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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34화 (134/205)

134화. < 욕망 (4) >

물론 우리도 콘크리트 건물을 슬슬 올리고 있긴 했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건 인프라가 완벽하게 갖춰진 대도시였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우리보다 족히 일이 년은 먼저 포탈을 열었어야만 한다.

단순히 빨리 들어왔다고만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고, 지도자의 역량과 시운이 찰떡같이 맞아떨어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브니에게 이런 위업을 이룰만한 카리스마가 있었던가?

에사인끼리도 엄연히 급이 갈렸다. 나브니에 대한 세간의 통념은 성노동자를 감싸고도는 마이너한 에사인이라는 정도였다.

긴긴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주목을 받아보지 못했던 에사인이 문명의 불모지에 이렇게나 번듯한 도시를 일귀 내다니.

"이제는 벗어도 되지 않겠나?"

우르는 비니가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래, 당당하게 가자.”

우리는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익스티아를 전부 불태워버렸다.

요소요소마다 번을 서던 경비병력도 모조리 쓸어버렸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싶지만, 우린 범죄자가 아니잖아.

얼굴을 가려야하는 건 남의 나라에 땅굴 포탈 뚫어놓고 마약을 몰래 들이는 놈들이겠지.

우르는 비니를 벗은 것도 모자라 불로 태워 없애버렸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돌아다는 인부들은 우리에게 놀라우리만치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포탈을 뚫고 적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이 전부 목생족인 것도 아니었다. 라틴계나 코카시안이 대부분이긴 하나, 인간도 드문드문 보이기는 했다.

나는 우르와 함께 적들의 틈바구니에서 작전의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다음 단계란 간단하다. 포탈을 열어서 왔던 곳으로 귀환하면 끝이었다.

"얼마나 걸리겠냐?”

"방해받지 않는다면 오분.”

단 두 명만을 위한 임시포탈이라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가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주변을 더 살펴보았다.

“.......이건 진짜 특이한데.”

내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할지 모르는 목조왕성과, 크록을 위한 운하도시를 가진 지배자이니.

그러나 특이하기로는 이 도시도 우리 못지않았다. 우리가 크록을 위한 보금자리를 지었다면, 이들은 목생족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두었다.

이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구간이 울창한 삼림이었다. 걸음을 걸으려면 허리어림까지 자란 들풀을 헤쳐야만 했다.

땅을 밟을 때마다 발밑에서 이름 모를 벌레들이 협연을 펼쳤다. 주먹만한 들짐승이 머리 위로 튀어올랐을 땐 헛웃음마저 나왔다.

빌딩들은 멀리서 볼 때나 삐까번쩍했지, 실은 콘크리트로 지은 거대한 화분이나 마찬가지였다.

슬슬 전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부들과 달리 비니를 벗었는데도 내가 적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침입자다!”

아니, 침입자는 너희들이겠지.

나는 대검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메었다. 오분이면 여기 모여든 것들을 모조리 베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검을 섞어보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이들은 발전적인 도시만 보유한 게 아니었다. 이들은 우리보다 강한 군대를 거느렸다.

혼돈에 오염된 목생족 전사는 두려움이라는 걸 몰랐고, 터무니없이 강한 완력과 민첩성을 지녔다.

따라서 지금 내가 베는 적 한 명은 아군 두셋의 목숨에 해당된다.

성실하게 임하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

"멈춰라!”

갑자기 뾰족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여든 전사들의 사이에서 목생족 여인이 또박또박 걸어 나왔다.

그녀는 목생족 특유의 등껍질 같은 피부와 미역 같은 머리카락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녀가 나브니의 고위사제라면 예쁘지 않은 게 이상할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이끌어내려면 아름다운 외모가 유리할 테니.

"물러서라,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그녀는 전사들을 물린 뒤 내게 걸어와 나긋한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에니드라고 합니다. 행정장관을 맡고 있습니다. 귀인께서는 어디서 오신 누구이신지요.”

행정장관이라면 상당한 거물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전사나 마법사 특유의 투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힘의 크기로 따질 것 같으면 그녀 옆에 즐비하게 선 목생족 전사들이 더 강해보였다.

"대답할 의무는 없겠지.”

"부끄러움이 많은 분이시군요. 상관없습니다. 저희는 찾아오는 손님을 따뜻하게 대접할 줄 아는 종족이랍니다.”

"환영하러 나온 것 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삭막한 거 아닌가.”

"벌어진 일을 감안하면 이만하기를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째서 당신 같이 강력한 에사인께서 저희의 시설을 습격한 겁니까? 저희는 공식적으로 황국이 아닌 다른 나라와는 적대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당신은 황국에서 오신 분 같지 않습니다.”

“너희 물건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익스티아 말씀이시로군요.”

에니드가 손가락을 상의 앞섶에 집어넣더니, 얇고 작은 비닐봉지를 꺼냈다. 비닐봉지 안에는 흰 가루가 소량 들어있었다.

그녀는 봉지를 이로 뜯더니 내 앞에서 보란 듯이 가루를 맛보았다.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자극이 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익스티아에겐 아무런 중독성이 없답니다. 익스티아가 문제가 되는 사회라면 더 중독성이 강한 술이나 담배, 마약으로 인한 피해는 훨씬 클 것입니다.”

알레한드로도 예전에 그런 말을 했었다. 익스티아는 결코 중독되지 않는 궁극의 마약이라고.

