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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31화 (131/205)

131화. < 욕망 (1) >

전장을 수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체를 화장하고, 주인 잃은 무구를 거두고, 종교적인 제례를 올리고.

국정을 운영할수록 익숙해져만 가는 절차였다.

그러나 마그나크록의 시신을 수습하는 건 어려웠다. 우리는 작은 산과 버금갈 고깃덩이를 옮겨야 하는 초유의 난제에 직면했다.

옮기기 어렵다고 토막토막 잘라낼 수도 없는 게, 거죽이 질기도록 소문난 크록의 시조신 되시는 분이겠다.

마그나크록에게 상처를 낼 수 있는 단 3개의 무기.

그중 하나는 카룩카이가 들고 여정을 떠났고, 우르술라의 무기는 단검이라 도축용도로는 부적합했다.

결국 나더러 다 하라는 소리였다. 이 거대한 고깃덩이를 혼자 해체하라는 건 백정으로 전직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썰었다, 일일이.

진짜 다른 수가 없겠더라고.

나는 미친 듯이 썰고 또 썰었다. 고기는 너무 질겨서 밭에다 뿌렸다. 마그나크록의 고기는 크록조차도 입질을 할 수 없을 만큼 질겼고,

설령 먹는 게 가능했다 하더라도 동족포식을 권하고 싶진 않았다.

삼 일 밤낮으로 고기를 썰고 또 써니 이젠 어마어마한 양의 뼈와 가죽만이 남겨졌다. 이게 또 골치였다.

어떻게든 가공하기만 하면 엄청난 물건이 튀어나올 거라는 건 알지만, 가공을 해줄 인물이 마땅치가 않았다.

나는 일단 김송화 장인을 호출했다. 현재로서는 그가 공화국에서 가장 기술이 뛰어난 대장장이니까.

김송화 장인은 호출이 있은 후 닷새 뒤에 궁정에 출두했다. 언제까지 나오라고 말미를 건 건 아니었으나, 걸어서 이십 분 거리에 대장간을 열어둔 것 치고는 꽤나 늦은 시일이었다.

"김송화 장인께서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박이나 실장이 김송화의 방문을 알려왔을 때 나는 몇 가지 민원을 처리 중이었다. 나는 보고를 받자마자 민원인들을 뒤로 물렸다.

마그나크록의 가죽과 뼈는 날이 갈수록 골칫덩이로 자리 잡아가는 중이었다. 보관할 공간도 마땅치 않았고, 냄새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걸 처리하는 게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할 과업이었다.

잠시 후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노인이 궁정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홀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동행자는 심지어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왕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홀에 도열한 장군들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나서지 마라.”

나는 팔을 뻗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김송화 장인이 동행인의 뒤에 공손히 시립했다.

그의 동행인은 키가 작지만 탄탄한 근육을 가진 중년 여성이었다.

인상 깊은 건 그녀의 갑옷이었다. 갑옷의 품질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그녀가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신적 존재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전설적인 무구임에 틀림없었다.

“......당신이 카둔이겠군.”

"눈치가 빠르구나.”

여성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강철의 카둔.

강철의 자매단의 주인이자, 소미를 비공식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에사인이다. 그녀는 어지간해서는 황도에 위치한 영광의 용광로를 떠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그녀가 만드는 무구가 황실에 우선적으로 들어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당신이 여기 오는 걸 황제는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리고 나는 그 늙고 고약한 놈을 위해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

카둔이 패기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슬쩍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 늙고 고약한 자의 눈 밖에 나면 살기 피곤해지는 세상이 아니던가.”

"네가 할 말은 아니겠지, 라힐. 그 늙은이가 끔찍이 아끼는 두 번째 아들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글쎄, 별로 아끼는 것 같진 않더군.”

"그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 남다르긴 하다. 어쨌건, 나는 그 불쾌한 놈 얘기나 떠들러 먼 길을 찾아온 게 아니야. 얼마 전에 내가 아끼는 제자 중 한 명인 김송화가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더군. 이 나라에 신화 속 짐승의 뼈와 가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역시, 김송화가 카둔을 불러들였구나.

