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욕망 (8) >
김의호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주한미군 철수는 저 혼자 밀어붙인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 대한 의식의 개변이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마법이 첨단무기를 대체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이는...”
"대통령님.”
나는 그를 친근하게 불렀다.
"급하실 것 없어요. 단계별로 가시는 겁니다. 우선은 미국을 나쁜 놈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죠.”
"...그정도는 가능하겠습니다.”
김의호는 헤어지기 전 usb를 신주단지 모시듯 품속에 고이 갈무리했다. 그 또한 일국의 수장에 오른 인물이니만큼 여론전이라면 도가 텄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분위기를 반전시킬 만한 건수가 없어 야당에게 당하기만 하는 처지였으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에신의 존재를 폭로하면서 그는 다시 이슈를 선점하게 되었다. 여기서 미국의 만행이 담긴 영상으로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그 분노에 편승한다면 남은 임기를 무사히 마칠 동력이 만들어지겠지.
민간자격으로 에신 땅을 밟을 영예는 스무 개 주요 신문사와 방송사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도합 쉰 명이 넘는 취재단을 꾸렸다.
나는 우르 황자와 함께 그들의 안내역을 맡았다.
물론 공화국의 수장 자격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최고존엄으로서 위엄을 지켜야 했으니.
때문에 나는 얼굴을 투구로 가리고, 카둔이 시제품으로 만들어낸 화려한 제식용 갑옷을 입었다.
외부에 소개될 내 가짜 신분은 ‘공화국 돌격부대 장군 라진’이었다.
이 새로운 신분은 극소수의 측근에게만 알려두었다. 앞으로도 암행이 요구되는 일이 있으면 재탕 삼탕으로 활용해볼 작정이었다.
"어때 보이냐?”
나는 제식용 갑옷으로 빈틈없이 무장한 채 우르의 앞에 섰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아래위로 찬찬히 훑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화염마법으로 구워버리기 딱 좋겠군.”
"미안하다만 대마법 방호진이 내재된 최신형 갑옷이거든.”
"그 대마법 방호진을 내가 부여했다는 걸 잊지 마라.”
할 말 없게 만드네.
잠시 뒤 포탈 저편에서 공무원증을 목에 건 외교부 직원 한 명이 넘어왔다. 그는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시 허둥거리더니, 곧 우리를 향해 긴장된 목소리로 보고했다.
“곧 진입합니다!”
이어서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한 명씩 포탈을 통과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럴 수가 있나.......”
기자들이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앞으로 오십 명 분을 더 봐야 하는 장면이었다.
나와 우르는 마지막 한 명까지 진입한 것을 확인한 후 다가가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다, 외교부장관 우르 게네발이다.”
"장군 라진입니다.”
"외교부차관 조혜영입니다. 영광입니다.”
스스로를 외교부차관이라 밝힌 중년의 여성이 악수를 건넸다. 그녀는 기자단의 인솔자이자 이번 방문의 책임자였다.
기자들은 그리 넓지 않은 방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들은 건축양식이나 재질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듯이 감탄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이 목에 걸고 있는 기자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성진기 기자.
탐사보도의 권위자,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마지막 양심.
그리고 테일리시의 앞날을 막아버린 원흉.
막상 만난 그는 상상했던 것처럼 악랄해 보이진 않았다. 나이는 쉰 가량에 후줄근한 청바지와 면티를 입었는데, 친화력이 상당한 모양인지 젊은 기자들과도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따악.
우르가 손가락을 튕겨 눈부신 빛을 만들어냈다. 그의 마법은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을 앗아갔다.
"미리 경고해두지. 통제를 따르지 않았을 때 발생할 일에 대해 나는 일절 책임을 지지 않겠다.”
"명심하겠습니다.”
조혜영 차관이 모두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만약 일정 관련하여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지 이쪽에 있는...”
우르가 나를 흘긋 돌아보았다.
“...라진 장군에게 협조를 구하도록. 여건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는 적극적으로 돕겠다.”
나는 맡겨달라는 의미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출발하지.”
우르가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밝은 빛과 함께 널찍한 테라스가 나타났다. 새로 지어진 마법청 건물에 딸린 테라스였다. 테라스의 왼편에는 앞마당으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도 위치했다.
이 테라스가 명당이었다. 드넓은 수도의 정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으니.
공화국 수도는 이제 인구 20만을 수용하는 어엿한 중도시로 성장했다. 방사상으로 퍼진 운하 사이사이 크록 고유의 양식으로 지어진 수만여 채의 가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네요.......이런 도시는 지구 어디에서도 못 봤습니다.”
기자들은 감탄하는 것도 잠시,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부지런히 눌러대었다.
매일 보는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인데, 그들은 오죽하겠나 싶었다.
"저기, 저쪽을 보시죠!”
갑자기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새인가?”
“...아니, 새가 저렇게 클 순 없어.”
그들이 가리킨 방향에서 비익족 부대가 편대비행 중이었다. 순백의 날개와 금빛 갑옷이 일렁이는 물결 위에 화려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들은 카둔을 따라 우리 영토에 정착한 강철의 자매단이었다. 그녀들은 한동안 창공을 자유롭게 누비다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기자들의 머리 까마득히 위를 지나쳤다.
"저건 사람이다. 사람이야!”
"날개 달린 인간이라니...!”
기자들이 혼비백산해서 외쳤다. 카메라맨들은 비익족의 고속비행을 따라가기 위해 커다란 카메라를 혼신의 힘을 다해 돌리는 중이었다.
"슬슬 내려가지, 시간이 지체됐다.”