언제나 한결같은 양으로 정해진 만큼의 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다르마알의 마력에 오염되는 것까지 동의한 적은 없을 텐데.”

"저희의 사업모델을 잘 모르시는군요.”

에니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구매자에게 익스티아가 불러일으킬 위험을 분명하게 고지합니다. 적정량 이상을 과도하게 섭취할 경우 영구적인 장애를 겪을 수 있다고요. 이 세상에 대가 없는 쾌락이란 없는 법입니다. 술도 간암을 유발하고 담배는 폐암을 일으키지 않나요?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스스로를 망가뜨릴 권리를 허용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천만에, 사람들은 약의 부작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

“그 점은 유감이로군요. 하지만 저희는 생산자입니다. 판매단계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답니다.”

"그럼 미국이 판매자인가? 미국과는 어떤 관계지?”

"그건 저도 대답해드리기 곤란하겠군요. 양국간의 협정이란 저보다도 높으신 분들에 의해 맺어지니까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익스티아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다준다는 것 정도입니다. 나브니님께서는 끝없이 쌓이는 돈으로 이곳에 영원한 쾌락의 제전을 세우고 계신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점점 더 많은 전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시설의 중요도를 생각한다면 이곳에 사단급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고 한 들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곁눈질로 우르를 흘끔거렸다. 포탈이 거의 완성되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시간을 끌기 위해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너희 입장은 잘 들었지만, 우리로서는 불법적인 마약을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 수출을 중단하던가, 전쟁을 벌이던가, 선택해.”

“수출을 중단하는 건 제 권리를 완전히 벗어난 일이랍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자리를 마련해드릴 테니, 나브니님과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지으시는 건 어떠실까요?”

“나브니를?”

"머지않은 곳에 계신답니다.”

에니드가 혀를 날름거려 입가에 묻은 가루를 핥았다.

욕망의 에사인과 만나는 건 계획 밖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나브니가 내 상성임을 직감했다.

화염계 마법의 극치에 통달한 우르가 목생족의 상성이듯, 물리력으로는 무적에 가깝다는 울토르의 힘은 정신계 권능에 취약하다.

"왜 망설이시나요? 나브니님을 만나기 위해 저희 시설을 다 불태우는 결기를 보여주신 게 아닌가요?”

"너희 조잡한 마약공장을 불태우는 데엔 결기까지 필요하지 않아.”

"어디부터 지적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우선 그 마약이라는 호칭은 부당해요.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상품은 중독성을 가지지 않으니까요.”

"쾌락 자체만으로 문제가 되지 않나? 사실상 끊지 못하는 물건이라면 중독성을 논하는 게 의미 없을 텐데.”

"익스티아의 부작용이 정 거슬리신다면, 다르마알 님의 축성을 거치지 않은 저자극성 제품도 있어요. 이것 또한 절찬리에 시판중이죠. 익스티아보다는 훨씬 심심한 맛이지만, 당신처럼 보수적인 분들께는 제격이랄까요.”

"다르마알의 축성여부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 거지?”

"혼돈이죠.”

에니드가 싱긋 웃었다.

"인간의 뇌는 불확실성에 홍분을 느낀답니다. 끊임없이 불확실한 것에 도전하도록 진화를 거쳐 온 생물이라서요. 혼돈은 우리에게 내재된 그런 원시적인 욕구를 채워줘요. 혼돈의 정수를 아주 약간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쾌락을 느껴보실 수 있어요.”

그녀는 말에 그치지 않고, 봉지를 뜯어내 손가락 끝에 가루를 미량 올려놓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내 쪽으로 내밀며 물었다.

"한번 맛을 보시겠어요?”

"사양하겠다.”

"어서요, 어차피 이런 걸로는 당신을 해치지 못해요. 무언가에 대해 겪어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싫어하는 건 비합리적이지 않나요?”

일리는 있는 말이다. 고작해야 가루에 담긴 마력만으로는 날 어찌할 수 없을 테고, 익스티아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나는 아직 직접 겪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태도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 논리적인 설명.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가는데, 직감은 이 모든 요소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머리보다 가슴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대검을 번개같이 휘둘러 에니드의 목을 쳤다. 그녀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아니, 그러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시야가 물결처럼 한 차례 일렁이며, 보이는 모든 광경이 뒤바뀌었다.

에니드란 여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대기를 떨쳐울릴 만큼 강력한 마력을 가진 여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니드에게 아름답다는 표현을 썼다면, 그녀의 미모는 필설로는 형용이 불가능했다. 단지 시각적으로 완미하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이고 마법적인 기운이 사람을 홀리는 아우라를 자아냈다.

그녀가 바로 나브니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브니의 정신계 마법에 걸려들었던 것 같다. 정확한 타이밍은 알 수 없으나, 우르가 포탈을 이제야 열어젖힌 걸 보면 오래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투정하듯이 말했다.

"다짜고짜 죽이다니, 너무하네.”

"미안, 임자가 있는 몸이라."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나브니의 매력은 거의 완벽했다. 욕망의 지배자라는 칭호에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우르술라라는 여자를 몰랐더라면 가슴이 뛰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라힐.”

우르가 나를 채근했다. 알고 있다, 적의 대장이 직접 납신 걸 보니 우리가 일으킨 소동이 오죽 컸나보다.

"다음에 만났을 땐 진짜로 베어주마.”

"진심이라 홍분되네.”

그녀는 우리가 포탈을 여는 걸 말리지 않았다. 심지어 손을 흔들어 배웅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와의 악연이 이제부터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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