나날이 빠르게 느는 실력과 지구인 출신이라는 특이점을 고려하자면, 그가 카둔의 주목을 받은 건 자연스럽다.

"맞아, 안 그래도 그 애물단지 때문에 고민이 많아.”

"그것들은 애물단지가 아니라 신물(神物)이다, 라힐.”

카둔이 점잖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동생 느낌으로 편하게 대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주술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세를 지기도 했고, 나이 차는 뭐 어마어마하고, 에사인으로서 배울 점도 많을 터였다.

"쓸 수 없는 한은 애물단지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그걸로 너희들이 쓸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어준다면 어떨까.”

그야 고맙다고 엎드려 절을 할 일이지. 하지만 나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절로 굽혀지려는 무릎에 제동을 걸었다.

"우리야 좋겠지만, 당신은 잃을 게 너무 많은데. 그런 짓을 했다간 다시는 황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지 않나?”

공화국과 황국은 현재 미묘한 긴장상태였다. 이라올라가 사절로 찾아와 가만두지 않겠다며 엄포를 늘어놓고 가긴 했으나, 그 후 실제로 취해진 액션은 없었다.

황국도 내외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급격히 세를 늘리는 뉴 텍사스 때문에 당장은 우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다시 돌아가지 않을 생각으로 왔다.”

"당신 같은 에사인이 황국을 저버리다니, 믿기 어려운걸.”

황국을 떠받드는 일곱 권능만큼은 아니지만, 카둔은 셀 수조차 없을 오랜 세월 동안 충성을 다해온 친황파 에사인이었다. 그녀가 반황파로 돌아선다는 건 세계의 질서가 또다시 일그러진다는 걸 의미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일찍 오고 싶었다. 영광의 용광로를 폐쇄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더군.”

"영광의 용광로를 폐쇄했다고? 하지만 그건 태초의...”

"불씨는 가져왔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카둔이 오른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진흥색 빛무리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둥둥 떠다녔다.

그녀가 손을 거두자, 빛무리도 환상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강철의 자매단이 공화국에 눌러앉을 때부터 촉이 오기는 했다.

어쩌면 카둔이 내 편을 들지도 모르겠다는.

그러나 영광의 용광로를 폐쇄하고 불씨를 챙겼다는 건 편을 드는 걸 넘어서서 같이 살림을 차리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아끼던 아이가 있었다.”

카둔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싹싹하고 영특해서 가르치는 보람이 났지. 아이는 훌륭히 자라나 어느덧 나를 따르는 자들을 이끄는 전사가 되었다.”

“...이라올라 이야기로군.”

소미에게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던 자.

강철의 자매단장 이라올라는 어느 날 실종된 후 황제의 근위전사가 되어 나타났다. 다시 나타난 그녀는 인격이 완전히 바뀐 데다, 불길한 칠흑의 아우라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다. 그 아이가 내 원죄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늙은이가 수족들과 함께 추악한 짓거리들을 벌인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진실을 직시하지 않았다. 지금껏 내가 황국을 위해 해온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 봐 두려웠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그놈들이 못돼먹은 게 잘못이지. 게다가 황제가 아무리 싫더라도 비빌 언덕도 없이 세상을 거스를 수는 없잖아.”

"듣던 대로 친절하구나.”

카둔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네 말로도 내 비겁함을 감싸지는 못해. 결국 침묵의 대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내 구원을 필요로 하던 자로 치르게 되었지.”

“돌이킬 수 있을 방법이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정신계 마법은 나의 영역 밖이니. 당장 내가 할 일은 황제에게 공공연히 반기를 든 너희를 돕는 일이다. 앞으로 할 일이 아주 많을 것이다. 용광로를 설치하는 것부터 무기와 방어구를 맞춤 제작하는 것만 해도...”

카둔이 시선을 위로 올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일 년은 넘게 걸리겠군.”

"예상보단 빠르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물론 나는 그녀를 잘 알고 있다, 강철의 지배자, 대장장이의 신.

