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악어 사냥 (16) >
에신의 많은 부분은 신화라는 이름의 미지에 가려져있다. 어쩌면 크록은 미지로 향하는 입구를 지키는 초병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까마득한 수림 아래 우리가 모르는 신세계가 펼쳐져있을 수도.
눈앞의 사내가 그런 추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가 두른 아우라는 마력의 본래 성질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저런 류의 마력을 다루는 에사인은 존재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무슨 힘을 다루든, 정체가 어찌되었든, 내게 칼을 겨누었다면 우리는 적인 것이다.
"날 멈추게 하고 싶었더라면 애초에 여길 오지 말았어야지.”
나는 대검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마그나크록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나는 지치기는커녕 더욱 고양되었다.
온 몸에서 그야말로 끝을 모를 힘이 샘솟고 있었다. 중국군 십만 명을 베었다는 울토르의 무용담엔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만만치 않겠군.”
로브를 입은 사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대화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마그나크록을 살리고자했고, 나는 내 부하들을 한 명이라도 지켜야만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손을 뻗었다.
지지지직.
전격을 머금은 칼날이 대기를 불태우며 쇄도했다. 나는 그의 공격을 검압만으로 빗겨냈다.
그와의 대결은 강대강으로 부딪혔던 마그나크록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눈이 돌아갈 것만 같은 초고속의 공방이 이어졌다. 찰나의 방심만으로도 사지가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 튀어나온 거지?
응징의 일격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건 기본이다. 응보의 족쇄로 스킬 중 하나를 봉했는데도 미동조차 않는다.
걸음이 닿는 보보마다 무시무시한 전류가 강물처럼 흘렀다. 검을 막아낼 땐 찌릿찌릿한 전격이 팔목까지 올라왔다. 동작은 어찌나 빠른지 대검으로는 놈의 그림자를 베는 것조차 버거웠다.
번쩍.
갑자기 놈의 칼날에서 샛노란 전류가 그물처럼 넓게 방출되었다. 순간적으로 벼락이 치듯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검극이 독니처럼 뻗어오는 게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어디 한 군데는 바람구멍이 나겠구나 싶었다. 나는 피하는 대신 대검을 땅에 힘껏 꽂아 넣었다.
콰르르르릉.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땅거죽이 훌렁 뒤집어졌다.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파편화된 돌멩이가 닿는 곳마다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단 일격만으로 전방 삼십 미터 이상이 초토화되었다.
나는 대검으로 앞을 가린 채 흙먼지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흙먼지 너머에서 강력한, 생생하기 짝이 없는 마력반응이 느껴졌다.
잠시 뒤 그의 상태가 육안으로 확인되었다. 로브가 넝마가 되고 군데군데 가벼운 찰과상을 입는 등 피해가 아주 없진 않았으나, 그게 전부였다. 데미지라고 말하는 게 민망하리만큼 그는 멀쩡했다.
"놀랍군.”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몰아붙여진 건 백 년 안으로는 없던 일이다.”
나도 놀라웠다. 쉽지 않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어디 한 군데쯤은 공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반응형 장갑으로 중무장한 3세대 전차라고 할지라도 걸레짝처럼 찢겨나갔을 공격이었다.
이런 걸 정면에서 맞고도 멀쩡히 말을 걸어오는 게 에사인끼리의 싸움이라는 건가.
그가 넝마가 된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는 짐작했던 대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짧은 귀와 흰 털을 가진, 수인의 아종이었다.
고귀한 고양이.
귓바퀴에는 보석 귀걸이가 매달려 달랑거렸고, 미간부터 콧등으로는 떨어지는 벼락 형상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난 평생 고양이 수인도, 이토록 우아하게 생긴 고양이가 존재할 거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대체 어떤 종족의 에사인인 걸까?
잊힌 번개의 신?
