를 보고 있노라면 더 이상 로이의 자취를 떠올리지 못하겠다. 어느덧 자연스럽게 그녀라는 대명사가 붙었다는 것이 내 의식의 변화를 말해준다.
"왔구나, 라힐.”
이네스가 목소리를 높이며 나를 반겼다. 나는 성벽을 오르기도 전부터 그녀의 정신이 나를 탐색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의 정신계 마법은 나날이 경지가 높아졌다. 군체의식의 잔재를 정리하면서 얻은 성취일 것이라 추정되었다.
혹은 내면에서 군체의식의 씨앗이 발아 중인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불길한 상상을 억누르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정신세계는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지라.
"할 말이 있다면서?”
"우선 이걸 받아라.”
그녀가 내게 얇은 책자를 건네주었다. 인쇄소에서 제대로 제본했던 법전과 달리 이 책자는 그녀가 손수 엮은 것이었다.
- 정신방어술.
"정신방어술?”
“기초적인 공용마법이다. 정신감응술을 하루 만에 익혔던 너라면 이것도 어렵지 않을 거다.”
"...충분히 어려워 보이는데.”
나는 무심코 책자를 펼쳤다가 현학적인 수사와 기이막측한 도형들에게 치여 페이지를 도로 덮어버렸다.
"어렵다고 보일 뿐이다. 정신감응술과 얼개에서 큰 차이가 없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네게 정신마법을 거는 게 불가능하지만, 에사인이라면 얘기가 다르기 때문에 기초적인 방어술이라도 익혀두는 게 좋다.”
그녀는 얼마 전에 내가 나브니에게 조종당했던 일을 짚고 있었다.
나는 별수 없이 책자를 갈무리해두었다.
나브니에게도 잠깐이나마 지배를 당했다면, 최강의 에사인이라는 길레악에겐 속수무책이겠지.
"그리고 네가 맡겼던 대곡도에 대한 감식결과가 나왔다. 검신에 새겨진 표식은 예상대로 다르마알의 상징이 맞았다. 반전 없는 결과라고 해야겠지.”
지상최대의 자유국가가 혼돈의 에사인에게 넘어갔구나.
이것도 반전 없는 전개라고 해야 하려나.
"이네스, 말라붙이들이 독립을 원한다고 들었는데, 왜 그러는지 짐작이 가냐? 아무래도 그치들 속을 아는 건 너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들은 독립을 원하는 게 아니다.”
이네스가 단호하게 부인했다.
"라힐, 너도 알다시피 말라붙이는 지능이 매우 낮은 종족이었다. 우연찮게 군체의식과 합쳐졌다 풀려나게 되어 지능이 높아졌지. 그러나 그러한 행운은 어디까지나 돌연변이를 일으킨 개체에 국한될 뿐이다. 종의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데 독립이 가당키나 하겠나.”
“......그러네?”
말라붙이가 똑똑해진 건 정신적인 개변이었다. 그들은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전적인 형질변화를 겪지 않았다.
대를 이으면서 다시 곤충과 흡사하던 미개한 생물로 돌아가고 말 테지.
"그들이 독립을 원하는 데엔 다른 꿍꿍이가 있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
직접 만나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그 씨족장이라는 자와 한 번쯤 대화를 나눠봐야지 않나 싶었다.
"알았다, 조언 고맙다. 이 책도 고맙고.”
나는 이네스와 작별한 뒤 궁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다시 ‘장군 라진’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였다.
취재팀은 철저히 우리가 짜둔 스게줄대로 움직였다. 공화국은 아직 법령조차 반포하지 못한 야만의 나라였다.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을 겪는다면 공화국의 첫인상이 완전히 이지러지고 만다.
우르 정도 되는 인물을 보모로 붙여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이목을 속이고 누군가를 해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별일 없었지?”
우르는 기자들에게 마법청을 견학시켜주던 중이었다. 장차 대한민국에도 들어설 계획인 시설이니만큼, 마법청의 기능을 어필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왔군, 라진.”
그가 내게 에신어로 말을 걸었다.
"마침 마법사를 양성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던 참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인간들이라 이해력이 아주 높다. 기자라는 직분에 대한 열의도 상당해서 시간이 아깝지가 않군.”
그는 기자들이 썩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기자들의 태도도 한결 달라졌다. 원래도 유난스러운 직업이라지만, 일생일대의 특종을 맞이한 지금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우르가 말도 통하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거침없는 질문세례를 쏟아내는 중이었다.
"저희도 마법사 적성테스트를 받아볼 수 있을까요?”
라던가,
"마법으로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이 궁금합니다.”
등등.
우르는 모든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주었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자니, 그는 카메라 마사지를 받는 것 자체를 즐기는 듯하기도 했다.
하늘에 닿는 재주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면을 쓴 채 살아가도록 운명 지어진 남자.
그는 한평생 인정욕에 굶주렸다.
한 마디로 관종이라는 거지.
인정욕을 채워주는 덴 언론만한 게 없다.
“저기, 질문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우르가 다른 질문을 받고 있었기에 날 찾은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누군가가 다름 아닌 성진기 기자였다.
탐사보도의 달인.
"뭐든지 물어보시죠. 아는 한도 내에서 답변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한국인이로군요.”
“......예?”
“그 억양 말입니다. 배워서 되는 억양이 아니에요. 수도권에서 자란 분 같은데, 맞습니까?”
역시 날카롭다. 애초부터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저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다만 공화국은 초기에 대한민국에서 많은 인재를 수급해 터전을 닦았다고만 해두겠습니다.”
“라진 장군이라고 하셨죠? 당신께 흥미가 생기는군요. 대한민국 출신의 인간이 마법과 술법이 판치는 이세계에서 장군직에 오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죠.”
아이돌 출신의 장군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가 두꺼운 안경을 고쳐 쓰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곁에 바짝 붙더니,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마치 엿들으면 곤란한 말을 하려는 것처럼.
나는 들을 준비가 됐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그에게 슬쩍 몸을 기울였다. 그는 입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내게 속삭여 물었다.
"곤란해하시는 것 같으니 더 묻진 않겠습니다. 제 본래 질문은 이겁니다. 공화국의 적은 미국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