그녀는 강철의 에사인이란 수식이 어울리리만치 단단한 여인이었다. 외관으로만 볼 것 같으면 내 대검이 이빨이나 들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무기와 방어구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개인의 역량이다.”

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에사인과 겨뤄본 후 나는 힘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졌다. 울토르의 힘을 흡수하고 나선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변방의 이름 없는 에사인과도 동수를 겨룰 정도면 황제의 모가지를 날릴 날은 요원하다 싶다.

"지금으로서는 길레악은 물론이거니와 로켄조차도 상대하기 힘들다. 그 늙은이를 어떻게 해보려면 너나 내가 네댓 명은 달려들어도 모자랄 것이다 라힐.”

“네댓 명이나?”

조금은 놀랐다. 아무리 황제가 강하다지만, 그래도 같은 에사인 아니냐고.

"하하하.”

카둔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타인의 힘을 흡수해봤으면서도 느끼는 바가 없더냐. 수만 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황제가 그런 이점을 활용하지 않았을 것 같나. 네가 상대하려는 자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끔찍한 죄악을 서슴없이 저질러온 괴물이다. 놈에게 흡수당한 에사인의 숫자가 몇 자릿수일지 상상해본다면 견적을 내는 게 어렵지 않겠지.”

"이상한데. 그렇게 강한 존재가 왜 나라가 이 지경이 되도록 황도에서 두문불출하는 거지? 손짓 한 번이면 다 쓸어버리겠구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너무 지고한 놈이라 만사가 하찮을 수도 있고, 너무 욕심을 낸 나머지 배탈이 났을 수도 있겠지. 황제에 대한 진실은 놈의 제일가는 측근인 길레악만이 알고 있다.”

"당신.......너댓이서 달려들어도 가망 없다는 적을 상대로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그냥 황도에 남아서 망치나 두드리는 게 나았겠는데."

그녀가 재차 웃었다. 바위를 두들기는 듯한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네가 마음에 든다, 라힐. 이곳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사람보다 크록이 더 많은 것 같긴 하다만, 내 장비는 종족을 가리지 않아. 앞으로 잘 부탁하마.”

"나야말로 잘 부탁하지.”

"따라오거라, 송화야.”

"예, 스승님.”

김송화 장인이 고개를 꾸벅이며 카둔을 따라나섰다. 나는 박이나 비서실장에게 지체하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박이나 실장. 당장 용광로를 지을 부지를 마련하세요. 빌딩 하나 올린다고 생각하고 건평을 넓게 산정하셔야 할 겁니다. 대장 일을 도울 인원도 각출하시고.”

“알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비밀스럽게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대한민국으로부터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아서.”

"좋지 않은 소식이로군요.”

"테일리시님이 예선 결승에서 2등을 하셨습니다. 1등은 정은하라는 분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녀의 사무적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테일리시 소식이 중요하기야 하지만, 설마 그녀가 예선 우승을 못 했다는 걸 말하려고 분위기를 잡은 건가.

그녀는 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꿋꿋이 할 말을 이어갔다.

“연관된 건입니다만, 어제 늦저녁 서울 근교에서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신원미상의 무장한 병력이 잔인하게 살해 당했다고 합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모든 언론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중입니다.”

"그게 언론을 탔다고요?”

"예."

소미의 수석사제 임택의 말이 떠올랐다.

- 안 그래도 촉이 좋은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중입니다. 이래서는 얼마 못 버틸 것 같다고 정부에 하소연도 해봤습니다.

테일리시가 폭주해버린 것 같으나, 그녀 탓을 할 순 없다. 언제고 터질 일이 마침내 터졌다고 봐야겠지.

외려 그 난리를 쳤는데 아직까지 언론통제가 됐다는 게 박수 쳐줄 일이다. 스마트폰과 CCTV가 곳곳에 가득한 이런 문민국가에서.

"대한민국 입장은 나왔습니까?”

"예, 현장은 요원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오전에는 수사본부의 발표도 있었습니다.”

"뭐라던가요?”

"북한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아하.”

나는 바보 같은 감탄사를 냈다.

그래, 대한민국 정부에는 그 치트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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