나의 상념은 우르술라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에 의해 뚝 끊기고야 말았다. 기원을 알 수조차 없는 고대의 에사인이 죽음에 직면해있는 소리였다.
마그나크록의 위기는 전세에도 반영되었다. 야생 크록들의 눈에서 붉은 빛이 빠져나갔다. 그들은 섬기는 에사인의 위기에 갈팡질팡하다 짚단처럼 베여 쓰러졌다.
"우리가 이긴 것 같은데.”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두고 항복하시지.”
야생 크록도 내가 통치해야 할 잠재적인 백성이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가록 또한 마찬가지.
나는 정복을 하러 왔지 섬멸전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경계를 넘어온 악이 번창하는구나. 모든 게 예언대로다.”
고양이 수인이 나직하게 한탄했다. 그는 여전히 내게 검을 겨누고 있었으나, 더 싸우려는 것 같진 않았다.
"예언이라면 누구의 예언 말이냐, 아바르가 너희에게도 예언을 하나?”
“아바르라는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네 입에서 나온 것으로 미루어 필시 선지자를 참칭하는 사기꾼이겠군. 미래를 내다보는 자는 위대한 선지자인 아문 탁 한 명뿐이다.”
아문 탁.
역시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그와 나는 머무는 세계가 달랐다. 그는 정글 남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수해 너머의 세상에서 왔다.
"너희는 크록과 어떤 관계지? 크록이 다른 종족과 친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친분이라니,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지 않나.”
그가 불쾌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록은 너희 비늘도, 털도 없는 악한 종족으로부터 영원의 땅으로 향하는 길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지능은 다소 모자라나, 호전성이 강해 파수꾼 역으로 제격이지.”
"너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네 눈엔 우리 군대가 비늘도, 털도 없는 종족으로 보이나?”
“..그 점은 나도 의문이었다. 마그나크록이 왜 자신의 피조물을 상대로 싸우는지. 심지어 마그나크록의 크록보다 너희 크록의 상태가 더 좋아 보이더군.”
"그게 의문이었더라면 좀 더 신중했어야지. 넌 크록끼리의 내전에 끼어든 거다. 나는 딱히 악을 번창시킬 생각이 없어. 그럴 만큼 한가한 입장이 아니라서. 나는 그저 둘로 나뉜 크록을 하나로 합치고 싶을 뿐이다.”
“크록은 마그나크록이 이끌어야만 한다. 마그나크록은 위대한 선지자에게 길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한 자다. 다른 자가 이끄는, 특히 너 같이 털도 없는 자가 이끄는 크록이라면...”
“그렇다면 나도 맹세하마. 길을 지키겠다고.”
그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대화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다는 듯이.
나는 이미 충분한 적을 거느렸다. 이네스가 말했듯이 우리에게 절실한 건 연대였다. 오직 에사인끼리의 연대만이 난국을 헤쳐 나갈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더군다나 정글은 굳이 남쪽을 탐내지 않아도 될 만큼 넓었다. 남쪽을 제외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도 브라질이나 미국과 버금갈 크기로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할 것이다.
"네 뭘 믿고 맹세를 받는단 말이냐?”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진격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의 진심을 보여줄 수 있겠지. 다음으로는..글쎄다, 좋은 방법이 있다면 털 달린
네가 말해다오.”
"털 없는 자의 진심 따위는 알 바 아니다. 네가 아문 탁님과 독대할 용기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럼 독대하도록 하지.”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러거니 말거니 대검을 거두어들였다. 마그나크록과 달리 그는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다. 대화가 통한다면 문명인다운 해결책을 강구해야지 않겠어.
"좋다, 당장은 물러나도록 하겠다. 내가 뒤집을 수 있는 전세는 아닌 것 같으니. 차후 네게 연락을 넣으마. 길을 지키겠다는 네 그 말이 진심이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아문 탁님의 무시무시한 분노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승리가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그가 호기를 부리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고양이 수인은 후드를 다시 뒤집어쓴 후 몸을 돌렸다. 그가 전장을 떠나자, 오르기를 방해하던 전격마법사도 같이 종적을 감추었다.