우르가 기자들을 채근했다. 우리는 테라스와 이어진 계단을 통해 마법청 앞마당으로 내려갔다.
앞마당엔 막시무스가 엄선한 크록 근위전사들이 위병근무를 서고 있었다.
평범한 크록들을 압도하는 거대한 덩치와 육중하기 그지없는 철갑옷.
손에 든 중병기는 그들의 체격만큼이나 터무니없는 크기다.
이들은 공화국의 얼굴마담격인 자들이었다. 대한민국으로 칠 것 같으면 헌병대나 의장대쯤 되는 분들이시다.
기자들은 크록을 직접 마주하게 되자 하나같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놀란 얼굴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암행에 나선 보람이 있었다.
"날아다니는 인간 다음엔 악어인간이라니.......선배, 제가 꿈을 꾸는 겁니까?”
"아니, 내 눈에도 잘만 보인다. 우리가 지구로 돌아가서 기사를 내면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히겠다.”
기자들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들의 몸짓에선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껴졌다.
앞마당에는 차량 여럿이 대기 중이었다.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에서 생산해낸 중형 승용차였다.
이런저런 협약을 맺으면서 몇 대 업어왔지.
차량은 기자들을 태우고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천천히 왕성으로 향했다.
기자들은 차창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거리를 구경했다. 크록들도 기자들을 구경하러 거리로 나섰다.
이국의 인간들을 구경하러 나온 크록들로 넓은 거리가 물샐 틈 없을 만큼 복작거렸다.
왕성에 가까워져서는 분위기가 급변했다. 중무장한 크록 전사들이 도로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도열해있었다.
차량은 마치 열병식을 하듯 도열한 보병사단의 한가운데를 거슬러 올라갔다.
"어마어마한 병력이로군요, 선배.”
뒷좌석에 탄기자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게다가 인간보다 휠씬 강인해 보입니다. 아무리 현대전은 보병이 하는 게 아니라지만, 이 정도면 얘기가 다를 것 같지 않나요?"
“난 이제 인간의 시대는 저물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나는 기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열병식을 연출한 것도, 가능한 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도 모두 계획의 일부였다.
그들이 취재라는 목적으로 에신으로 왔다면, 나는 우리의 힘을 보여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김의호를 위해 주한미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줘야만 했다.
또한 에신 공화국과 손을 잡는 게 대한민국을 위한 최선이라는 데 동조해줘야만 한다.
정치인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었다, 언론의 도움이 필연적이었다.
차량은 궁성 앞에 도착하자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더욱 삼엄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나는 기선제압을 위해 이곳부터는 크록 기사단을 배치해두었다.
크록 기사단이란 길들인 가록에 탑승한 기병대를 일컬었다. 가록을 소유할 권리는 가장 강한 크록 전사에게 있었다.
기자들이 각자의 차량에서 나와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가록 위에 올라탄 철탑처럼 거대한 크록 전사였다.
최강의 크록 막시무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찬탄을 자아내는 이 경이로운 생물이 바로 크록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과연 막시무스의 위세는 대단했다. 기자들이 그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고지해두었듯이 궁 안에서는 촬영을 금지한다.”
우르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궁에는 공화국의 지배자인 라힐이 기거한다. 그는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나 에사인의 위치에 오른 자다. 여기서 내가 말한 에사인이란 너희의 언어로는 신에 해당한다.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하도록. 만에 하나라도 그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일이 없기를 바라 마. 너희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촬영을 하려던 기자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은 정말로 신에 버금가는 존재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믿을 만큼 심리적으로 위축된 채였다.
우르가 오른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굳게 닫힌 궁성의 문이 푸른 연기를 토해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득득득득득.......
크록들은 내게 봉헌하기 위해 침식을 잊어가며 이 궁을 지었다. 궁의 규모는 지구상의 어떤 건물과도 비교를 불허할 만큼 초월적이었다.
궁성의 문도 그만큼 초월적인 크기였기에, 평소에는 항시 열어두곤 했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일단 닫히면 장군급의 실력자가 손을 쓰지 않는 이상은 다시 여는 게 불가능했다.
이윽고 문이 열려 대전으로 이어지는 홀이 드러났다. 수백 미터 안쪽에 뼈로 만든 왕좌가 보였다.
대전에는 크록 장군들이 석상처럼 우뚝 서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으나, 그들 전부가 예전 같지는 않았다. 마그나크록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군들의 자리는 새로운 피로 수혈되었다.
"들어가지.”
우르가 넋이 나가다시피 한 기자들을 홀 안으로 인도했다. 나는 이쯤에서 대열을 이탈해 쪽문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쪽문 안쪽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투구를 벗은 뒤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공화국 대통령 라힐님께서 나오십니다.”
잠시 후 박이나 실장이 또렷한 목소리로 내 등장을 알렸다. 나는 쏟아지는 시선을 한 몸에 감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철그럭, 철그럭.
돌을 깎아낸 바닥에 쇠 부츠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이 넓은 공간을 맴도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박이나 실장과 김형식 총리가 왕좌 아래에 시립하여 날 기다리는 중이었다.
수석마법사 오르기와 경호책임자인 아길리도 모습을 보였다.
기자들은 왕좌에서 약 이십 미터 떨어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는 옥좌에 앉아 기자들을 굽어보았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내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무릎을 꿇어야 할지 꼿꼿이 서있어야 할지도 갈피를 잡지 못한 채였다.
나는 억눌렀던 마력을 점차 개방했다. 과밀한 힘에 의해 공간이 이지러지고, 대기가 납작 엎드릴 때까지.
그들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갈 때,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 공화국에 방문한 것을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