고양이 수인이 떠난 후 마그나크록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사냥은 이제 최종장에 접어들고 있었다.
우르 황자의 마법이 쇠약해진 마그나크록의 무릎을 꿇렸다. 카룩카이는 추방자의 설움을 풀려는 듯이 놈의 무릎을 창으로 연거푸 강하게 찔렀다.
마무리는 우르술라의 몫이었다. 그녀의 단검이 너덜너덜해진 마그나크록의 두개골 깊이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
거대한 에사인의 단말마가 천지를 떨쳐 울렸다. 동시에 야생 크록들의 투지가 휘발유처럼 날아갔다. 크록들은 미몽에서 완전히 깨어나, 너 나할 것 없이 등을 보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크록들을 배경삼아 마그나크록의 거체가 고목이 넘어가듯 서서히 기울어졌다.
크록들은 열심히 내뺐으나, 그들이 타고 다녔던 가록들은 전장에 머물렀다. 그들은 이네스가 예측했던 대로 내 지배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나는 마그나크록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하나의 중국은 짝퉁이었다.
에사인의 진신과 제대로 겨뤄서 승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료헤이와 카룩카이, 우르술라가 시체 앞에 모여 있었다. 머지않아 우르 황자와 오르기도 합류했다.
“...대단하군.”
우르가 마그나크록의 시체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다른 사람도 반응은 비슷했다. 평소에는 과묵하기 그지없던 작자들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온 몸으로 놀라움을 표현하는 중이었다. 그들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작품일진대도.
대단한 위업이기는 했다. 3만 명의 용병들이 성벽 위에서 전투를 지켜보았다. 그들 사이에 섞인 첩자들의 눈과 입으로 곧 대륙 전역에 소식이 퍼져나갈 것이다. 높아진 명성은 무형의 힘이 되어 내 부하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겠지.
나는 병사들을 불러 마그나크록의 피를 담을 것을 주문했다. 저 귀한 것을 넋 놓고 땅에 흐르도록 두었다간 차수진 박사가 길길이 날 뛸 일이었다.
피 뿐만이 아니라 거죽, 뼈, 마그나크록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다시는 구할 수 없을 귀하디 귀한 재료였다.
자격을 갖춘 대장장이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에사인의 진신으로 벼린 무구를 족히 수백 벌 이상 제작할 수 있겠다.
크롱크는 가장 마지막에 합류했다. 한 손에 비디오카메라를 들고서.
우리는 기념촬영을 마친 후 전장을 수습하기 위해 흩어졌다.
나는 크롱크를 따라가려는 카룩카이를 붙들었다.
“카룩카이.”
"불렀느냐, 라힐.”
카룩카이의 길쭉한 동공이 나를 향했다. 에사인이 된 후 나는 크록의 감정이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어낼 줄 알았다. 그러나 카룩카이의 감정은 여느 크록보다 훨씬 섬세했다.
종족의 쇠락, 자신을 낳아준 존재를 죽음으로 몰아간 데에 따르는 비탄,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
복잡한 감정이 그의 내부에서 한데 뒤섞여 격랑을 이루고 있었다.
"내 깃발을 들고 네 동포들에게로 돌아가라.”
카룩카이가 고개를 왼쪽으로 슬쩍 기울였다.
“그들을 설득해서 데려와라. 이 임무를 맡길 수 있는 건 너뿐이다.”
카룩카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둘러 전장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건 전장 사이를 한가로이 거니는 가록들이었다.
"가장 큰 놈으로 한 마리 골라가겠다.”
그의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나는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침내 망명자가 귀환할 때가 도래했다. 창 한 자루와 가록 한 마리를 타고 정글을 헤메던 낭인이 이젠 종의 부흥을 위한 여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